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 예상에서 벗어난 전개 (75/105)


75. 예상에서 벗어난 전개
2022.12.17.



 


[저는 하준이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수아의 눈동자가 요란스러운 움직임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이수아 씨?]

이어지는 정적에 혜선이 수아의 이름을 불렀다.


“아. 네. 자, 잠시만요.”

정신을 번뜩 차린 수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재빠르게 근처에 비어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혹시 지금 통화가 어려운가요?]

“아, 아닙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어머. 제가 바쁠 때 전화했나 보네요. 미안해서 어쩌죠?]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요.]

“그런데 혹시 무슨 일로.”

[아. 다름이 아니라. 혹시 오늘 좀 만날 수 있을까요?]

“오, 오늘이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기억 하나가 수아의 뇌리를 스쳤다.

민철의 엄마.

민철과의 추억에 대한 보답이라며 자신에게 돈을 내밀던 그녀의 모습.

내 아들을 다시는 만나지 말아달라던 그녀의 부탁.

하준과 관계를 시작하면서 그저 행복감에 젖어 그의 부모님에 관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다시 반복될 그 아픔의 시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네. 괜찮습니다.”

수아는 일렁이는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며 힘겹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12시 점심시간에 맞춰서 회사 앞으로 차를 보낼게요. 저희 차 타고 와요.]

“아니요. 장소만 알려주시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주소만으로는 여기 찾기 어려울 거예요. 부담 갖지 말고, 차 타고 와요. 그래야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아의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 참! 우리 하준이한테는 비밀로 해줬으면 하는데.]

그래. 비밀로 해야겠지. 그가 알면 안 되는 거겠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어떤 표정으로 마주해야 하는 걸까.

통화를 끝낸 수아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들어찼다.

*



“차량 조회 결과는 어떻게 됐어?”

지훈을 부회장실로 부른 하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조회해보니까 심부름센터가 맞더라고. 경찰들 말로는 심부름센터로 등록은 되어 있지만 여간 의심스러운 게 아니었나 봐. 이번 일로 실체가 밝혀졌다고 고마워하던데.”

“그래? 다행이네. 그럼 서류 정리하는 대로 바로 넘길 수 있는 거지?”

하루빨리 김지수가 처벌을 받기를. 수아를 다치게 한 벌을 제대로 받을 수 있기를. 하준의 마음이 급해졌다.


“응. 정리되는 대로 바로 접수하기로 했어.”

그런 하준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바쁜 그를 대신해 이곳저곳 움직이며 일을 서두른 지훈이었다.


“약하면 소환장일 테고, 세면 구속영장일 텐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접수하고 기다려보는 수밖에.”

“그래. 어쨌든 수고했다. 조만간 술 한잔하자.”

“나야 언제든 콜이지. 이번 일 잘 해결되면 거하게 한잔 사라. 나는 법무팀 들러야 해서 먼저 일어난다.”

지훈이 환하게 웃어 보이며 부회장실을 나섰다.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평소에는 잘 가지도 않던 시계가 오늘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움직이더니 벌써 11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첫 만남부터 늦을 수는 없기에 수아는 미리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는 온몸을 휘감는 긴장감에 발을 동동거리다 12시 정각이 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사무실을 나섰다.

회사 앞에는 언제 도착했는지 검정 세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차 옆에 서 있던 기사로 보이는 한 남자가 다가왔다.


“혹시 이수아 씨 되십니까?”

“네. 제가 이수아 맞는데요.”

“타시죠.”

수아의 이름을 확인한 기사는 뒷좌석 문을 열며 그녀가 탈 수 있도록 도왔다.

하아.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래. 내 생전에 기사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볼 줄이야.

수아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차에 올랐다.

뒷좌석의 문을 닫은 기사는 차량의 뒤로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고, 자동차는 비싼 값을 하는 듯 끝내주는 승차감을 뽐내며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차는 어느 음식점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도착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수아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차에서 내리자 기사는 쿨하게 뒷문을 닫고는 다시 운전석으로 향했다.


“아! 저기요. 저, 저는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채 묻기도 전에 차는 이미 떠나버렸고, 수아는 한껏 긴장한 발걸음으로 음식점을 향해 걸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수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초록색 잔디와 정원에 심어진 다양한 나무들. 그리고 길을 장식하고 있는 다양한 돌까지.

TV에서나 볼 법한 고급스러운 음식점이었다.

긴장하지 말자. 괜찮아. 괜찮을 거야.

수아는 심장을 조여 오는 긴장감에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음식점 안으로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예약하셨나요?”

“아, 아니요. 제가 예약한 건 아니고요. 저는 이수아라고 하는데요.”

“아. 이수아 님.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은 미리 전달을 받았는지 수아의 이름을 듣고는 곧장 자리를 안내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던 직원이 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직원은 조심스럽게 문을 연 뒤 수아의 도착을 알렸고, 이내 수아를 향해 들어가라며 눈짓했다.

수아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룸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덜덜 떨리는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였다.

어머니만 뵙는다고 생각했는데 회장님까지 나오실 줄이야.

한 명도 감당하기 힘든 유리 멘탈인데 한꺼번에 두 명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수아라고 합니다.”

수아의 더듬거리는 인사에 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하준이 엄마. 그리고 이쪽은 하준이 아빠예요.”

“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애써 담담한 척하려 해보았지만, 떨리는 목소리만큼은 감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렇게 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여기가 적당할 것 같아서 이리로 불렀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우리 앉아서 이야기 나눌까요? 이쪽으로 앉아요.”

혜선이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했다.

수아는 땅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걸음을 옮겨 겨우 의자에 앉았다.

혜선은 문 앞에 서 있는 직원을 향해 손짓했고, 직원은 그 손짓을 알아들은 듯 곧장 문을 열고 룸을 나섰다.


“혹시 한정식 싫어해요?”

“아니요. 조, 좋아합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여기는 한정식 전문이라 메뉴가 정해져 있거든요.”

“네. 저 한정식 엄청 좋아합니다.”

“여기 음식 정말 맛있어요. 이따가 많이 먹어요.”

혜선은 친절하게 웃어 보였지만 과거의 상처가 있는 수아에게 그녀의 미소가 친절해 보일 리 없었다.

이제 시작되겠지.

네까짓 거는 우리 아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러니 당장 내 아들에게서 떨어져 나가 달라고.

아직 묻지도 않은 말들을 상상하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때.


“우리 하준이 많이 좋아해요?”

“네? 네.”

예상을 빗나간 혜선의 질문에 수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렇게 수아 씨 부른 거 우리 하준이가 알면 싫어할 텐데. 그래도 수아 씨를 한 번은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혜선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고 부드러웠다.


“그래. 하준이 그 녀석은 절대 먼저 소개해주지 않았을 테니까. 아마 우리가 이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결혼식장에서 처음 만났을 수도 있을 거예요.”

현성이 혜선의 말을 거들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수아의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제 심장 소리에 두 사람의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도 이대로 가다간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수아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한번 부딪혀보자 마음을 먹었다.


“제가 하준 씨와 헤어지기를 원하세요?”

하. 이수아 너무 단도직입적이잖아. 좀 돌려 얘기하지. 미간을 좁히며 후회를 하는데.


“네?”

당황한 건 오히려 현성과 혜선 쪽이었다.


“혹시 제가 하준 씨와 헤어지는 것을 원하시는지 해서요.”

돌아올 답은 뻔했다.

당연하지 않느냐고. 당신이 주제를 알아 다행이라고.


“아니요.”

그럼 그렇……. 뭐라고? 지금 아니라고 하신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네? 죄송하지만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수아의 눈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커졌다.


“왜 그런 질문을 해요? 수아 씨는 혹시 우리 하준이랑 헤어지고 싶어요?”

“아니요. 저는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수아가 빠르게 답했다.


“그럼 왜 그런 질문을 해요.”

혜선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저 하준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떤 아가씨이길래 우리 하준이가 그렇게 죽고 못 살아 속초까지 쫓아 내려갔는지 한번 보고 싶어서.”

뭐지. 이건 내가 예상했던 전개가 아닌데.

수많은 예상 질문을 만들고 그에 대한 답을 내내 고민했는데, 수아는 그중 단 하나도 써먹지 못하고 있었다.


“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우리가 더 고맙죠. 사실 수아 씨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우리 하준이가 애교도 없고 성격이 FM이라 재미가 없잖아요.”

“아닙니다.”

“거짓말할 필요 없어요. 내가 하준이를 키워봐서 알잖아. 진짜 재미없는 아들이야. 그렇죠. 여보?”

혜선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동조를 구하는 듯 현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럼. 진짜 재미없는 녀석이지.”

혜선의 말을 거들다가.


“그래도 믿음직한 아이예요. 절대 한눈은 안 팔 거거든. 그건 내가 보장하죠. 원래 아들은 아빠를 닮는 법이죠. 내가 혜선 씨를 아끼듯 하준이도 수아 양을 많이 아껴줄 거예요.”

혜선과 현성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사랑스러운 눈빛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저, 저기요? 저 아직 여기 앉아 있는데요?

수아의 속마음이 들렸는지 혜선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우리 하준이 좀 잘 부탁해요.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마음은 누구보다 여린 아이거든요. 우리 하준이 버리고 도망가지 말고요.”

도망이라니. 하긴. 도망이 맞긴 맞았지.


“죄송합니다.”

도망에 대한 단어가 나오자마자 수아의 어깨는 불판 위의 오징어 마냥 한없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아니에요. 하준이를 위해서 그랬다면서요. 수아 씨 마음이 어떤지 알게 돼서 우린 너무 좋았는걸요.”

혜선의 말에 수아는 그의 부모님이 자신을 반대하려는 목적으로 부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일까. 심장을 조이던 긴장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하준이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하준은 휴대폰을 들어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아 씨 밥 잘 챙겨 먹을 수 있게 네가 신경 좀 써줘.”

[수아라니? 너 수아랑 같이 간 거 아니었어?]

“뭐? 같이 가다니. 어딜 같이 가?”

혹시나 그녀가 점심을 부실하게 먹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부탁하려던 건데.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큰아버지랑 같이 식사하러 같이 간 거 아니었냐고.]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봐.”

하준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아까 수아가 큰아버지 차를 타더라고. 그리고는 바로 출발하길래 너랑 같이 큰아버지 보러 가는 건가 했지.]

“그런 말 없었는데. 수아 씨가 회장님 차를 탄 게 확실해?”

[그래. 내가 확실하게 봤다니까? 그럼 뭐지? 수아 혼자서 왜 그 차를 탔을까? 큰아버지가 따로 부르신 건가?]

“너는 왜 그걸 이제야 말해!”

[아오. 깜짝이야.]

느닷없이 높아진 하준의 음성에 지훈은 화들짝 놀랐다.


[나는 너랑 같이 간 줄 알았다니까? 왜 화를 내고 그래?]

“아. 몰라! 일단 끊어!”

하준은 거칠게 통화를 끝내버리고는 서둘러 현성의 수행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민하준입니다. 혹시 지금 회장님 어디에 계십니까?”

기사의 대답을 듣는 하준의 미간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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