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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비참한 최후 (80/105)


80. 비참한 최후
2023.01.03.



 


“수아야.”

시선 끝에 있는 한 남자의 모습에 수아의 동공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민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수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수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말도 뱉어내지 못한 채 그저 시선만 보내고 있는 수아를 향해 민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

“시간 길게 빼앗지 않을게. 10분만. 아니 5분이라도 좋아. 잠깐 시간 좀 내줘. 부탁이야.”

“할 얘기가 뭔데?”

“여기에서는 좀 그렇고. 여기 바로 옆에 공원 있던데. 거기서 잠깐만 얘기하자.”

“그럴 시간까지는 없어.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없는 얘기라면 이따 퇴근 후에 얘기하던지.”

“그래? 그럼 이따가 6시에 다시 올게. 저기 카페에서 보자.”

민철이 회사 건너편에 있는 카페를 가리켰다.


“그래. 알겠어.”

짧은 대답과 함께 수아는 빠르게 몸을 돌려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들어와 넋 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수아가 갑자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하준 씨.]

[네. 수아 씨.]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답문이 날아왔다.


[저 이따가 퇴근 후에 누굴 좀 만나야 할 것 같은데. 미리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사소한 일이라도 모두 이야기하겠다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보낸 메시지였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누구냐고?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민철이라고. 전 남자친구였던 사람인데요.]

고민하던 수아는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 그에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Rrrr.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하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아는 액정에 뜬 하준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빈 회의실로 향했다.


“네 하준…….”

[누구를 만난다고요?]

휴대폰 너머로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그게…….”

메시지로는 전 남자친구라는 말이 쉽게 나왔었는데, 막상 음성으로 하려니 쉽지가 않았다.


[만나서 애기합시다.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내려온다니? 어딜 내려오겠다는 거야?


“아니요! 제가 올라가요. 하준 씨는 그냥 거기 있어요.”

수아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부회장실로 향했다.

부회장실 앞에 도착하니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박 비서가 웃으며 눈짓했다.


“들어가 보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수아도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부회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를 만난다고요?”

수아가 들어서자마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준이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흥분하지 말고, 앉아서 얘기해요.”

수아가 하준의 손을 잡고 소파로 이끌었다.


“성민철이라고 대학교 때 사귀었던 남자친구예요.”

그래. 성민철. 수아의 옛 연인.

기억력 좋은 하준이 그 이름을 잊을 리 없었다.


“그 사람을 왜 만납니까?”

“오늘 아침에 회사 앞으로 찾아와서는 할 얘기가 있으니까 시간 좀 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퇴근 후에 잠깐 만나기로 했어요.”

어쩐지. 오늘은 지하주차장까지 태워주고 싶더라니.

하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꼭 만나야 하는 겁니까? 제가 싫다고 해도?”

“만약 하준 씨가 싫다고 하면 만나지 않을게요. 그런데 저는 허락해 줬으면 좋겠어요.”

“왜요? 꼭 만나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몰려드는 위기감에 하준의 목소리가 자꾸만 높아졌다.


“혹시나 살다가 한 번쯤 우연히 마주친다면 꼭 얼굴을 보고 마무리 짓고 싶었거든요.”

애써 태연한 척 수아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문자로만 통보했던 일방적 이별이라 마음속에 찝찝함이 항상 남아 있는 것 같았어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털어버리고 싶어요.”

그녀의 얼굴에 어떤 결심이 드러났다.


“그렇게 얘기하면 말릴 수가 없잖습니까.”

하준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혹시 제가 흔들릴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

“맞구나? 걱정되는구나?”

수아가 하준을 향해 얼굴을 내밀자 그는 표정을 숨기려는 듯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에서 만나는데요? 같이 저녁 먹기로 한 겁니까?”

“아니요? 저녁은 무슨. 6시에 맞은편 카페에서 잠깐 만나기로 했어요. 딱 10분이면 돼요.”

10분이라.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해 트라우마 속에 갇힌 채 살아가는 수아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10분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저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빨리 와야 합니다.”

하준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맘이 들었지만 수아를 믿고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네. 조그마한 찝찝함이나 미련까지도 다 털어버리고 하준 씨한테로 달려올게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얘기해 줘서 고맙습니다.”

“우리 비밀 없이 다 이야기하기로 했잖아요.”

수아는 걱정하지 말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



“하아.”

수아는 깊은숨을 내쉰 뒤 카페로 들어가 민철을 찾았다.


“여기야. 여기.”

먼저 도착해 있던 민철이 수아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너 아메리카노 좋아하잖아. 내가 미리 시켜놨어.”

“응. 고마워.”

민철이 준비해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던 수아의 눈썹이 순간 움찔거렸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아침에 민철을 처음 마주했을 때만 해도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었다.

그런데 지금 고작 몇 시간이 흘렀다고 심장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멀쩡히 제 속도에 맞춰 뛰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우리는 서로가 아니면 못 살겠다며 절절한 사랑을 나눴었고,

그토록 사랑했던 그의 배신에 처절하리만큼 고통스러웠으며,

그의 어머니가 드러낸 잔인함에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을 자책했었다.

사랑. 배신. 잔인함. 그리고 자책.

온갖 상념들이 만들어낸 트라우마로 인해 그동안 그렇게도 아팠었는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다고?

심장이 무뎌진 걸까. 감정이 무뎌진 걸까.

수아가 감정의 혼란스러움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때 민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내나 보네. 많이 예뻐졌다.”

“응. 잘 지내. 그 말 하려고 찾아온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말을 망설이며 입술만 뻐끔거리는 그의 모습에 수아는 미간을 좁혔다.


“내가 현성에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너 설마 김지수 때문에 온 거야?”

정곡을 찔린 걸까. 민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사실 민철도 이미 오래전에 헤어진 수아를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민철이 진성 그룹과 협업으로 진행한 게임이 출시를 앞두고 있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할 이 시기에 소환장 발부라니.

진성 그룹 오너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알려진다면, 게임은 출시도 못 해보고 엎어질 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많은 자금과 인력이 들어간 프로젝트였기에 수아를 설득해달라는 지수의 부탁을 민철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한테 찾아와서는 서럽게 울더라. 너를 다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네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오해?”

“그래. 오해. 지수 걔가 그렇게 나쁜 애가 아니라는 거 수아 너도 잘 알잖아.”

“너는 김지수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정확히 알고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

지수를 두둔하려는 민철의 말투가 거슬려 나오는 목소리가 자연히 뾰족해졌다.


“창고에서 둘이 말다툼하다가 살짝 밀쳤는데 네가 넘어지는 바람에 다쳤다고.”

“하.”

어처구니가 없어 수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수아야.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는 거잖아.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 주는 건 어때?”

“성민철. 너 정말 사람 할 말 없게 만든다.”

“응? 뭐라고?”

“김지수 때문에 나를 배신해놓고, 몇 년 만에 찾아와서 한다는 얘기가 걜 용서해달라고?”

“…….”

“나는 그동안 네 어머니 말만 듣고 독단적으로 헤어지자고 말했던 나를 조금은 원망하면서 살았었는데.”

씁쓸한 덩어리가 목구멍에 걸린 듯 내쉬는 숨이 무거웠다.


“그 일에 대한 일말의 원망이나 후회조차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려고 찾아온 거구나?”

이런 놈 때문에 내가 그동안 그렇게 힘들어했었다니.

수아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과거의 일은 모두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지나간 일은 잊고 지수 한 번만 용서해 줘. 넌 착하잖아. 응? 수아야.”

착하잖아? 수아의 눈동자가 시릴 만큼 차갑게 변했다.


“그 말 하려고 찾아온 거면 그만 돌아가.”

“수아야.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어제도 얘기했지만 그 고소 건은 현성 그룹 법무팀에서 진행된 사건이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그럼 누가 해결할 수 있는 건데?”

“그건…….”

“접니다.”

순간 고막을 뚫고 들려온 낮게 깔린 중저음의 목소리에 수아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하, 하준 씨.”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건지 하준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수아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현성 그룹 부회장 민하준?”

한눈에 그를 알아본 민철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그룹인 현성 그룹의 부회장 민하준.

민철도 성한 그룹의 후계자 자격으로 여러 모임이나 파티 등에 참석하면서 알게 된 인물이었다.

회장을 대신해 그룹의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며, 현성 그룹의 실질적인 회장이라는 말이 돌고 있는 사람.

그런 대단한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놀라움에 벌어진 민철의 입이 채 닫히기도 전에 하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제가 그 민하준 맞습니다.”

“아. 저는 성민철이라고 합니다.”

악수를 청하려 민철이 손을 내밀었지만 하준은 응하지 않은 채로 소파에 몸을 기대며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민철은 머쓱해진 손을 재빨리 거뒀다.


“성민철 씨. 듣자 하니 김지수 씨의 일을 없던 일로 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듯한데. 맞습니까?”

“네? 아니. 그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정곡을 찔러오자 민철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시간 낭비하는 건 딱 질색입니다. 간단히 한 번만 말할 테니 똑바로 들으십시오.”

시릴 만큼 차가운 표정과 소름 끼치도록 가라앉은 음성.

민철과 더불어 바라보고 있던 수아도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 뒤에 숨어서 늘어놓는 거짓 변명 따위는 들을 생각도 들을 시간도 없습니다.”

“…….”

“굳이 해야겠다면 우리 그룹에서는 소송 건에 대해 취하할 생각이 없으니, 검찰에 가서 하라고 전해주십시오.”

“…….”

“제 말 알아들었습니까?”

멍하니 초점 없는 눈빛으로 앉아 있는 민철을 향해 물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큰일이다. 그의 표정을 보니 자신이 미움을 산 게 분명했다.


“그럼 수, 수아야. 나 먼저 가볼게. 다음에 다시…….”

현성 그룹에 어떻게든 잘 보여야 한다던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민철이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하려는데.


“그리고!”

하준이 민철의 말허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다시는 이수아 씨에게 연락하거나 찾아오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겁니다. 성. 민. 철 씨.”

이름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말하는 하준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성민철. 네 이름 내가 기억하고 있어. 조심해.

그가 보낸 무언의 압박이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뭐라 대답도 하기 전. 이미 민철은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내 옛 연인의 마지막은 참 비겁하고 비루하네.’

하아. 수아는 도망가듯 떠나가는 민철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 할 말이 있어서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겁니까?”

순간 들려온 하준의 목소리에 수아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회사에서 기다린다고 하더니 언제 온 거예요?”

“이럴 줄 알고 온 겁니다. 우리가 고소를 취하해 줄 거란 기대감의 싹을 확 잘라버리려고.”

“그러게요. 정말 확 잘린 것 같긴 하네요.”

수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음소리를 냈다.


“이제 다 털어버렸습니까?”

“네?”

“조금의 찝찝함이나 미련까지도 다 털어버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들 다 털어버렸냐고요.”

“아. 그거요? 그럼요. 다 털어버렸지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쉰 하준이 수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사실은 걱정했습니다. 그래도 전에 사랑했던 사이였으니까, 막상 보면 흔들릴 것 같아서.”

“제 사랑이 하준 씨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나 보네요.”

수아가 하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이제 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하준 씨뿐이에요. 그러니까 불안해할 필요 없어요.”

귓가로 흘러드는 달콤한 목소리에 하준의 입술 끝이 밀려 올라가며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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