71. 애태운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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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애태운 벌
2022.12.03.
“어떻게 사실 확인도 해보지 않고 떠날 생각부터 할 수가 있습니까.”
수아를 찾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하준은 펜션에 들어서자마자 서운함을 드러냈다.
“결혼할 사이라는 김지수 말을 정말로 믿은 겁니까?”
“아니. 그 말을 믿었다기보다는…….”
어? 말끝을 흐리던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김지수가 결혼 얘기한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고 보니 그 말이 거짓이었다면 김지수가 직접 말했을 리는 없고, 병실에는 그녀와 자신 둘뿐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범인이 수아 씨를 찾아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사람을 좀 붙여놨었습니다.”
하준은 시우의 생각이었음을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대화 도중 자신과의 관계가 드러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말을 아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다던 시우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저랑 헤어질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아, 아니. 곧바로 헤어지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수아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편지에도 그렇게 적어놨잖아요.”
“편지엔 분명 제 곁을 떠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잠깐이라고 했잖아요. 잠깐.”
“편지 한 장만 남겨놓고 사람이 사라졌는데 그게 잠깐인지 평생인지 단어 하나로 어떻게 구분하라는 겁니까?”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그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하준이 수아의 팔을 당겨 품에 안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모두 얘기하겠다며. 왜 자꾸만 혼자서 감당하려고 해요.”
쏟아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서로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도 나만큼. 아니 나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나 보다.
“미안해요.”
수아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에 대해 급히 사과했다.
“그렇지만 헤어지지 않으면 프로젝트를 엎을 거라고 하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엎어지면 안 되는 거잖아.”
걱정이 묻어난 수아의 음성에 하준이 상체를 세웠다.
“고작 김지수 말 한마디로 엎어질 프로젝트가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은 내가 먼저 다 엎어버렸고.”
“저는 잘 모르니까…….”
“그럼 저한테 물어봤어야죠.”
당연한 거 아니냐는 그의 눈빛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뭐든지 말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구나.
떠날 생각을 하기 전에 그에게 먼저 물었어야 했구나.
“미안해요. 미안해요.”
밀려드는 죄책감에 수아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마지막입니다.”
하아. 깊은 한숨이 실린 하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땐 정말 화낼 겁니다.”
“네! 다신 안 그래요. 진짜. 진짜.”
기다렸다는 듯 수아는 그의 용서를 덥석 물었다.
*
“어. 만났어. 내일 올라갈 거니까. 내일 보자. 어. 그래.”
수아는 걱정하고 있을 다은에게 전화를 걸어 하준과 만났다는 말을 전했다.
전화를 끊은 수아가 하준의 휴대폰으로 시선을 보냈다.
“하준 씨도 팀장님한테 전화해요. 말도 안 하고 내려온 거라면서요.”
“내일 만날 텐데 굳이 전화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걱정하실 텐데 내일 올라간다는 말이라도 해줘요.”
수아가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자 하준은 마지못해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야! 너는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대체 지금 어디야?]
언성을 높이는 지훈의 목소리가 수아에게까지 들려왔다.
“속초.”
[속초? 갑자기 속초는 왜? 너 설마 바닷물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수아 씨 만나러 내려온 거야.”
[수아가 속초에 있었어? 그래서 수아는 만난 거야?]
“응. 지금 같이 있어.”
[그럼 수아 좀 바꿔줘 봐.]
“왜? 네가 수아 씨랑 통화할 이유가 뭔데?”
하준과 지훈의 통화내용을 가만히 듣고 있던 수아가 상체를 숙이며 하준에게로 다가갔다.
“팀장님. 저 수아예요.”
“수아야! 너 정말 수아 맞는 거지? 우리 하준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탁! 지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준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다음에 어떤 말이 나올지 충분히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말하고 있는데 그냥 끊으면 어떻게 해요.”
“전혀 들을 필요 없는 말입니다.”
“얼마나 그다음은 뭔지 궁금한데요. 팀장님한테 다시 물어봐야겠어요.”
수아가 빠르게 하준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휴대폰 이리 줘요.”
수아는 잡아보라는 듯 휴대폰 쥔 손을 허공을 향해 길게 뻗었다.
“지금 주는 게 좋을 거예요. 나중엔 후회할 텐데.”
하준이 수아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수아의 몸이 뒤로 기울면서 하준과 몸이 포개졌다.
제 밑에 자리한 수아를 내려다보던 하준이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그러게, 후회할 행동 하지 말라니까.”
“후회할 행동은 무슨. 그, 그만 일어나요.”
수아가 얼굴을 붉히며 하준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지만, 단단한 그의 가슴은 전혀 밀려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간도 많은데 조금만 이대로 있는 게 어때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과 함께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앗!”
하준은 보이지도 않는 시계 핑계를 대며 상체를 일으키려던 수아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제지했다.
“벌써가 아니라 아직.”
그는 단호한 말투로 수아의 말을 정정했다.
“아침이 되기까지 우리에겐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끈적하게 귓가로 흘러들었다.
“그게 무슨…….”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하준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오늘을 그냥 보낼 거란 생각을 한 건 아니겠죠?”
나를 애태운 벌이라고 생각해. 이제 한계임을 깨달은 하준이 수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을 떼어낸 하준은 수아를 가볍게 받쳐 들고는 침실로 향했다.
하준은 수아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은 뒤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무릎을 꿇은 그의 다리 사이에 그녀의 골반이 닿았다.
내려다본 하준의 시선 끝.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른 수아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준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수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코에 한 번. 볼에 한 번.
이마에서 시작된 그의 입술은 수아의 입술을 찾아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달궈진 그의 숨결이 수아의 얼굴 전체를 감싸왔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수아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고, 하준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아랫입술을 거침없이 빨아들였다.
입술을 가르고 침범한 하준의 뜨거운 숨결이 수아의 입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농밀한 키스와 함께 서로의 타액이 오가는 소리만이 침실의 정적을 갈랐다.
하준의 손이 수아의 원피스 지퍼를 따라 올라가며 그녀의 등줄기를 훑었다.
“하아.”
익숙하지 않은 짜릿한 느낌에 말아 문 수아의 입술 사이로 끈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끝이 훑고 지나간 자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하준의 손이 이윽고 원피스 지퍼의 끝에 다다랐고, 그의 손길을 따라 지퍼가 천천히 내려갔다.
원피스의 지퍼가 모두 내려갈 때쯤 수아의 손은 어느새 하준의 셔츠 단추에 닿아 있었다.
수아는 아직 끝나지 않은 하준의 격렬한 키스에 응하면서 그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하나. 둘. 단추가 하나씩 풀어질 때마다 조각 같은 그의 몸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모든 단추가 풀어졌고 달빛을 머금은 듯 그의 근육들이 선명하게 빛났다.
하준은 기다렸다는 듯 셔츠를 벗어 침대 옆으로 던졌다.
“하. 하아.”
입술에 머물던 하준의 입술이 목덜미를 지나 쇄골에 닿자 수아의 허리가 들썩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하준의 손이 그사이를 파고들었다.
흡. 드러난 맨살에 그의 손끝이 닿자마자 수아는 달뜬 숨을 들이마셨다.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긴장으로 굳어진 호흡을 알아챈 걸까, 하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는 일이냐고. 그래도 노력은 해보겠다며 수아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 사이 하준의 손끝을 따라 원피스가 그녀의 몸을 타고 힘없이 흘러내렸다.
수아는 얼굴을 붉히며 하준의 품속으로 급히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하준이 입술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하준의 입술은 또다시 수아의 목덜미에 닿았고, 마치 도장을 찍는 듯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탐하기 시작했다.
살결 위를 지나는 하준의 뜨거운 입술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준 씨. 사랑해요.”
수아가 팔로 하준의 목을 감싸며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매끄러운 등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수아의 허리를 감쌌고, 좀 더 힘을 줘 자신의 몸과 밀착시켰다.
가슴과 가슴이 닿았고, 두 사람의 몸은 빈틈없이 맞붙었다.
“힘들면 말해요. 언제든 멈출 테니까.”
혹시나 수아가 아파할까. 하나가 되기 위한 하준의 움직임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아니요. 멈추지 말고 계속 안아 주세요.”
“그래도 너무 아프거나 힘들면 바로 말하는 겁니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빨리.”
달뜬 호흡과 함께 수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찌릿한 고통은 어느새 쾌락으로 바뀌어갔고 그렇게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수아와 하준은 서로의 숨결과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가쁜 숨을 토해냈다.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침실 가득했던 열기는 조금씩 식어갔지만 두 사람은 가시지 않는 여운을 온몸의 감각으로 느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 소리에 수아의 눈이 가느다랗게 떠졌다.
수아의 시선 끝이 닿은 곳엔 자신에게 팔을 내어준 채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하준이 있었다.
아. 문득 어젯밤 일이 떠올라 얼굴을 붉히던 수아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 시작하는 겁니까?”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저 때문에 깬 거예요?”
수아가 고개를 바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아니요. 아까부터 깨어 있었습니다.”
“아까부터요? 그럼 저도 깨우지 그랬어요.”
“수아 씨가 옆에 있는 게 꿈이면 어쩌나 싶어서. 꿈이라고 해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나도 뜨거웠던 어젯밤의 기억이 마치 꿈만 같은데. 당신도 그렇구나.
수아가 입술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우리 조금만 더 이대로 있을까요? 아직 퇴실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지금 그 말 무척 위험한 발언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까?”
“어떤 거요? 이대로 있자고 한 거요?”
“아니요. 그 뒤의 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말이요?”
수아의 말에 하준의 입술이 예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다시 시작해도 좋을 만큼 충분한 시간인가 싶어서요.”
순간 그의 말을 알아챈 수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그, 그런 뜻 아니거든요?”
당황하는 수아의 모습에 하준이 피식 웃었다.
“그래요 아직은 환자이니까. 오늘은 여기에서 마무리하는 걸로 타협하죠.”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수아의 붉어진 볼과 깜박이는 동그란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준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려 자신의 가슴팍에 묻었다.
저 사랑스러운 모습을 계속 보다가는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남겨진 시간 동안 서로의 체온을 깊숙하게 느끼며 슬픔으로 시작한 속초에서의 시간을 행복으로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