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쏟아진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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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쏟아진 물
2023.01.07.
자동차 운전석에 앉은 민철은 미간을 좁힌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설마 수아가 민하준이랑…….”
조금 전.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던 민철은 힐끗 고개를 돌려 카페를 바라봤었다.
수아에게 머리를 기댄 채 부드럽게 미소 짓던 하준의 모습.
카페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는 연인 사이였다.
상상이나 했을까. 이수아와 민하준의 연애라니.
믿기지 않는 현실에 당황하는 사이 조수석에 던져놓았던 민철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김지수였다. 민철은 재빨리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너 수아가 현성 그룹 부회장이랑 사귀고 있는 거 알고 있었어?”
민철은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녀의 대답 하나에 의심은 사실이 되었다.
“넌 그런 일을 알고 있었으면 나한테 진작 말을 했어야지.”
[내가 왜? 둘이 사귀는 게 오빠랑 무슨 상관인데?]
“뭐?”
[그게 오빠랑 무슨 상관이냐고. 설마 이번 기회에 이수아랑 다시 잘해볼 마음이라도 있었던 거야?]
들려오는 지수의 음성에서 비아냥거림이 묻어났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 다시 잘해볼 마음 같은 거 조금도 없다고.”
[그럼 상관없는 거잖아. 왜 그걸 미리 말했어야 하는 건데?]
대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생각해 봐. 어쨌든 이번 일은 수아를 밀친 네 잘못이잖아.”
하아. 민철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나는 네 잘못이 분명한 일을 없었던 일로 해달라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러 간 거고.”
말을 할수록 오늘 일에 대한 후회감이 밀려왔다.
“네가 민하준이라면 피해자인 자기 여자 친구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 내가 곱게 보이겠어?”
다시는 수아 앞에 나타나지 말라던 하준의 서슬 퍼런 눈빛이 떠오르자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현성과 진성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면 나는 당연히 현성이야.”
[뭐라고? 지금 그 말은 우리 진성을 배신이라도 하겠다는 뜻이야?]
“배신? 기업 간 거래에 의리를 기대하지 마. 기업은 의리가 아니라 이익을 따르는 법이니까.”
[…….]
“나는 이번 게임 출시에 차질이 생긴다고 해도 현성에 밉보이는 짓은 하지 않을 거니까 다시는 그런 부탁하지 마.”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는 듯 민철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너도 회사를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수아한테 사과하고 끝내. 괜히 일 크게 만들어서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사과를 해야 해? 내가 그 계집애한테 왜 사과를 해야 하냐고!]
왜 다들 이수아 편을 못 들어서 안달인 거야. 도대체 왜!
고막을 찢을 듯, 악에 받친 지수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김지수 네가 내 충고를 들을 리 없지.
“나는 분명히 말했다. 나중에 후회할 행동하지 말라고.”
민철은 못다 한 말들을 삼키며 전화를 끊었다.
*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습니까?”
하준이 TV를 보고 있는 수아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연예인들이 캠핑가서 게임하는 프로그램인데 엄청 재미있어요.”
수아는 시선을 TV 화면에 고정한 채로 답했다.
아. 그렇구나. 하다가 피식피식 웃는 수아의 모습에 하준의 시선도 TV 화면을 향했다.
흠. 어느 부분이 재미있는 거지?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하는 거야.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때.
“어머. 우리 바다 오빠 너무 귀엽다.”
응? 느닷없이 들려온 호칭에 하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오빠라고 했습니까?”
오빠라면. 20년 전에 들어본 뒤로 단 한 번도 수아에게서 들어보지 못했던 호칭 아니던가.
하준은 서둘러 화면 속 남자를 살폈다.
“얼핏 보기에도 엄청 어려 보이는데. 오빠가 확실합니까?”
“어머. 하준 씨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나이 상관없이 잘생겼으면 무조건 오빠라고 하는 거예요.”
해사하게 웃으며 오빠의 정의에 대해 설명하는 수아의 모습에 하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가 바다 오빠 데뷔 초부터 팬이었거든요. 오빠가 참여한 뮤지컬 공연도 빠짐없이 관람했었다고요.”
제 애인의 인내심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눈치 없는 수아의 입꼬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다고 하더니. 수아 씨 심장은 두 개인가 봅니다.”
가시라도 박힌 듯 그의 입에서 뾰족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직접 만나지도 못하는 연예인이 뭐가 그렇게 좋습니까.”
기죽으라고 한 소리에 이상하게도 수아의 표정은 좀 더 밝아진 듯 보였다.
“만날 방법이 있죠. 실은 이미 조만간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녀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만납니까?”
전 남자친구를 만나게 한 것도 얼마나 불안했는데, 이제는 연예인까지?
하준이 눈을 키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진짜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덩치에 안 맞게 질투하는 모습이 왜 저리도 귀여운 건지.
마음 같아서는 매일매일 질투하게 만들고 싶을 정도였다.
수아는 삐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이번 현성 의류 신제품 광고모델이 바다 오빠로 결정 났잖아요. 계약도 이미 마친 걸로 아는데.”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지훈이 가져온 결재서류에서 그 이름을 본 것 같다.
수아가 그 사람의 팬인 줄 알았다면 결재서류에 사인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텐데.
“팀장님이 조만간 광고 촬영 진행한다고 하셨으니까 촬영장 가면 직접 만날 수 있겠죠.”
“수아 씨도 거기 가려고요?”
“어디요? 광고 촬영 현장이요?”
하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하죠. 광고 형식이랑 내용. 그리고 광고모델 선정까지. 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요.”
“그중 가장 많은 손길이 닿은 곳은 광고모델 선정이겠고요.”
어째 말투가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 있는 것 같은데.
“어머. 정곡을 찔려버렸네요.”
수아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심장 부근을 움켜쥐며 몸을 웅크리자 하준은 급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웬 전화? 수아는 눈을 깜빡이며 물끄러미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민지훈. 지난번에 내가 사인한 의류 광고모델 말이야.”
응? 설마 그거 아니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수아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다인지 바닷물인지 하는 그 연예인. 계약 해지를…….”
“자, 잠깐!”
말을 끝맺지 못한 상태에서 수아에게 휴대폰을 빼앗겼다.
“팀장님. 지금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세요. 끊을게요.”
서둘러 통화를 끝낸 수아는 그의 휴대폰을 등 뒤로 숨겼다.
“계약 해지라뇨.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이건 엄연한 권력 남용이라고요.”
수아가 눈에 힘을 바짝 주고는 언성을 높였다.
“설마 지금 제 앞에서 그 사람을 감싸는 겁니까?”
이 정도로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이 있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내 앞에서 그놈을 감싼다고?
벌어진 상황이 어이가 없어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감싸는 게 아니라.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이미 진행된 계약을 깨는 건 안 될 일이죠.”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일단 바다 오빠의 계약 해지만은 막아야 했다.
“이유가 없긴 왜 없습니까. 해지를 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필요 이상으로 하준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 바닷물한테 꼭 말해줄 겁니다. 이 계약을 해지하는 이유가 당신의 팬인 이수아라는 여자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가 훗날 당신과 만나게 되더라도 스스로 피할 수 있도록.
말끝에 제 계획이 완벽하다 느껴졌는지 그의 한쪽 입꼬리가 스르륵 밀려 올라갔다.
“에이. 설마 진심은 아니죠? 하준 씨 원래 이렇게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사람 아니잖아요.”
“사소한 일이라뇨. 수아 씨가 저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받아치는 그의 표정이 심각할 정도로 진지했다.
이 남자 정말 진심이구나.
“하준 씨보다 바다 오빠를. 아니 강바다 씨를 더 좋아한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요.”
쏟아진 물을 주워 담기 위한 수아의 눈물겨운 노력이 시작되었다.
“여기. 지금 제 눈앞에 있잖습니까. 다른 남자를 향한 하트 가득한 수아 씨의 눈동자가.”
“강바다 씨는 그저 연예인일 뿐이에요. 직접 만나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냥 연예인.”
“조만간 만날 거라면서요. 눈까지 반짝거리면서 말했잖습니까. 저는 눈에 조명이라도 켜진 줄 알았습니다.”
쉽지 않네. 이 남자 원래 이렇게 뒤끝이 길었던가.
“그냥 장난으로 해본 소리였어요. 저는 원래 강바다 씨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바다 오빠 미안해요. 오빠의 계약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만남을 위해 어쩔 수가 없어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강바다 씨보다 몇십 배. 아니 몇백 배는 더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친구가 바로 옆에 있는데.”
수아가 하준의 볼을 감싸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하준 씨보다 그 사람을 더 좋아할 리 없잖아요.”
싱긋 웃고는 쪽. 하준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하준 씨뿐이라고요. 설마 제 사랑을 의심하는 건 아니죠?”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죠.”
나 아직 삐진 거 안 풀렸어. 하준은 들썩이는 입술을 애써 내리눌렀다.
“수아 씨가 바닷물을 바라보는 눈빛을 좀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습니다.”
보던 것을 계속 보라며 하준이 턱짓으로 TV를 가리켰다.
바닷물 아니고 바다입니다. 그 말을 하려다 꾹 참고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수아가 고개를 돌렸다.
‘침착하자. 웃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그냥 잘생긴 돌덩이라고 생각하자. 이수아 넌 할 수 있어.’
수아는 눈물을 머금으며 애써 바다 오빠를 외면했다.
*
“여기가 확실한 거야?”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낡은 집 앞에서 승재의 자동차가 멈춰 섰다.
“네. 이름과 얼굴 확인까지 마쳤습니다.”
“지금은 집에 있는 건가?”
“아니요.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언제쯤 들어오는데?”
승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목길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어! 저 사람입니다.”
비서의 말에 승재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저 남자가 김현철이라는 거지? 민하준 친부.”
“네. 맞습니다.”
“가서 데리고 와.”
“네.”
대답과 함께 운전석에서 내린 비서는 현철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비틀거리며 걷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김현철 씨 되십니까?”
응? 김현철? 나 말하는 거야? 술에 취해서도 자신의 이름은 명확하게 들렸는지 바닥을 향하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김현철 맞는데. 누군데 나를 찾아?”
비틀비틀.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한 채로 현철은 느릿한 음성을 뱉어냈다.
“저희 전무님께서 잠깐 보자고 하십니다.”
“전무? 무슨 전무? 나는 그런 사람 모르는데?”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인지 아닌지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지가 뭔데 나를 오라 가라야. 할 말 있으면 직접 와서 하라고 해!”
“시간만큼 돈으로 보상하죠.”
당신 돈 좋아하잖아. 그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돈?”
역시나. 단어 하나에 현철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쪽입니다.”
그가 따라나설 거라는 확신이 섰는지 비서는 뒤를 돌아 자동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 잠깐. 같이 가야지.”
현철은 여전히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비서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