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벽은 허물어지고
(76/105)
76. 벽은 허물어지고
(76/105)
76. 벽은 허물어지고
2022.12.20.
한정식집 룸 안에서 혜선과 현성. 그리고 수아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대화였지만, 오고 가는 대화는 서로에게 무척이나 즐거웠다.
“이래서 다들 집에는 딸이 있어야 한다고 하나 봐요. 너무 즐겁네요.”
한참을 웃던 혜선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저도요. 사실은 엄청 걱정하면서 왔거든요.”
“걱정이요?”
“네. 혹시나 하준 씨랑 헤어지라고 하실까 봐요.”
수아의 말에 혜선이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눈빛이었다.
“그런 거 있잖아요. 우리 아들이랑 헤어져! 그러면서 돈 봉투 탁!”
수아가 테이블 위로 돈 봉투를 내려놓는 시늉을 했다.
“TV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 상상돼서요.”
사실 TV 속 장면이라고 했지만 그건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였다.
민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보였던 행동, 표정, 말투.
수아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을 따라 하고 있었다.
“하긴.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들이 많이 나오긴 하죠.”
이해한다며 혜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앉아 있던 현성이 말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 반대할 생각 없으니까.”
특히나 그게 하준이라면 더더욱.
“그 녀석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감사한 일이거든.”
말끝에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가 수아 양한테 바라는 건 한 가지밖에 없어요. 하준이와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내 달라는 거. 그거 딱 하나.”
드러내지 않으려 꽁꽁 싸매놓은 아들의 상처가 곪아버리기 전에 하루빨리 약을 발라주는 것. 그것뿐이었다.
“…….”
말없이 현성의 말을 듣던 수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상처투성이 하준의 곁에 이런 부모님이 계신다는 게 안심돼서. 그리고 감사해서.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책임지고 하준 씨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세요.”
주먹을 불끈 쥐고 씩씩하게 말하는 수아의 모습에 혜선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말은 우리 하준이가 수아 씨 부모님께 해야 하는 말 아닌가요?”
“아. 저는 이미 행복하거든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어쩌면 말을 저리도 예쁘게 하는지. 혜선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하준이가 수아 양을 왜 좋아하는지 알겠네요.”
“네?”
“사람은 본래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한테 끌린다잖아요. 수아 양이 우리 하준이에게는 그런 사람인 것 같아서.”
혜선이 말을 덧붙였다.
“수아 양은 밝고, 따뜻하고, 생기가 가득해요.”
마치 타오르는 한낮의 태양처럼.
“그런데 우리 하준이는 어둡고, 차갑고, 공허하죠.”
마치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처럼.
“수아 양이라면 하준이를 밝혀주고, 데워주고, 또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안심되네요.”
혜선이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이해한 수아도 따라 웃으려는데.
탕!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룸 안에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한곳을 향했다.
“헉. 헉.”
얼마나 서둘러 뛰어온 건지 문 앞에 선 하준은 걸음을 멈춘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준 씨?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여기에 온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수아 씨야말로 왜 여기에…….”
“엄마가 잠깐 얼굴 좀 보자고 했어.”
혜선이 서둘러 하준의 말허리를 잘랐다.
자신이 하준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것 때문에 수아가 곤란함을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가 소개해줄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평생 못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불렀어.”
현성도 말을 거들었다.
“아. 그러셨어요?”
차마 말을 더하지 못한 하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나저나 하준이 너도 식사 못 했지? 온 김에 같이 먹자. 이리 와서 앉아.”
현성이 수아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하준 씨. 여기요. 여기.”
지금 이 자리가 상당히 불편한 하준과는 달리 수아는 이미 분위기에 적응한 듯 싱글거리며 그를 불렀다.
하준이 다가와 앉자 수아가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지훈이한테 들었습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서둘러 나오느라 연락할 시간이 없었어요.”
“놀랐잖습니까. 갑자기 회장님 차를 타고 갔다고 해서.”
서로에게 귓속말을 주고받는 하준과 수아의 모습을 혜선과 현성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때마침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음식이 가득 들린 카드를 밀며 직원들이 들어왔다.
직원들은 다양한 음식들이 정갈하게 담긴 접시들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세팅이 모두 이루어졌는지 가벼운 목 인사를 하며 직원들이 나갔고, 혜선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음식들을 앞 접시에 덜어 현성에게 내밀었다.
“자. 이제 먹자. 하준이도 수아 양도 많이 먹어요.”
현성이 식사를 시작하자 하준과 수아도 식사를 시작했다.
하준이 자신의 앞에 있는 보쌈을 집어 입에 넣으려던 순간 어디에선가 날아오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수아를 바라보는데.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의 젓가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며 하준은 직감했다.
아. 보쌈에 손이 안 닿는구나.
아무리 분위기에 적응을 했어도 자리가 자리인지가 선뜻 엉덩이를 떼지 못한 것이리라.
눈을 반짝이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준은 자신의 젓가락에 있는 보쌈을 내려놓고, 새로운 보쌈을 집어 수아의 앞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오예! 수아는 접시 위에 안착한 보쌈을 재빠르게 입속에 넣고는 오물거리며 씹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하준은 보쌈 한 점을 더 집어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고마워요.”
눈을 찡긋하며 수아도 자신의 앞에 있는 음식을 하준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음식을 챙겨주다 보니 어느새 식사가 끝나있었다.
식당을 나서며 현성이 물었다.
“혜선 씨랑 나는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너희는 이제부터 뭐 할 거야? 아직 점심시간 많이 남았잖아.”
“아. 저희는 그러니까.”
쑥스러운지 대답을 망설이는 하준의 모습에 수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희도 데이트하려고요. 어머님. 아버님께서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갑작스러운 호칭에 놀란 듯 혜선과 현성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가늘어지며 즐거운 웃음을 보였다.
“어머. 그 호칭 너무 마음에 드네요. 당신도 그렇죠?”
혜선의 물음에.
“그러게요. 수아 양도 이렇게 쉽게 하는걸. 아들이란 놈한테는 20년 동안 들어본 적이 없으니.”
현성이 고개를 잘게 저었다.
“수아 양이 이 녀석 연습 좀 시켜줄 수는 없나? 수아 양 말이라면 들을 것 같기도 한데.”
오고 가는 대화를 듣던 하준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저희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준은 난감한 상황에 급하게 인사를 하고는 수아의 팔을 붙잡아 몸을 돌렸다.
“어머님. 아버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하준에게 끌려가면서도 수아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점점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현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수아 양이랑 함께 있으면 우리 아들이 저렇게 웃기도 하네요.”
“그러게요. 저렇게 환하게 웃을 줄도 아는 아이였네요.”
현성과 혜선에게는 수아로 인해 변해가는 하준의 모습이 반갑고 기뻤다.
*
손을 잡고 길을 걷던 하준이 걸음을 멈추고는 수아를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자리라 많이 놀랐죠?”
자신도 이렇게 놀랐는데 그녀는 얼마나 놀랐을까.
아직 몸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혹시 체하지는 않을까 식사하는 내내 걱정이었다.
“미안합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하준이 사과했다.
“네? 뭐가요?”
“이런 불편한 식사 자리에 오게 만든 것 말입니다.”
하준의 말에 수아가 고개를 바짝 들어 올리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런 이유라면 사과할 필요 없어요. 저한테는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으니까요.”
즐거웠다고? 설마 그럴 리가. 하준의 눈썹이 들썩였다.
“하준 씨 부모님께서 엄청 친절하게 대해주셨거든요.”
표정을 보면 진짜인 것 같긴 한데, 원하는 음식도 제대로 못 먹는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준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수아가 말했다.
“저보다는 하준 씨가 더 불편해 보이던데요?”
“음. 불편했다기보다는 조금 어색했습니다.”
웃음이 맺혀 있던 그의 입가가 굳어졌다.
“지훈이 없이 회장님, 사모님과 따로 식사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이런 자리가 어색합니다.”
그랬구나. 어쩐지. 처음 인사드리는 자신보다 더 표정이 굳어 있더라니. 그 이유 때문이었구나.
불편하고 어색해 피하고 싶었을 자리를 당신은 나 하나 때문에 피하지 못했구나. 아니. 피하지 않았구나.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수아 씨가 즐거웠다니 다행입니다.”
하준이 웃으며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이 되던지. 아직도 이렇게 손이 떨립니다.”
하준이 오른손을 들더니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인위적인 그의 움직임에 웃음이 나왔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걱정을 하고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지난번에 수아 씨가 했던 말들이 자꾸만 떠오르는데.”
“제가 했던 말이요?”
수아가 눈을 키우며 묻자, 말을 망설이던 하준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김민철의 어머니라는 사람 말입니다.”
아. 그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회장님과 사모님께서는 절대로 그러실 분들이 아니라는 거 저는 알고 있지만, 수아 씨는 아직 모를 테니까. 그저 막연한 두려움이었을 테니까.”
언제나 그랬듯 그의 따스한 음성은 불안한 마음에 위로와 안정이 되어 주었다.
아. 정말 당신이라는 사람. 너무 사랑스럽잖아.
수아는 하준의 허리에 팔을 둘러 꼬옥 끌어안고는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하준 씨 말이 맞아요. 사실 식당에 도착하기 전까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요.”
수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의 앞에서는 애써 아닌 척,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동안 저는 그날의 기억이 너무 아파서 저 스스로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만 하면서 살았어요.”
그녀가 내려놓던 하얀색 봉투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으니까. 비참했던 그 날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으니까.
“그래서 재벌가 사람들은 모두 다 민철의 어머니 같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의 벽을 세웠죠.”
하준이 현성 그룹의 부회장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려 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진짜 튼튼한 벽이라고 나름대로는 자부하고 있었는데.”
쓴웃음이 지어졌다.
“하준 씨 때문에 조금씩 금이 가더니, 결국엔 오늘 몽땅 다 무너져 버렸네요.”
모두 무너졌다고? 하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 미안합니다.”
“아니요. 저는 지금 하준 씨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응?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며 하준이 눈을 키웠다.
“하준 씨. 그리고 어머님, 아버님 덕분에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하준의 동공이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마워요. 제 옆에 와줘서. 그리고 저렇게 따뜻한 부모님을 만날 수 있게 해줘서.”
올려다보는 수아의 눈빛은 별이라도 박아 놓은 듯 한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미치도록 사랑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