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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공개 연애 (77/105)


77. 공개 연애
2022.12.24.


홍보팀과의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지훈은 디자인팀 사무실을 흘깃 쳐다봤다.

비어 있는 유나의 자리.

회의 갔나? 생각이 드는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아으. 깜짝이야. 호랑이가 따로 없네.


[오빠.]

전화를 받자마자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유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어보니 아마도 밖인 듯했다.


[지금 통화할 수 있어?]

“내가 안 된다고 하면 끊을 거야?”

[아니. 당연히 안 끊을 거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유나의 반응에 지훈은 기가 찼다.

어차피 끊을 생각도 없으면서 매번 저 질문은 왜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따 퇴근하고 약속 있어?]

“응. 있어.”

[누구랑? 누구랑 약속 있는데?]

“누구라고 말하면 네가 알아?”

“없구나? 약속 없네.”

“있다니까?”

“저녁 같이 먹자. 나 외근 나왔는데 여기 거래처 직원한테 파스타 집 추천받았어.”

“나 약속 있다니까.”

“주소 보내줄게. 퇴근하는 대로 여기로 와. 끊는다.”

하아. 거짓말인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끝까지 제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유나의 태도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훈은 휴대폰 액정을 살피며 시간을 확인했다.

남아 있는 업무가 많은데. 6시까지 마칠 수 있으려나.

사무실로 향하는 지훈의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

하준과의 짧은 데이트를 마치고 바쁘게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어 있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퇴근 준비를 마친 직원들이 하나둘씩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수아 씨. 퇴근 안 해요?”

자리에서 일어서던 민준이 아직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수아를 향해 물었다.


“아. 신규입점 매장 기획서 마무리가 아직 안 돼서요. 이것만 하고 퇴근하려고요.”

“퇴원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퇴근하지 그래요.”

“조금만 하면 돼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요. 그럼 내일 봅시다.”

그렇게 모든 직원이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사무실에는 수아 혼자 남게 되었다.

주변을 살피던 수아의 시선이 TF팀 사무실로 향했다.

진성 그룹과의 계약은 무산되었지만, 브랜드 론칭 자체가 무산된 것은 아니었기에 여전히 TF팀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모두가 퇴근한 TF팀 사무실에는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 하준이 있었다.

퇴근 시간 15분 전.

하준은 일이 늦어질 것 같다며 집에 먼저 가서 편하게 쉬고 있으라는 메시지를 보내왔었다.

하지만 수아는 그와 함께 퇴근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덤으로 업무에 집중한 그의 눈부신 모습도 감상하고.

수아는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기획서로 시선을 옮겼다.

*

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팀장님. 저희 오늘 저녁 먹고 들어갈까 하는데 혹시 함께하실래요?”

함께 퇴근길에 오른 팀원들이 지훈을 향해 물었다.


“아니.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내 몫까지 맛있게들 먹고 들어가요.”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팀원들이 1층에서 내리자마자 지훈은 급한 마음에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여러 번 눌렀다.

유나가 보내온 주소에 도착한 지훈은 주차를 마치고 식당 입구로 향했다.

지훈의 시야에 저만치 앞에 서 있는 유나가 들어왔다.


“김유나. 김유나.”

잘 안 들리나. 벌써 돌아보고도 남았을 그녀가 어쩐 일인지 여러 번 이름을 부르는데도 묵묵부답이었다.

점점 거리를 좁히자 그녀의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이 보였다.


‘노래 듣느라고 못 들었구나.’

지훈은 걸음을 서둘러 유나의 앞에 섰다.


“어? 언제 왔어?”

유나가 눈을 키우며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내었다.


“무슨 노래를 듣는데 부르는 소리도 못 들어?”

“나 불렀어? 내가 최고로 애정하는 사람 목소리에 집중하느라 못 들었나 보네.”

최고로 애정하는 사람? 그게 누군데? 지훈이 궁금하다며 눈을 키웠다.


“예약 시간 다 됐다. 들어가자.”

유나가 지훈의 팔을 붙잡고는 가게 안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누구냐고. 네가 최고로 애정하는 사람.

답을 얻지 못한 지훈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유나가 직원에게 주문을 하는 동안에도 지훈의 못마땅한 표정은 계속 이어졌다.

직원이 돌아가고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지훈이 물었다.


“네가 최고로 애정하는 사람이 누군데?”

“왜? 신경 쓰여?”

설마 이 남자 질투하는 건가? 유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시, 신경은 무슨. 그냥 무슨 노래를 그렇게 열심히 듣는지 궁금한 것뿐이야.”

“그럼 오빠도 한번 들어볼래? 백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번 직접 들어보는 게 좋잖아.”

유나가 이어폰 한쪽을 내밀자 지훈은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이어폰을 잡아 들었다.


“재생시킨다.”

유나는 자신의 귀에도 이어폰 한쪽을 끼우고는 휴대폰 화면을 터치했다.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는 듯 지훈이 미간을 좁혔다.


“재생시킨 거 맞아? 아무 소리도 안 들리…….”

말하는 순간. 귓가에서 작은 소리가 들리는 듯하자 지훈은 말끝을 흐렸다.


[오빠. 자? 진짜로 자는 거 맞아?]

[……으응.]

이게 노래야? 그냥 김유나 목소리 같은데.

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유나를 바라봤다.


“계속 들어봐.”

유나가 손가락으로 귓가를 가리키며 웃었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으응. ……응.]

[오빠. 나 좋아해?]

[으응.]

[정말? 정말 나 좋아해?]

[응. 좋아해. 좋아해…….]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발음은 정확했다. 좋아해.

설마 이거 내 목소리야?

지훈은 화들짝 놀라며 이어폰을 거칠게 잡아 뺐다.


“내가 최애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본 소감이 어때?”

“이게 뭐야? 대체 언제 이런 걸 녹음한 거야?”

당황한 지훈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언제가 중요해? 오빠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유나가 지훈을 향해 상체를 숙이며 다가왔다.


“이건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아. 특히 이 부분.”

유나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끈적한 음성이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좋아해. 좋아해.”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 지훈인데, 얼마나 당황했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야! 그거 빨리 지워!”

지훈이 유나의 휴대폰을 향해 급하게 손을 뻗으며 상체를 기울이던 바로 그때.

쪽. 소리와 함께 유나의 입술이 지훈의 입술 위에 닿았다.


“김유나! 너 이게 무슨…….”

혹시 누가 본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싶어 지훈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본 사람은 없는 듯했다.


“얼마나 어렵게 얻어낸 고백인데. 지우다니 말도 안 되지.”

“말한 사람은 기억도 못 하는데 그게 무슨 고백이야.”

“그동안 오빠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늘 궁금했었거든?”

“아니야. 그거 고백 아니야.”

“그런데 이제 알았어. 오빠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거.”

이번에도 그녀는 지훈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빠가 뭐라고 해도 이게 나한테는 고백이고 희망이야. 그러니까 지우라는 둥 고백이 아니라는 둥 그런 얘기는 하지 마. 소용없으니까.”

하아. 해맑게 웃는 유나를 바라보던 지훈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유나 어머니. 도대체 유나의 선은 언제쯤 진행되는 건가요.

제발 서둘러 주세요. 제가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기 전에.

지훈은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껌뻑. 껌뻑.

서류를 향하던 수아의 눈이 느리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어찌나 잠이 쏟아지는지 졸다가 책상에 머리를 부딪칠 뻔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수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TF팀 사무실을 살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그림 같은 모습으로 앉아 일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


‘아으. 누구 남자친구인지 참 잘 생겼다.’

수아는 뭔가에 홀린 듯 그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직 일이 많이 남은 것 같은데 조금 자도 괜찮으려나?’

여전히 미동도 없는 그의 모습에 수아는 잠깐만 쉴 요량으로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

잠시 후.

한참을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던 하준이 뻐근해진 목을 좌우로 돌리며 허리를 곧게 폈다.


“벌써 9시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던 그의 시야에 마케팅팀 사무실이 들어왔다.

불 꺼진 어두운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책상 하나.

설마…….

하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그녀의 자리로 향했고, 책상에 엎드린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수아를 발견했다.


“하. 먼저 가라니까. 말도 안 듣고.”

먼저 퇴근하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알겠다는 답문까지 받은 터라 그녀가 기다릴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깨울까. 아니면 이대로 안고 퇴근해버릴까.

마음 같아선 후자를 선택하고 싶지만, 그녀가 싫어하겠지.

어쩔 수 없이 체념하면서도 그녀를 안고 퇴근하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돼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준은 수아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었다.


“수아 씨.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하준의 손길에 수아의 눈꺼풀이 서서히 밀려 올라갔다.


“하준 씨?”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하준이라는 것을 알아챈 수아가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일이 이제 끝난 거예요?”

“집에 가 있으라니까. 왜 불편하게 여기서 자고 있어요?”

하준은 헝클어진 수아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오늘은 하준 씨랑 같이 퇴근하려고요.”

“수아 씨가 기다리고 있는 거 알았으면 좀 더 빨리 끝냈을 텐데. 미안합니다.”

“미안하긴요. 제가 말도 안 하고 기다린 건데요.”

“그래도.”

“그런데 일은 다 끝난 거 맞아요? 아직 남아 있는 거면 계속해도 돼요. 더 기다릴 수 있어요.”

“아뇨. 오늘 할 일은 다 끝냈습니다. 퇴근해도 됩니다.”

“그래요? 그럼 이제 집으로 갈까요?”

수아와 하준은 퇴근 준비를 마친 뒤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걷던 수아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하준과 수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왜요? 뭐 잃어버린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잃어버린 거는 없는데.”

수아가 말끝을 늘이더니 살며시 하준의 손을 잡았다.


“이러고 싶어서요. 혹시라도 누가 있으면 안 되니까.”

고작 손 하나 잡았을 뿐인데 회사에서 스킨십을 하려니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상관없는데.”

“네? 뭐가요?”

하준이 잡은 손을 당겨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누가 있든, 누가 보든 상관없다고요.”

“…….”

“말 나온 김에 수아 씨와 저의 관계에 대해 밝히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이렇게 몰래 손잡을 필요도 없는데.”

하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물었다.


“안 돼요. 어떻게 손 한번 맘껏 잡겠다고 공개 연애를 해요.”

미간을 좁히며 수아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고작 손 한번 잡겠다고 그럴까.”

잡혀 있던 손을 당기며 하준이 수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수아의 입술 위에 하준의 입술이 살짝 포개졌다가 금세 떨어졌다.


“이렇게 맘껏 뽀뽀도 할 수 있고, 키스도…….”

멀어졌던 그의 입술이 어느새 수아의 입술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당황한 수아가 하준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뭐하긴요. 공개 연애의 경우 할 수 있는 다양한 스킨십에 대해 말하고 있잖습니까.”

“그, 그런 거 알고 싶지 않거든요? 그리고 공개 연애해도 회사에서 키스는 안 돼요!”

내 잘못이지. 먼저 시작한 내 잘못.

수아는 하준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콩 내리치고는 서둘러 지하주차장을 향해 달려나갔다.


“어디 갑니까. 하던 일은 마저 하고 가야죠.”

입술 가득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하준이 수아의 걸음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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