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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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위기
2022.12.13.
김동우 대리가 부회장실을 빠져나가자마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훈이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김 대리가 벌인 일이 맞아?”
“메모지를 가져다 놓은 건 맞지만 창고 일은 모르는 일이라는데. 거짓말 같지는 않아.”
하준은 동우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지훈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듣던 지훈이 미간을 좁혔다.
“대체 그 전문가라는 건 누굴 말하는 거지.”
지훈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장 말을 이었다.
“혹시 심부름센터 같은 데를 이용한 건 아닐까?”
심부름센터? 지훈의 말에 뭔가를 떠올렸는지 하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침에 네가 말했던 그 꽃 배달 업체 말이야.”
“꽃 배달?”
“수아 씨 사고 났던 날. 외부인 출입기록에 적혀 있었다던 꽃 배달 업체.”
아. 그거? 그제야 알겠다는 듯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직원한테 배달 온 건지는 확인해 봤어?”
“아니. 동선까지 확인하지는 않았는데.”
업체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꽃바구니까지 들고 있었기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는데.
“너 혹시 그 꽃 배달 업체를 의심하는 거야?”
현성 그룹은 평소 완벽한 방범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전문가라도 정문이 아닌 곳으로 몰래 들어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유일한 외부인이었던 꽃 배달 업체와 심부름센터를 연결 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의심인지 확신인지는 확인해보면 알게 되겠지.”
하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게?”
“그 직원이 누구인지 확인해봐야 할 거 아니야.”
“아니. 그건 내가 확인할 테니까 너는 여기에 있어.”
지훈이 하준의 팔을 붙잡고는 다시 자리에 앉혔다.
갑작스러운 힘에 털썩 주저앉은 하준은 왜 그러냐며 미간을 좁혔다.
“박 비서님이 결재판 한가득 쌓아두신 채로 한숨 쉬고 계시더라. 확인은 나한테 맡기고 너는 밀린 결재나 하고 있어.”
아. 결재.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CCTV와 임원진들에 대한 것들을 처리하느라 많은 일이 밀려 있었다.
수아의 일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회사의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부탁 좀 하자. 확인해보고 바로 연락 줘.”
“그래. 알았어.”
지훈이 부회장실을 나서며 박 비서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박 비서님. 하준이가 결재서류 가지고 들어오시라던데요?”
“정말입니까?”
앗. 저도 모르게 본심을 드러낸 박 비서는 급히 표정을 숨겼다.
박 비서는 책상에 쌓아두었던 결재판 더미를 번쩍 들고는 서둘러 부회장실로 향했다.
“부회장님. 이번에 진행 예정인 현성 가구 신제품 프로모션 계획안입니다.”
“네. 확인하겠습니다.”
“나머지 결재하셔야 할 서류들도 여기 두겠습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서류는 한눈에 봐도 엄청난 양이었다.
“우선적으로 처리해 주셔야 할 서류부터 정리한 것이니 위에서부터 확인하시고 결재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보세요.”
“네. 그럼.”
하아. 박 비서가 문을 나서자마자 하준은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이내 결재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 액정에 지훈의 이름이 나타났다.
하준은 재빨리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확인해 봤어? 어떤 직원 앞으로 온 거래?”
[홍보팀 김민정 사원한테 온 거라고 했다는데.]
“그래서? 배달된 꽃을 받았대?”
[아니. 김민정 사원은 그날 꽃 배달을 받은 적이 없다네? 뭔가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역시나. 하준의 예상대로 그들은 꽃 배달 업체 직원으로 위장하고 들어왔던 것이었다.
“이제 그 꽃 배달 업체만 알아보면 되겠네.”
[내가 누구냐? 이미 차량 번호판 조회 신청해놨지. 결과 나오면 바로 사건 접수 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으쓱거리는 지훈의 모습이 휴대폰 너머로 보이는 것 같았다.
하여간. 일 하나는 빈틈없이 한다니까.
“그래. 수고했다.”
[내가 법무팀 가서 서류들 확인하고 퇴근할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일 처리 되는 대로 퇴근해. 수아 기다리겠다.]
“응. 결재서류만 확인하고 바로 퇴근해야지.”
하준은 서둘러 통화를 끝내고 다시 결재서류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
하준의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
“부회장님 도착했습니다.”
도착했다는 수행 기사의 말에 감겨 있던 하준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네. 그만 퇴근하셔도 됩니다.”
순간 수행 기사의 얼굴에 의아함이 담겼다.
항상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뭐가 그리 바쁜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하던 그가 도착한 지 오래도록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저는 조금 있다가 내릴 테니 먼저 가보셔도 됩니다.”
여전히 룸미러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행 기사의 눈빛을 눈치챈 하준이 말했다.
“아.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수행 기사가 내리자마자 하준은 피곤한 기색으로 마른 눈가를 쓸어내렸다.
조금만 쉬었다가 집으로 들어갈 요량이었다.
회사에서 조금 더 쉬자니 자신 때문에 퇴근하지 못할 비서팀 직원들이 신경 쓰이고, 이대로 집에 들어가자니 자신의 모습에 걱정스러워할 수아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다리고 있을 수아 생각에 걸음을 서두르려던 하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수아 씨?”
하준은 자신의 차 앞에서 쪼그려 앉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수아를 발견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저요? 하준 씨 기다리고 있었지요.”
“대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예요?”
“음. 조금 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수아는 하준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주차장에 내려와 있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하준의 차를 발견하고 그가 내리기를 기다리는데 수행 기사만 내리는 게 아닌가.
처음엔 하준이 차에 타지 않은 건가 싶었지만 주차장을 벗어나는 수행 기사가 반복적으로 차를 돌아보는 것을 보니 그는 아직 차에 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차에서 내리지 않는 이유가 있겠지 싶어 쪼그려 앉아 하준을 기다렸는데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늘 하루 힘들었구나.
그의 얼굴에서 하루 동안의 고단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제가 언제 올 줄 알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언제가 되었든 결국엔 올 테니까.”
방긋 웃으며 시선을 맞춰오는 그녀의 모습에 남아 있던 피로가 모두 풀리는 듯했다.
“늦게 오면 어쩌려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요.”
“네. 네. 우리 빨리 올라가요.”
수아가 하준의 팔에 팔짱을 끼며 그를 이끌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맛있는 음식 냄새가 하준의 코를 자극했다.
“저녁 안 먹었죠? 어서 옷 갈아입고 손 씻고 와요. 저녁 같이 먹게.”
“네. 금방 올게요.”
하준이 방으로 들어가자 수아는 차리던 상을 마저 차렸다.
“뭘 이렇게 많이 만들었어요?”
편안한 차림의 하준이 식탁으로 다가오며 눈을 반짝였다.
“전부 다 저의 솜씨라고 말하고 싶지만 먹어보면 금방 눈치챌 테니 거짓말은 못 하겠네요. 돈의 힘을 조금 빌렸어요.”
그럼 그렇지. 그녀의 솔직함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준이 식탁에 앉자 수아는 그의 앞에 수저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퇴근하고 돌아온 집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건 참 좋은 거네요.”
하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참 좋은 거 자주 해줄 테니까 어서 먹어요. 하루 종일 밥 한 끼 못 먹은 사람 같아 보여요.”
하준이 수저로 밥을 뜨자 수아는 그 위에 반찬 하나를 올려주었다.
그의 시선이 반찬에 닿았다가 이내 수아의 얼굴로 향했다.
“알아서 먹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수아 씨 어서 먹어요.”
“하준 씨야말로 저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먹어요.”
그렇게 따뜻한 시선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비워진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수아의 어깨 위에 하준의 손이 닿았다.
“정리는 제가 해요. 수아 씨는 소파에 가서 좀 쉬고 있어요.”
“아니에요. 하준 씨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이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어요.”
“맛있는 저녁 먹은 보답은 해야죠.”
“흠. 알겠어요. 그럼 정리는 같이하고 설거지는 하준 씨가 하는 거로 해요. 그럼 됐죠?”
“좋아요. 그렇게 해요.”
달그락. 달그락.
수아는 소파에 앉아 설거지를 하고 있는 하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넓고 탄탄하기만 하던 그의 등이 오늘은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다.
수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 소리를 죽인 채로 하준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등 뒤에서 그를 와락 껴안았다.
등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체온에 하준은 움찔 놀랐다.
“아. 지금 손에 거품이…….”
혹시나 수아의 손에 거품이 묻을까 하준의 두 손은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추었다.
“오늘 많이 힘들었어요?”
“왜 그렇게 물어요? 그렇게 보였습니까?”
“네. 오늘따라 유독 힘들어 보여서요. 그게 저 때문인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그게 왜 수아 씨 때문입니까?”
“오늘 지수 일 때문에 더 힘들었던 거잖아요.”
“…….”
정곡을 찔렸는지 순간 하준의 말문이 막혔다.
지수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맞아요. 오늘 김지수에 대한 증거 찾느라 CCTV 확인하고, 증인 찾아보고. 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긴 했죠.”
“괜히 저 때문에 하준 씨가 고생이네요. 미안해요.”
역시 그랬구나. 수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수아 씨 잘못이 아닙니다. 수아 씨는 피해자예요. 저를 향한 김지수의 집착에 의한 피해자. 그러니까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접니다.”
하준의 단단한 말투에 수아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니. 그게 왜 당신 탓일까. 당신도 나와 같은 피해자일 뿐인데.
지친 그를 위로하고 싶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며 위로해 주고 있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해줘요. 하준 씨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지금 이렇게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떠날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꼭 붙어 있어 줘요.”
“응. 하준 씨 옆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이렇게 딱 붙어 있을게요.”
수아는 하준의 허리를 두른 팔에 좀 더 힘을 주며 그를 힘껏 껴안았다.
*
다음 날 아침.
“안녕들 하셨어요?”
마케팅팀 사무실을 들어선 수아가 직원들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수아 씨. 몸은 좀 괜찮아요?”
“좀 더 쉬지. 왜 이렇게 빨리 출근했어요.”
“다친 곳은 다 나은 거예요?”
자리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수아에게로 달려와서는 그녀를 반겼다.
“네. 다 나았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수아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직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자리에 앉았다.
“몸은 진짜 괜찮으신 거예요?”
옆자리에 있던 시우가 고개를 쏙 내밀며 물었다.
“네. 진짜 괜찮아요.”
“혹시 하준이 형한테 들으셨어요? 오늘 오후쯤에 법무팀 통해서 사고 접수할 거라고 하던데.”
“네. 오늘 오후라는 건 못 들었고, 사고 접수할 거란 말은 들었어요.”
“증거는 확실하니까 제대로 처벌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눈썹에 잔뜩 힘을 주며 말하는데 그런 시우의 모습이 어제의 하준과 겹쳐 보였다.
‘누가 형 동생 아니랄까 봐. 표정이 똑같네.’
“네. 그럼요. 현성 그룹 법무팀인데요. 걱정 안 해요.”
수아가 방긋 웃으며 업무를 시작하려던 순간.
책상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누구지?
액정에 나타난 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일단은 받아보고 보이스피싱이면 바로 끊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수아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여보세요.”
[혹시 이수아 씨 휴대폰 아닌가요?]
휴대폰 너머에서 낯선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이야기하는 여성의 목소리에 수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네. 제가 이수아인데요? 누구세요?”
[저는 하준이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네?”
화들짝 놀란 수아의 동공이 중심을 잃고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