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 다시는 꺼내지 못할 이름 (82/105)


82. 다시는 꺼내지 못할 이름
2023.01.10.



 
이 사람이 전무라는 사람인가?

차에 올라탄 현철은 빠르게 시선을 움직이며 옆자리의 승재를 살폈다.

얼핏 보아도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부류의 사람.

이런 사람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요?”

무거운 정적을 가르며 물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또다시 정적이 흐르고. 현철은 같은 말을 두 번 묻지는 못한 채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돈 준다는 말에 따라오긴 했는데. 괜히 온 건가?’

현철은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조금씩 후회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현철을 태운 차는 고급스러운 건물 앞에 도착했다.

비서와 수행기사는 동시에 내려 승재와 현철이 내릴 수 있도록 자동차 문을 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들어서는 순간 현철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와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술집이라는 것을.

옷차림이나 행색 때문에 입장을 거절당할 것이라는 현철의 예상과는 달리 직원들은 허리를 숙이며 그에게 인사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승재와 현철은 복도 안쪽에 있는 룸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은 현철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사이 승재는 주문을 마쳤다.

직원이 나가고.


“대체 나한테 할 말이 뭔데 여기까지 끌고 온 거요?”

“이런 술집에 매일같이 오고 싶지 않습니까?”

물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 날아왔다.


“김현철 당신 인생을 한 방에 역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하는데 혹시 관심이 있으려나.”

신종 사기인가?

현철은 미간을 좁히며 의심의 눈초리로 승재를 바라봤다.

승재의 말이 이어졌다.


“대체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

“뭐요?”

구질구질이라는 말에 현철이 인상을 구겼다.


“아니. 돈 많은 아들 뒀다가 뭐에 쓰려고.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게 아들 아닌가?”

돈 많은 아들?


“사람을 착각했나 본데. 나한텐 돈 많은 아들 같은 거 없어.”

김샜다는 표정으로 현철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때.


“김하준.”

뭐? 들려온 익숙한 이름에 현철이 고개를 획 돌렸다.


“당신 아들 맞지?”

“…….”

지난 20년 동안 잊고 살던 이름. 김하준.

잊은 줄 알았던 이름 하나에 취기는 단번에 사라졌다.


“당신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당신 대체 누구야?”

현철이 버럭 언성을 높이던 그때. 때맞춰 주문했던 술과 안주들이 들어왔다.


“흥분하지 말고 앉지.”

승재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앞에 놓인 양주잔을 채웠다.


“어디 가서 쉽게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닐 테니 말이야.”

하긴. 기껏해야 소주나 막걸리가 전부인 사람에게 양주라니.

이런 술 앞에서는 생각이 많은 게 오히려 독이지. 자존심 따위는 멀리 던져버린 채 현철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머지 이야기는 술맛을 본 뒤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의 행동을 예상했다는 듯 승재는 현철에게 잔 하나를 내밀었다.

승재와 현철은 잔에 든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크. 역시 고급 양주라서 그런지 목 넘김부터가 다르네.

현철이 들썩거리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며 잔을 내려놓자 승재는 그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굳이 내가 누군지는 알려고 하지 말고, 돈 많은 아들한테 괜찮은 건물 하나 사달라고 해보지 그래.”

“아까부터 자꾸 돈 많은 아들이라고 하는데, 나한테는 그런 아들이 없다니까.”

“이걸 보면 이해가 좀 되려나.”

승재가 현철을 향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현성 그룹 부회장 민하준 국내 자산 순위 2위에 올랐다. 1위는 현성 그룹 회장 민현성.]

인터넷 뉴스의 한 페이지가 인쇄된 종이였다.

실린 사진을 보니 20년 전 제 아들과 닮은 듯 보였으나 문제는 그의 이름이었다.


“이거 봐. 내 아들은 김하준이라고. 민하준이 아니라.”

“그래. 김하준이었지. 20년 전 민현성 회장이 입양하기 전까지는.”

민현성이라면 하준이의 골수를 사 갔던 그 재벌 집 남자?

그로부터 워낙 큰돈을 받아 챙겼으니 그 이름이 쉽게 잊힐 리 없었다.


“아들이 국내 자산 순위 2위라는데 설마 아버지 건물 한 채 못 사주려고.”

“…….”

“이제 아들 덕에 이런 술집에서 돈 걱정 없이 마시고 싶은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게 되겠지. 안 그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현철은 믿을 수가 없어 그가 내민 종이 속 하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여기. 당신 아들이 살고 있는 집 주소.”

현철은 넋 나간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하루빨리 이런 구질구질한 인생 청산해야지.”

“그러니까 김하준이 민하준이라고…….”

현철은 중얼거리며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승재와의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들이 국내 자산 순위 2위라는데 설마 아버지 건물한 채 못 사주려고.]


[하루빨리 이런 구질구질한 인생 청산해야지.]

빛 한줄기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던 현철의 귓가에 승재의 음성이 맴돌았다.

그리고 종이를 말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다음 날.

점심 식사 후 옥상정원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수아에게 지훈이 다가왔다.


“어제 그 전화는 대체 뭐였어?”

지훈은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이듯 물었다.


“아. 그거요?”

이제 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수아가 피식 웃었다.


“제가 이번 신제품 광고모델 강바다 씨 팬이라고 했더니 갑자기 계약을 해지한다면서 전화를 걸더라고요.”

“그냥 팬이라고만 했는데 계약을 해지한다고 했다고?”

“아니. 그건 아니고.”

눈알을 굴리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바다 오빠 너무 귀엽다고.”

“그리고?”

“……그리고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해요.”

“좋아한다고?”

지훈이 눈을 크게 뜨며 버럭 소리를 높였다.


“쉿! 조용히 해요.”

누가 들을까 수아는 황급히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 쉿 소리를 냈다.


“알아요. 제가 말실수했다는 거.”

빤히 바라보는 지훈의 표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 고개가 저절로 숙어졌다.


“너도 참 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하준 앞에서 그런 농담이 나오냐?”

“농담은 아닌데. 하준 씨를 향한 마음과는 또 다른 의미로 바다 오빠를 좋아하는 거라고요.”

헐. 뜻밖의 발언에 할 말을 잃은 듯 지훈의 입이 벌어졌다.


“너 설마 그 말도 하준이한테 한 건 아니지?”

“당연하죠. 저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다고요.”

“그 정도 눈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지.”

이 씨.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이어지는 타박에 수아는 눈을 흘기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나저나 그때 이후로 김지수한테 연락 온 건 없어?”

매서운 수아의 눈빛에 지훈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네. 없어요.”

김지수의 부탁을 받고 찾아온 어떤 인간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하준 씨가 처리했지요.


“바쁘실 텐데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런 인사는 나 말고 하준이한테나 해줘.”

그녀의 인사가 쑥스러웠는지 지훈은 작게 손을 내저었다.


“사실 브랜드 론칭 때문에 바빠 보이던데 도움은 못 될망정 자꾸 방해만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좀 그렇긴 해요.”

사건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사건이 터지고. 그걸 해결하면 또 다른 사건이 터지고.

잠잠할 날 없이 자꾸만 터지는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늘 하준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건 네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내가 뭘 모른다는 거지? 수아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 가족들은 오히려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는걸.”

“저한테요? 왜요?”

“민하준 인생에서 요즘같이 의욕적일 때가 없었거든.”

지훈이 입술을 길게 늘였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머릿속에 일밖에 없던 녀석이라 사람이라기보단 기계에 가까웠지. 일하는 기계.”

문득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과거 하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최 감정이란 게 없어 보였으니까.”

지훈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즘 하준이를 보면 뭐랄까. 생기가 느껴져.”

이제야 제게 주어진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수아 네가 그 녀석이 진짜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고 있는 거야. 그래서 항상 고맙고.”

“그렇지만 저는 특별히 뭘 해준 게 없는걸요.”

“하준이한테는 네 존재 자체가 특별한 거야. 그래서 네 옆에 있는 지금 행복할 거고.”

“…….”

“그러니까 뭔가를 더 해주려고 하지 말고, 미안해하지도 말고, 그냥 그 녀석 옆에만 있어 줘. 그거면 충분해.”

평소와는 다른 나직한 목소리에 지훈의 진심이 느껴졌다.


“네. 그럴게요. 꼭 그럴 거예요.”

그의 말이 위로가 된 걸까. 수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함께 퇴근길에 오른 하준과 수아는 오피스텔 주차장에 주차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하준 씨. 오늘 저녁으로 짜장 볶음면 어때요?”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던 수아가 하준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요. 강바다 씨가 짜장 볶음면 광고라도 찍었습니까?”

바다 오빠 얘기는 어제로 끝난 거 아니었어? 그 얘기가 왜 또 나오는 건데.

시선을 내리며 묻는 그의 질문에 수아는 걸음을 멈추고는 눈을 치떴다.


“자꾸 이럴 거예요? 바다 오. 아니 강바다 씨가 무슨 사골국물도 아니고 도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건데요.”

“우리고 우려서 모두 녹아 없어질 때까지.”

헐. 그의 대답에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화내기보다 어린아이 달래듯 부드럽게 살살 구슬려야지.


“그러지 말고 이제 그 이름은 기억에서 지워버려요.”

인위적인 눈웃음과 함께 수아의 검지가 하준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지워진다. 지워진다. 강바다라는 이름은 이제 기억 속에서 지워진다.”

최면을 걸겠다는 듯 수아는 손가락으로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아. 정말.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고 있자니 더는 삐져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해요.”

수아의 손을 붙잡아 내린 하준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올라갔다.


“왜요? 기억에서 지워진 것 같아요?”

“아니요. 전혀요.”

그가 단번에 희망을 잘라낸 탓에 수아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처지려던 순간.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수아 씨의 노력을 봐서 지워진 척은 해보겠습니다.”

“어머. 제 노력을 가상히 여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평소처럼 사랑스러운 미소가 그녀의 입술 가득 피어났다.


“앞으로 좋아한다. 사랑한다. 이런 말들은 저한테만 쓰는 겁니다. 알겠죠?”

“네. 그럼요. 당연하죠.”

이번 일로 얻은 큰 깨달음이 뭔데. 설마 그걸 모를 리가.


“자. 그럼 이제 올라가서 짜장 볶음면을 먹어볼까요?”

하준이 수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좋아요. 완전 맛있게 만들어줄게요.”

“그런데 그거 진짜 강바다가 광고하는 거 아닙니까?”

“아! 정말!”

두 사람은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잡은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르던 그때. 갑자기 하준의 걸음이 멈췄다.


“왜요? 뭐가 있어요?”

하준을 따라 걸음을 멈춘 수아가 그의 시선을 좇았다.

까슬한 턱수염에 낡은 점퍼. 그리고 먼지 가득 쌓인 신발.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엔 허름한 차림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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