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시작된 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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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시작된 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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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시작된 발악
2022.12.27.
“팀장님. 현성 가구 신제품 마케팅 기획안입니다.”
“네. 확인해볼게요.”
지훈에게 결재판을 전달한 뒤 자리에 앉으려는데 수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여보세요.”
[야! 이수아! 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휴대폰 너머로부터 비명에 가까운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쏟아졌다.
전화를 걸어온 것은 김지수였다.
왜 전화한 걸까. 혹시 경찰서에서 벌써 연락이 간 건가?
며칠 전 하준과 진술서를 작성하고 돌아왔기에 그녀가 연락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수아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지훈의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곧장 비어 있는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전화해서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모르는 척하지 마! 네가 신고한 거잖아!]
그럼 그렇지. 경찰서에서 연락이 간 모양이구나.
“나 지금 근무 중이야. 너랑 길게 얘기할 시간 없어.”
[나 지금 회사 앞이야. 당장 나와! 당장!]
“너랑 만날 이유 없어. 만나서 할 얘긴 더더욱 없고.”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는 듯 수아의 목소리가 확고했다.
[그래? 그럼 내가 가면 되겠네. 어차피 현성이랑 프로젝트도 엎어졌고, 소환장까지 나온 마당에 못 할 것도 없지.]
“그건 안 돼! 지금 바로 내려갈 테니까 밖에서 기다려.”
당장이라도 찾아올 것 같은 지수의 음성에 수아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제지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수아의 걸음이 빨라졌다.
회사 문을 나서니 분노에 가득 차 붉으락푸르락 얼굴빛이 변해있는 지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수아 너지? 네가 하준 오빠한테 사고 접수하라고 시킨 거지?”
“여기 회사 앞이야.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해.”
지나가는 직원들의 시선을 느낀 수아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지수가 그 뒤를 따랐다.
“어? 수아 씨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1층 카페에서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고 있던 민준이 미간을 좁히며 수아의 모습을 살폈다.
“아! TF팀이었던 김지수 씨네. 그런데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나? 어딜 가는 거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민준은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며 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
“당장 고소 취하해!”
회사 근처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지수의 가시 세운 음성이 들려왔다.
앞서 걷던 수아가 뒤를 돌며 지수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뭐?”
잔뜩 흥분한 자신과는 달리 수아가 보이는 차분한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물었어.”
“네가 창고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나를 신고해서 소환장이 날아온 거잖아.”
“아니. 나는 그저 그날 창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진술을 했을 뿐이야. 나머지는 현성 그룹 법무팀에서 진행했고.”
“너. 너…….”
분노로 가득 찬 지수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미 접수는 끝났고, 네 말대로 소환장까지 발부된 마당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겠다던 하준의 약속이 떠올라서일까.
사납게 일그러진 지수와는 달리 수아의 태도는 무척이나 태연했다.
“돌아가. 그리고 네가 저지른 죄. 제대로 죗값 치러.”
“내가 그냥 이대로 당할 것 같아? 나 진성 그룹 외동딸 김지수야! 두고 봐. 니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지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악에 받친 듯 날카로운 소리를 뱉어내고는 이내 거친 발걸음으로 사라져갔다.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다리가 풀리며 수아는 옆에 있던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당당한 척은 했지만 누군가에게 이토록 모질게 말해본 적이 없었기에 말하는 내내 긴장한 탓이었다.
“설마 또 무슨 일을 저지르지는 않겠지?”
가만두지 않겠다던 지수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하준 씨는 다치지 말아야 하는데.”
다시 회사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수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이수아 씨. 마케팅 기획안 검토해봤는데.”
“팀장님. 이수아 씨 지금 자리에 없는데요?”
수아가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시우가 지훈에게 말했다.
“그래요? 어디 갔습니까?”
“글쎄요. 저도 잘…….”
시우가 말끝을 흐리자 뒤편에 앉아 있던 민준이 의자를 돌리며 목소리를 냈다.
“아까 TF팀 김지수 씨랑 회사 앞에서 이야기하는 거 봤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나 보네요.”
“네? 누구요?”
민준의 말에 지훈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지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김지수 씨요?”
“네. TF팀이었던 김지수 씨요.”
“확실합니까?”
“그럼요. 제가 또 눈이 2.0 2.0 아니겠습니까.”
민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뭐야? 혹시 나 뭐 잘못 말한 거 있어?”
갑작스러운 지훈의 행동에 민준이 당황한 듯 눈을 껌뻑이며 주변 직원들에게 물었다.
직원들은 자신도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곧장 업무에 집중했다.
수아가 지수를 만났다는 이야기에 지훈은 사무실을 빠져나오자마자 법무팀으로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혹시 접수한 사고 건 결과 나왔습니까?”
“네. 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어떻게 아시고 먼저 전화를 주셨네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소환장 발부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도주 우려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는지 구속영장까지 가지는 않았더라고요.”
아. 소환장. 그것 때문에 찾아온 거구나.
지훈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휴대폰에서 통화 연결음이 들리는 동시에 지훈의 귓가에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저한테 전화하고 계신 거 맞아요?”
들려온 목소리에 지훈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수아는 자신의 휴대폰 액정을 보이며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지훈이 빠르게 걸음을 옮겨 수아의 앞에 섰다.
“너 김지수 만났다며?”
“어?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겁도 없이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걔를 혼자 만나?”
걱정했던 마음이 안도로 바뀌면서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네? 아, 아니 별일 없었어요.”
“지금 소환장 발부돼서 악에 받쳐 있을 텐데 또 무슨 일을 벌일 줄 알고 혼자 나갔어. 걱정했잖아.”
아. 내가 걱정을 끼쳤구나.
반듯하던 수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죄송해요. 제가 안 나가면 회사로 들어와서 난리를 피울 것처럼 말하는 바람에. 마음이 급해서 그만.”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나 하준이한테 말을 했어야지.”
계속된 지훈의 질책에 수아의 고개가 점점 바닥을 향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아차. 이게 아닌데.
한마디 더 뱉어내려던 지훈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는 수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흥분했다.”
“아니에요. 저 때문에 많이 걱정하셔서 그런 거 알아요.”
수아가 두 손을 허공에서 내저었다.
“그래. 소환 날짜까지 며칠 남아 있어. 그 사이에 김지수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고.”
벌써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당분간은 어디를 가든 절대로 혼자 다니지 말고. 김지수나 모르는 번호로 연락 오는 건 절대로 받지 말고. 알았지?”
“네. 그럴게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이제 들어가자.”
두 사람은 사무실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
“아빠. 나 이제 어떻게 해? 나 진짜 검찰청으로 가야 하는 거야? 안 가면 안 되는 거야?”
수아를 만나고 돌아온 지수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두려움을 드러냈다.
“아니야. 설마 아빠가 하나뿐인 딸 검찰청에 보낼까. 고소 취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아빠가 알아볼게.”
나 김진성이 마음먹어서 못 하는 일은 없지.
“회유를 하던 협박을 하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딸.”
“그럼 아빠가 민하준을 맡아. 내가 이수아를 맡을게.”
“이수아? 걘 누군데?”
“그 창고 피해자. 이수아만 잘 설득해도 고소 취하 가능할 수도 있어.”
아직 늦지 않았어. 어떻게 해서든 설득하고야 만다.
지수의 눈이 빛났다.
“그래. 그럼 잘 설득해봐. 혹시나 안 되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응. 아빠. 고마워. 그럼 나 아빠만 믿고 간다.”
“그래. 딸. 이따 집에서 보자.”
뭐가 그리 좋은지 지수는 싱긋 웃는 얼굴로 손까지 흔들어 보이며 회장실을 나섰다.
그녀가 회장실을 나서자마자 진성은 굳은 표정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들리더니 이내 전화가 연결되었다.
진성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전무님. 저 진성 그룹 회장 김진성입니다.”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박 비서가 부회장 실로 들어섰다.
“부회장님. 마케팅팀 민지훈 팀장님이 오셨습니다.”
“네. 들여보내세요.”
지훈이 왔다는 말에 하준은 확인하던 결재 서류를 덮고는 소파를 향해 걸어 나왔다.
“민지훈 너는 꼭 퇴근 시간 다 돼서 오더라?”
지훈이 가져온 서류 때문에 6시 칼퇴근을 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자 하준이 불평을 드러냈다.
“야! 나는 뭐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냐? 오늘 중으로 결재가 되어야 내일 회의를 할 거 아니야. 빨리 진행하라고 재촉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너. 민하준.”
지훈이 미간을 좁히며 따져 묻자.
“그래. 알았다. 알았어.”
하준은 곧장 꼬리를 내리며 지훈이 내민 서류를 살폈다.
“오늘 지수 소환장 발부됐대.”
느닷없이 들려온 지훈의 말에 서류를 향하던 하준의 시선이 급하게 올라왔다.
“소환장? 구속영장이 아니고?”
“어. 아무래도 도주 우려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겠지?”
“하긴. 제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우리 쪽에서 김지수한테 사람 한 명 붙여놓자.”
“그래. 한번 알아볼게.”
제 할 말은 끝났는데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지훈의 모습을 하준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혹시 나한테 더 할 말 있어?”
하준의 물음에.
“응. 당분간은 수아랑 출퇴근을 같이 하는 게 어때?”
출퇴근은 이미 함께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하준이 눈을 키웠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혹시 김지수 때문이야?”
“그래. 소환 날짜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는데. 진성 쪽이나 지수 쪽이나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잖아.”
하긴. 그렇긴 하지. 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오늘은 김지수가 회사 앞으로 찾아왔더라고.”
“뭐? 누가 찾아와?”
하준의 눈동자가 크게 열리며 흔들렸다.
“수아랑 지수가 만나는 걸 본 직원이 있더라고. 나도 그 직원한테 듣고서야 알았어.”
김지수. 결국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하준의 눈썹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차라리 일이 해결될 때까지 너희 집에서 같이 지내는 건 어때? 우리 오피스텔이 방범 시스템은 완벽하잖아.”
“그건 수아 씨랑 상의해볼게. 출퇴근할 때랑 밖에서는 내가 잘 살필 테니까 사무실에서는 네가 잘 살펴봐 줘.”
“당연하지. 그건 걱정하지 마.”
“그래. 고맙다.”
하준의 인사에 지훈은 쿨하게 손을 흔들며 부회장실 사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