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낯설지 않은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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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낯설지 않은 목소리
2022.12.31.
드르륵.
책상 위에 올려둔 수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항상 기다리던 곳에 있을게요.]
야근이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함께 퇴근하였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6시에 하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네. 지금 나갈게요.]
[뛰지 말고 천천히 걸어와요.]
[알겠어요. 조금 이따가 봐요.]
메시지를 보낸 수아가 서둘러 퇴근 준비를 마친 뒤 다른 직원들을 향해 인사를 전했다.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서둘러요? 무슨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나 보네.”
“네. 빨리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내일 뵐게요.”
화사하게 웃으며 수아는 걸음을 서둘렀다.
하준이 항상 기다리던 곳이라 칭하는 곳은 아침에 수아를 내려주는 곳의 건너편 골목을 뜻했다.
인적 자체가 드물어 그의 차를 타고 내려도 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 장소.
차 안에서 골목 끝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던 걸까.
수아가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하준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하준 씨.”
달리듯 다가와 자신의 앞에 선 수아를 하준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천천히 오라니까. 그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안 넘어져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도 조심해요. 서두르다 보면 다칠 수 있어요.”
어쩐지 병원에 한 번 다녀온 이후로 어린아이 대하듯 잔소리가 점점 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서둘러 대답을 한 수아가 조수석에 앉자 하준은 문을 닫고 운전석에 앉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 퇴근이 늦어진 탓인지 밖으로 보이는 야경이 평소보다 더 밝게 빛났다.
창밖을 빤히 바라보던 수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 김지수가 찾아왔었어요.”
수아의 한마디에 하준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사소한 일 하나까지도 모두 이야기하겠다는 약속 지키고 있는 거예요.”
이미 지훈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말해주니 고마웠다.
“미리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요. 마음이 급해서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니에요. 이렇게라도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요.”
하준이 다정하게 웃었다.
“사실 지훈이한테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어요. 혹시나 이번에도 말 안 해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미 알고 있었구나. 이번에도 말 안 했으면 서운하게 생각했겠지. 미리 말하길 잘했다.
수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환장 발부되었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에 온 겁니까?”
“네. 맞아요. 고소를 취하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습니까?”
맘 약한 당신이라면 그 말에 흔들렸을 테지.
운전하던 하준이 슬쩍 곁눈질하며 물었다.
“아니요. 그럴 수는 없다고 엄청 단호하게 말했는데요?”
“호오. 단호하게 말입니까?”
“네. 아주 단호박을 썰었지 말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키우는 하준의 반응에 수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당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참.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하준이 조용히 운을 뗐다.
“이번 일이 해결되는 동안만이라도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는 건 어떻습니까.”
“네? 하준 씨 집에서요?”
“심부름센터까지 고용했던 김지수가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합니다. 수아 씨를 혼자 두기에 마음이 놓이질 않아요.”
“…….”
“증거는 확실하니까 조사만 끝나면 바로 구속될 거예요. 그때까지만이라도 수아 씨를 곁에서 지킬 수 있게 해줘요.”
부드러운 듯 단호한 하준의 어투에서 그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걱정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수아 씨도 그렇겠지만 창고에서 겪었던 그런 끔찍한 일을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요.”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하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날 병원에 누워 있던 수아 씨를 보면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심장이 조여 오는 것 같아요.”
아. 내가 이 사람에게 병원에 대한 또 다른 트라우마를 심어주었구나.
때마침 신호에 걸려 자동차가 멈추자 수아는 하준의 어깨에 고개를 기울였다.
“하준 씨를 병원에 가게 하는 일 이제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토닥토닥 마치 그의 심장을 위로하듯 하준의 가슴팍에 닿은 수아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꼭 그래 줘요. 다른 약속은 몰라도 그 약속만은 꼭 지켜줬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그럼 이참에 하준 씨도 약속하는 건 어때요? 저 병원에 갈 일 만들지 않겠다고. 걱정시키지 않겠다고.”
“저는 원래 병원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수아 씨 병원에 가게 하는 일 절대로 만들지 않아요.”
하준이 피식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하긴. 이 사람 다쳐도 집에서 치료받는 사람이었지.
“아니요. 제가 말하는 병원이라는 건 사전적 의미의 병원이 아니라 다치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는 거라고요.”
수아는 설마 그걸 모르는 거냐며 어깨에 기댔던 고개를 번쩍 들고 미간을 좁혔다.
“네. 네. 알겠습니다. 약속할게요.”
뭘 또 그렇게 흥분을 하는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작은 일에도 파르르 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자꾸만 장난을 치게 된다. 이거 문젠데.
하준은 고개를 잘게 저으며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다시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수아 씨도 저도 같이 약속하는 걸로 합시다. 이제부터라도 서로에게 마음 아픈 기억은 남겨주지 않기로.”
“좋아요. 아주 공평하네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아가 하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손을 타고 전해지자 하준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
고급스러운 바의 프라이빗 룸.
가운데에 앉은 진성을 중심으로 양옆에는 현성 그룹의 이승재 전무를 포함한 임원진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잔에 한가득 양주를 따르는 진성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번 브랜드 론칭 프로젝트가 무산되었다는 거 다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성은 손에 쥔 양주병을 거칠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가득 채워진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
앞에 앉은 임원진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마른 침만 꿀꺽 삼킬 뿐이었다.
한 명. 한 명. 천천히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진성의 불편한 시선이 마지막으로 이승재 전무의 얼굴에 꽂혔다.
“아마 해결 방안을 생각하시느라 그간 연락이 없으셨던 거라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맞습니까? 이승재 전무님?”
낮게 깔려 갈라진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이승재 전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람을 시켜 민하준 뒤를 캐고 있으나 아직 이렇다 할 정보를 얻지 못한 터라 그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 일단 민하준을 다시 설득해보면…….”
탁!
이승재 전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테이블 위로 서류 봉투 하나가 던져졌다.
“이게 뭡니까?”
“김하준. 아니 민하준인가? 뭐가 되었든 그 안에 현성 그룹 부회장에 대한 정보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그걸로 부회장을 설득을 하든 협박을 하든 프로젝트를 원상 복귀시키라는 뜻입니다.”
“아…….”
이승재 전무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아 참. 그리고 하나 더.”
진성이 술 한 잔을 더 들이켰다.
“며칠 전에 일어난 창고 사건 말입니다. 우리 딸이 의심을 받고 있는지 소환장이 날아왔더군요. 그것까지 깔끔한 처리 부탁드립니다.”
제 딸이 벌인 짓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진성은 그저 의심을 받고 있다는 말로 사건을 얼버무렸다.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그동안 임원진들께서 받으셨던 돈들 세상에 밝힐 수밖에 없습니다.”
“뭐, 뭐라고요?”
그동안 표정 없이 앉아만 있던 임원진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왜요? 저 혼자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진성의 비열한 속내가 그의 올라간 입술 끝에 올라앉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흠. 일단 서류를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서류 봉투를 집어 든 이승재 전무가 룸을 빠져나갔고 그 뒤로 임원진들이 빠르게 그를 따랐다.
“굳이 내 손까지 더럽힐 필요는 없지 않겠어.”
모두가 빠져나간 문을 응시하던 진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진성은 가득 따른 양주를 한 잔 더 들이켰다.
*
다음 날 아침.
“수아 씨. 아침이에요. 이제 일어나야죠.”
귓가에 맴도는 하준의 속삭임에 수아의 눈꺼풀이 살며시 들렸다.
가느다란 시야 사이로 자신을 품에 안은 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준이 보였다.
아. 나 어제부터 하준 씨 집에서 지내기로 했지.
당분간은 하준의 집에서 출퇴근하기로 하고, 어제 오피스텔에 들러 옷가지들과 약간의 짐을 챙겨온 수아였다.
“음…….”
아직 떨쳐내지 못한 잠기운에 몸만 잘게 뒤척이던 수아의 이마 위로 하준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감촉에 놀란 수아의 눈꺼풀이 조금 더 벌어졌다.
“시간이 지나면 더 내려갈 텐데.”
말을 마친 하준의 입술이 수아의 코끝에 닿았다.
“그다음은…….”
“지, 지금 일어났어요!”
이마, 코, 그다음이 어디인지를 예감한 수아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의 입술이 수아의 입술에 닿았다.
“여자들은 애인의 예상 밖 행동을 더 좋아한다길래.”
하준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저런 건 또 어떤 검색창에서 배워온 건지. 하여간 못 말려.
수아는 고개를 잘게 저으며 침대를 벗어났다.
바쁘게 출근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들어서자 주방에 있던 하준과 눈이 마주쳤다.
“어서 와서 앉아요.”
한 손에는 프라이팬을 또 한 손에는 조리도구를 든 하준이 수아를 반겼다.
“우와. 앞치마가 너무 잘 어울리네요.”
자신이 쓰려고 구입해둔 앞치마를 입고 있는 그의 모습에 수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수아 씨의 몸이 작다는 걸 이 앞치마를 입으면서 새삼 느꼈습니다.”
당신에게는 넉넉하던 앞치마가 이렇게 딱 맞는 것 좀 보라며 하준이 두 팔을 벌린 채로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아무래도 하준 씨 앞치마도 하나 장만해두는 게 좋겠네요.”
현성 그룹 부회장님의 앞치마 입은 모습이라니. 그것도 분홍색 귀염 뽀짝 앞치마.
수아는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놓을까 고민하며 식탁으로 다가가 앉았다.
“요리에는 자신이 없어서 간단하게 만들었어요.”
하준이 접시에 스크램블드에그를 담아 수아에게 내밀었다.
“엄청 맛있어 보이네요. 잘 먹겠습니다.”
그의 정성이 담겨 있는 음식을 단숨에 해치운 뒤, 두 사람은 출근을 위해 함께 집을 나섰다.
다른 날과 다를 바 없이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하준의 차가 멈춰 섰다.
“그냥 회사까지 같이 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회사까지 수아를 혼자 걷게 한다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렇게 먼 곳도 아닌데요. 이따 회사에서 볼 수 있으면 봐요.”
수아는 쿨하게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도착한 회사 앞.
“수아야.”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수아의 걸음이 붙잡혔다.
어쩐지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데. 설마 아니겠지.
수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이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존재임을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