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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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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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2022.12.06.
“수아야. 어서 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속초에서 올라와 하준의 집에 도착하니 지훈과 유나와 다은. 그리고 시우가 축하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너무 과한 환영 아니에요? 누가 보면 몇 년은 있다가 올라온 줄 알겠네. 저 민망해하라고 일부러 이러시는 거죠?”
“아니. 이런 환영파티는 이번 한 번으로 만족하라는 의미에서 크게 해주는 거야. 그러니까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땐 얄짤없다!”
지훈이 미간을 좁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 그럼요. 아무튼 이렇게 환영해줘서 고마워요. 팀장님. 유나 팀장님. 다은아. 그리고 시우 씨……?”
시우를 부르는 수아의 목소리가 어긋났다.
지훈과 유나, 다은은 그렇다 쳐도 시우는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 건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수아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시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때문에 당황하셨나 보다. 더 이상 숨기는 건 어려울 것 같으니까 지금이라도 말씀드릴게요.”
“뭘요? 뭘 숨겼는데요?”
“사실은 제가 하준이 형 동생이에요.”
“하준 씨 동생이요? 얼마 전에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의 관계에 수아가 눈을 키웠다.
미국에서 왔다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워낙에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니 예상하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그동안 속여서 죄송해요. 회사에서도 비밀을 지켜달라고 제가 신신당부했던 터라 형들도 아무 말 못 했던 거예요.”
자기도 숨기는 게 있었네. 수아는 하준을 향해 자신에게 왜 말하지 않았냐는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흠. 하준이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자. 자. 그러지 말고 수아가 돌아온 기념으로 다 같이 건배나 하자.”
위기에 빠진 하준을 위해 지훈이 와인 잔을 들며 건배 제의를 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와인 잔이 부딪치고 모두 와인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때. 하준이 다급하게 수아의 와인 잔을 붙잡았다.
“수아 씨는 아직 환자니까 술은 안 돼요.”
와인이 무슨 술이야. 수아가 눈을 반짝이며 하준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딱 한 모금만 마실게요. 딱 한 모금만.”
“안 됩니다.”
단호한 하준의 태도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와인 잔을 내려놓으면서도 못내 아쉬운지 수아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우리 얼음송곳 민하준 부회장님께서 이렇게 다정하게 여자 친구를 챙길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 20년 만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야.”
약 올리는 지훈의 말에 시우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를 내며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계는 어느덧 늦은 시간을 가리켰고, 이럴 땐 눈치껏 빠져주어야 한다는 지훈의 말에 모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시끌벅적했던 하준의 집에 깊은 적막이 흘렀다.
“갑자기 조용해지니까 이상하네요. 아닌가? 좀 전의 시끌벅적함이 더 이상한 건가?”
피식 웃으며 소파에 앉으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하준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잠깐 바람 좀 쐴까요?”
“그럴까요?”
수아와 하준은 테라스에 설치된 나무 벤치에 앉았다.
“우와. 밤하늘은 언제 봐도 참 아름답네요.”
달빛을 머금고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수아가 환하게 웃었다.
“수아 씨.”
수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준이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네? 왜요?”
“할 말이 있습니다.”
“할 말이요? 뭔데요?”
“그러니까 그게…….”
하준은 입술에 걸린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수아에게 괴로운 트라우마를 심어준 장본인인 동시에 속초로 도망치게 만든 사람.
하준은 혹시나 수아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를 심어주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말이 망설여졌다.
“뭔데 그래요? 괜찮으니까 어서 말해 봐요. 우리 숨기는 거 없기로 했잖아요.”
당신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 수아가 하준의 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하준이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창고에서 일어난 사건 말이에요.”
“네. 그게 왜요?”
“아무래도 범인을 찾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구나. 범인을 찾았구나.”
어딘지 어색한 대답과 함께 수아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하준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누군지 안 물어봅니까? 혹시 벌써 알고 있었던 겁니까?”
“사실 확신은 없었어요. 그런데 하준 씨가 이렇게 어렵게 말을 꺼내는 걸 보니 맞나보네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그 이름.
“지수 맞죠?”
“네. 맞습니다.”
맞구나. 제 예감이 틀렸기를 바랐는데.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저는 이번 일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요?”
“당연히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만들 생각입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고 있는 건지 내뱉는 하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그 책임이라 게 혹시 법적인 책임을 말하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말하던 하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고와 관련된 모든 사항은 현성 그룹 법무팀에서 진행하겠지만 수사가 진행되면 피해자조사가 필요할 겁니다.”
“피해자조사라면.”
“네. 아마도 경찰서에 가서 그때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표정이 어두웠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나를 경찰서로 보내고 싶지 않아서.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걱정뿐인 하준이 고마웠지만 수아는 쉽사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준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시선을 돌려 수아의 표정을 살폈다.
망설임으로 흔들리고 있는 눈빛.
사실 하준은 그녀의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굴 수는 없는 게 수아의 성격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김지수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사실 수아 씨가 괜찮지 않다고 해도 저는 법적 조치를 취할 생각입니다. 만약 그러지 말라고 말할 생각이었다면 미리 사과할게요. 미안합니다.”
올려다본 하준의 표정은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 놓은 듯 보였다.
이미 결정해놓았으면서 왜 묻는담?
수아는 애초에 그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일 뿐.
“말리지 않을 거예요. 나중에 경찰서에서 연락 오면 가서 진술하면 된다는 거죠?”
“네.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제가 항상 함께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네. 그럴게요.”
법적인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는 걸까. 김지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가 또 다른 일을 벌이지는 않을까.
여러 가지가 걱정스러웠지만 어쩐지 든든하게 들려오는 하준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 수아의 입가에는 조용히 미소가 번졌다.
*
다음 날 아침.
수아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하준에게 넥타이를 매어주고 있었다.
“그냥 저도 출근하면 안 돼요? 이제 진짜 괜찮은데.”
오늘까지는 출근하지 말고 쉬라는 하준의 말이 맘에 들지 않았다.
“오늘까지는 휴식. 출근은 내일부터.”
고집스럽게 그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자꾸 이러면 원래 계획했던 것처럼 다음 주부터 출근하는 거로 할 수도 있습니다.”
“알겠어요. 알겠어. 내일부터 출근할게요.”
더 말했다가는 점점 출근 날짜가 뒤로 미뤄질 것 같은 예감에 수아는 얼른 말을 마무리했다.
“다녀올게요. 잘 쉬고 있어요.”
출근 준비를 마친 하준이 현관에서 구두를 챙겨 신고는 마중 나와 있는 수아를 바라봤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돈도 많이 벌어 오시고요.”
“아. 지금보다 더 많이 벌어 와야 하는 겁니까? 어느 정도면 만족하려나.”
돈을 많이 벌어오라는 그녀의 말에 하준이 피식 웃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지금도 차고 넘치는 거 아니까 얼른 출근이나 해요.”
“수아 씨 없는 회사에 출근하려니 의욕이 떨어지네요.”
하준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축 처졌다.
“보상이 있어야 일의 능률도 오르는 법인데.”
검지를 세운 하준이 자신의 입술 위를 톡톡 두드렸다.
아으. 정말. 못 말리겠어.
수아는 두 손으로 하준의 얼굴을 감싸고는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올게요.”
하준은 아이같이 해맑은 웃음을 보이며 출근길에 올랐다.
*
“수아는 내일부터 출근하는 거야?”
하준의 호출로 부회장실을 찾은 지훈이 물었다.
“이렇게 빨리 출근해도 되는 거야? 좀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함께 온 시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하루 쉬는 것도 겨우 설득했어. 지훈이 네가 업무량 조절 좀 해줘.”
“그래. 그럴게.”
“CCTV는 전부 확인된 거야? 상황은 어때?”
낮게 가라앉은 하준의 음성이 그의 심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워낙 모자에 마스크까지 꽁꽁 싸매고 있어서 얼굴 확인은 못 했어.”
“그런 옷차림으로 회사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의심을 안 했다는 거야?”
“그것도 문제야. 정문을 통과한 사람 중에 그런 옷차림은 없었어. 그날 외부인 출입기록 보니까 꽃 배달 한 건만 있더라고. 그 사람들도 그런 차림은 아니었고.”
“김지수가 진성에서 데려온 직원들은?”
“그 직원들도 모두 식당 CCTV에 찍혀 있어서 알리바이가 확실해.”
“그렇다는 건…….”
반듯하던 하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래. 내부인 소행이라는 거지.”
“현성 직원 중에 김지수랑 범행을 공모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어? 여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좀처럼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범인의 존재에 하준의 표정은 여과 없이 불쾌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냥 이거만 제출하면 안 돼? 직접 자백한 거잖아.”
시우가 녹음파일이 들어 있는 USB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부회장실에서 지수와 대화를 하던 날. 무언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녹음기를 설치해두었었다.
그 덕에 김지수의 자백을 얻게 되었고, 그로써 그녀의 범행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갖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게 중요한 증거가 될 수는 있겠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어. 김지수가 그냥 홧김에 해본 말이라고 둘러대면 방법이 없어.”
지훈의 말에 하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뺌하지 못할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가령 그 메모를 두고 간 사람의 증언이라든지.”
순간 말을 하던 하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지훈과 시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왜? 어디 가려고?”
“CCTV를 다시 확인해봐야겠어. 혹시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잖아.”
하준이 걸음을 서두르자 지훈과 시우도 그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이 로비를 지나던 그때.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동우 씨 축하해요. 진짜 너무 잘됐다.”
“그럼 바로 수술 들어갈 수 있게 된 거예요?”
“네. 이번 주 주말에 수술할 수 있게 되었어요.”
김동우 대리는 사람들의 축하에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 김동우 대리님이네. 이번에 TF팀에 들어갔잖아. 형도 알지?”
시우가 하준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응. 디자인팀에서 추천받은 거로 알고 있어.”
“대리님 아기 수술비 마련이 안 돼서 한동안 고생하신 것 같던데. 수술한다는 거 보니까 수술비가 마련됐나 보네. 진짜 잘 됐다.”
그러는 사이 직원들의 말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그렇게 큰돈을 어떻게 마련했어요? 지난번에 은행 대출 건도 잘 안 되었다고 해서 걱정 많이 했었는데.”
“아. 네. 어떻게 하다 보니 마련하게 되었어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리는 김동우 대리의 행동에 하준의 눈썹이 움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