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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반쪽짜리 증거 (73/105)


73. 반쪽짜리 증거
2022.12.10.



 


“뭐해? CCTV 본다며 안 가?”

하준이 걸음을 멈춘 채 서 있자 지훈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어. 가야지.”

하준이 시선을 거두며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Rrrr.

진동하는 휴대폰이 또다시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네. 박 비서님.”

[부회장님. 지금 급히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들려오는 박 비서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묻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임원진들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임원진들이요?”

[네. 부회장님께 급히 전할 말씀이 있으시다고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하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임원진들이 몰려왔다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님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임원진들이 왜? 무슨 일 생긴 거야?”

하준을 지켜보던 지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모르겠어. 가서 확인해봐야지. 나는 사무실 들렀다가 갈 테니까 너는 먼저 가서 사고시각 김동우 대리 동선 파악 좀 하고 있어.”

“김동우 대리? 갑자기 그 사람은 왜? 너 설마…….”

“확인해봐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하준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다시 동우를 향했다.

김지수와 같은 TF팀인 데다가, 갑자기 큰돈이 생겼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김동우는 의심해 볼 만한 사람이었다.


“그래 알겠어. 그런데 임원진들이 왜 갑자기 쳐들어왔지? 혹시 브랜드 론칭 프로젝트 때문 아니야?”

“내 생각도 그렇긴 한데. 자세한 건 가서 들어봐야지. 최대한 서둘러 해결하고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작은 것도 놓치지 말고 시우랑 제대로 확인해. 부탁한다.”

“형.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지훈이 형이랑 내가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을게.”

시우의 대답을 들은 하준이 얕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부회장실.

부회장실에 들어선 하준이 임원진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세상의 모든 불만을 품고 있는 듯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꼭 저렇게 떼로 몰려다니며 투덜대는 꼴이라니.

하아. 하준의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준이 소파에 앉으며 묻자 기다렸다는 듯 불평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발언은 마치 해야 할 말을 할당받은 것처럼 질서와 순서가 있어 보였다.


“자네가 이번 브랜드 론칭 프로젝트를 무산시켰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벌써 계약도 끝났고, 이미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를 자네 마음대로 무산시킨다는 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야!”

“사업을 이렇게 감정적으로 해도 되는 건가?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었구만?”

프로젝트를 엎을 때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부회장이라는 직책에 앉을 때부터 사사건건 트집 잡기 바빴던 사람들이니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건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다.


“이미 결정된 사안입니다. 그 일로 오신 거라면 헛걸음하셨네요. 그만 돌아가시지요.”

더 이상 이들의 말을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하준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에 이들의 말을 듣고 있는 건 시간 낭비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자네.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프로젝트 무산이 우리 현성에 끼칠 손해를 생각한다면 말이야.”

“말씀 다 끝나신 겁니까?”

아무 표정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하준의 눈이 순간 번쩍 뜨이더니 온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끝나신 것 같으니 제가 한마디 하죠.”

“…….”

“부회장님.”

앞뒤 설명 하나 없이 부회장님이라니. 듣고 있던 임원진들의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저는 자네가 아니고 부회장입니다.”

힘주어 말하는 하준의 눈은 매섭게 날이 서 있었다.


“나이들이 드셔서인지 자꾸 깜박하시나 봅니다. 그런 기억력으로 회사 일은 제대로 하실 수 있으실지 모르겠네요. 이참에 집에서 푹 쉬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뭐, 뭐라고?”

거침없이 뱉어내는 하준의 말들에 충격을 받은 임원진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나가주시죠. 누구와는 달리 저는 할 일이 아주 많아서요.”

더 이상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는 듯 하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태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임원진들은 하나둘씩 부회장실을 빠져나갔다.

부회장실을 나선 그들은 하나같이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불쾌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젊은 놈이 부회장 자리에 앉더니 아주 뵈는 게 없구만?”

“아니 이 회사가 자기 거인 줄 아나. 사업이 장난이야?”

“사업에 사 자도 모르는 놈이.”

“에잇! 무슨 수를 내든지 해야지. 젊은 놈 밑에서 일하기 더러워서 원.”

그렇게 온갖 말들을 쏟아내던 임원진들은 또다시 떼를 지어 전무실로 향했다.


“전무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소파 가운데에 앉은 이승재 전무는 아무런 말 없이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전무님. 이러다가 진성에서 받은 돈을 전부 토해내라고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러게요. 브랜드 론칭으로 자리하나 만들어주는 대가로 받은 돈인데 그게 엎어진 마당에 다시 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모여 앉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진성 그룹에게 돌려줘야 할 돈에 대한 걱정에 애가 타고 있었다.

말없이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이승재 전무가 입을 열었다.


“다시 하게 만들어야지.”

그의 말에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떻게 다시 하게 합니까? 이미 엎어졌는걸.”

“다시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지. 부회장한테 사람 하나 붙여놔. 누구든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은 없으니 뭐라도 걸리겠지.”

“그럼 그걸로 민하준을 협박해서 프로젝트를 다시 성사시키자 이 말씀이신 거죠?”

“역시 전무님은 생각하시는 게 다르시네요. 최대한 빨리 사람을 붙여놓겠습니다.”

 

*

임원진들이 사무실을 나간 뒤 하준은 서둘러 CCTV 확인을 위해 관제소로 향했다.

관제소 문을 열고 들어선 하준을 발견한 보안팀 직원들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하준은 그들의 인사에 빠르게 답하고는 화면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지훈과 시우를 향해 다가갔다.


“어떻게 됐어? 확인됐어?”

“일단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까진 확인했어. 그 후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왔고. 수아 책상에 메모지 올려놓는 것까지 확인됐어.”

“그럼 메모지를 올려놓고 바로 문서창고로 간 거야?”

“아니.”

“아니라고? 그럼?”

“메모지를 올려놓은 다음에 다시 화장실로 돌아갔어. 그리고 몇 분 뒤에 김동우 대리가 나왔고.”

“지금 바로 김동우 대리 불러.”

“하지만 그 검은 옷의 남자가 김동우 대리란 증거가 되지는 않아. 김 대리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 찍힌 게 아니잖아.”

“일단 불러.”

하준의 눈동자는 이미 온기를 잃었고, 냉혹함이 담긴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후.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박 비서가 들어왔다.


“부회장님 김동우 대리가 찾아왔습니다.”

“들여보내세요. 그리고 제가 지시할 때까지 아무도 사무실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하세요.”

“네.”

박 비서가 사무실을 나가고 이내 동우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부회장님 부르셨습니까?”

“네. 김동우 대리. 이리 와서 앉으십시오.”

밀려드는 긴장감에 동우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옮겨와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

“얼마를 받은 겁니까?”

“네? 그게 무슨…….”

갑작스러운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동우가 되물었다.


“김지수가 시키는 일을 하는 대가로 얼마를 받았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침착하게 존대를 하고 있었지만, 하준의 목소리는 동우를 얼어붙게 할 만큼 서늘했다.



“지금 무, 무슨 말을.”

애써 모르는 척하려는 동우의 태도에 하준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생겼다.


“김동우 대리. 나는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요.”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하준의 눈에는 살기가 돋아 있었다.

동우는 긴장된 표정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김지수에게 사주를 받고 이수아 사원의 책상 위에 메모를 올려놓은 것 알고 있습니다. 이미 확인까지 마친 사항이고요.”

하준의 말에 동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이수아 사원이 다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유인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당신을 구속시킬 수 있습니다.”

구속이라는 단어에 동우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고, 순식간에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는 엎드렸다.


“부회장님 죄송합니다.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하다는 말로 해결이 될 문제입니까? 유인한 것도 모자라서 사람이 있는걸 알면서도 선반을 넘어뜨립니까? 그건 살인미수입니다!”

하준의 말에 연신 허리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뱉어내던 동우가 번뜩 허리를 세웠다.


“아닙니다. 창고에서의 사고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럼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나마 정상참작이라도 받으려면.”

하준의 말에 동우는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얼마 전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간 뒤라 사무실이 비어 있어서 와이프랑 아이 수술비에 대해 통화를 했어요.”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그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까 통화내용을 들었는지 김지수 씨가 다가와서는 자신이 부탁하는 일만 해주면 아이 수술비와 치료비까지 대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일이 메모지를 올려두는 것이랑 창고에서의 사고에 대한 겁니까?”

“아닙니다. 제가 부탁받은 건 책상 위에 메모지를 올려두는 것까지였습니다. 창고의 일은 저도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모르는 일이라고요?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고작 메모지 한 장 올려놓는 거로 그 큰돈을 받았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하준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렇긴 하지만. 저한테는 의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당장 수술비가 급했으니까요.”

하아. 또 다른 공범이 있었다니.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창고 일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까?”

“확실한 건 아닌데 김지수 씨가 사무실을 나서면서 다른 누군가와 통화 하는 걸 얼핏 들었습니다.”

“다른 누군가?”

“네.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그런 일은 전문가가 해야 하지 않겠냐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게 창고 일에 대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부회장님.”

메모지를 두는 건 사무실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회사직원을 매수하고, 창고에서의 사고는 다른 전문가를 이용했다?

하. 김지수 치밀하네.

이렇게 치밀하게 수아를 해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에 분노한 하준의 표정이 더욱더 사납게 일그러졌다.


“김동우 대리. 당신이 지금 한 말들 경찰서에서 진술해야 할 겁니다.”

“경찰서요? 그럼 저 구속되는 건가요?”

겁에 질렸는지 동우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만약 당신의 말대로 당신은 메모지를 올려두기만 했고, 창고의 일을 저지른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형량이 그리 무겁진 않을 겁니다.”

메모지의 내용은 그저 회의록을 찾아오라는 단순한 내용이었으니 그걸 보고 이런 엄청난 사고가 일어날 거란 생각을 못 할 수도 있었겠지.


“당신이 협조를 잘해준다면 현성 그룹 법무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드리죠. 그리고 김지수에게 받은 돈은 모두 돌려줘야 할 겁니다.”

돈을 돌려주라는 하준의 말에 동우의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

수술비가 없으니 다시 수술을 못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어진 하준의 말에 동우는 급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현성 그룹 자선사업팀에 연락해서 아이 수술비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부모가 잘못했다고 아이가 부모의 벌을 함께 받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동우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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