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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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과거
2023.01.14.
하준의 시선이 향해 있는 남자. 그는 하준의 친아버지 현철이었다.
“혹시 하준 씨가 아는 사람이에요?”
수아의 시선이 하준과 현철의 얼굴 위에 한 번씩 머물렀다.
“하준 씨. 왜 그래요?”
창백한 얼굴과 불규칙한 호흡. 그리고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하게 떨리는 그의 몸.
올려다본 그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하준과 현철 사이를 흐르던 그때.
주차장 끝에 서 있던 현철이 한 걸음을 내디뎠고, 동시에 하준은 한 걸음을 물러났다.
“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수아의 입은 달싹이기만 할 뿐 그 어떤 음성도 뱉어내지 못했다.
“수, 수아 씨 빨리 가요.”
마침내 정적을 가른 것은 하준의 목소리였다.
한동안 말없이 온몸을 떨던 하준은 황급히 뒤를 돌며 수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땅으로 꺼질 듯 무거운 걸음을 몇 번이나 옮겼을까.
“김하준.”
현철의 입에서 나온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이름 하나가 하준의 발목을 붙잡았다.
“자, 잘못 보셨습니다.”
숨겨지지 않는 떨림이 그의 목소리에 묻어났다.
“김하준! 아니. 이제 민하준인가? 설마 성이 바뀌었다고 네가 내 아들인 것까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비아냥거리는 현철의 목소리가 고요한 주차장을 울렸다.
아들이라니. 그럼 저 사람이 바로 하준 씨를 버리고 도망갔다던 친아버지?
수아는 충격으로 벌어진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현철을 바라봤다.
마치 과거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의 얼굴은 신기할 정도로 태연했다.
자신이 버린 아들을 20년 만에 찾아온 아버지가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들이 그의 얼굴에는 담겨 있지 않았다.
“아빠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할 얘기가 많지 않겠어?”
“저는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습니다.”
하준은 차마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로 말했다.
“건방진 자식. 이제 현성 그룹 부회장이 되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보지?”
하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현철의 얼굴이 사납게 돌변했다.
“네가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 현성 그룹 부회장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현철은 거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누구 덕분에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대답을 원한 질문이 아니었는지 현철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 너는 민현성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아니야.”
현철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바로 나. 김현철 덕분이라고.”
누구라고? 그 어린아이를 병원에 버리고 간 자기 덕분이라고?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어처구니없는 현철의 발언에 수아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양심과 염치라는 것이 사라진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날 내가 너를 병원에 두고 오지 않았으면 네까짓 게 감히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어?”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는 날카로운 말들이 자신의 가슴에 날아와 박히는데도 하준은 신음소리 한 번을 내지 못했다.
“이봐요! 갑자기 나타나서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치밀어 오른 화를 주체하지 못한 수아가 눈을 부라리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언성을 높였다.
“하. 이건 또 뭐야?”
현철의 말이 향하고 있는 것이 수아라는 것을 알아챈 하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지 말라는. 그러면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수아는 시선을 내려 그와 맞잡은 손을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우리는 당신한테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어요.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당장 가세요.”
“까불지 말고 저리 비켜. 내가 내 아들이랑 할 얘기가 있다는데 네가 뭔데 나서는 거야?”
현철이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자 이에 지지 않겠다는 듯 수아가 눈에 잔뜩 힘을 주며 노려봤다.
“여기 바로 앞이 경찰서거든요? 신고하면 1분 내로 바로 출동할 수 있어요. 자신 있으면 계속 여기 계시던지.”
수아는 서둘러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거기 경찰서죠? 여기 이상한 남자가 있어서요.”
현철에게 시선을 고정한 수아는 보란 듯이 전화를 걸었다.
“뭐. 그래. 어차피 조만간 또 보게 될 텐데. 첫 만남은 이쯤으로도 괜찮겠지.”
도망가는 주제에 현철은 끝까지 비열한 웃음을 잃지 않은 채로 주차장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수아는 휴대폰을 귓가에서 떼어냈다.
사실 그에게 겁을 주려고 했을 뿐. 실제로 전화를 건 것은 아니었다.
완벽한 방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더니. 대체 어딜 봐서 완벽하다는 거야.
수아가 눈앞의 CCTV를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던 그때.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하준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그는 여전히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고, 숨쉬기조차 힘겨운지 창백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내가 옆에 있어요. 괜찮을 거예요.”
수아는 하준을 품에 안고는 천천히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맞닿은 몸을 타고 전해지던 그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더니 이내 그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왔다.
“이제 좀 괜찮아요?”
걱정이 담긴 물음에 하준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내 손 잡고 천천히 일어나 볼래요?”
하준은 수아가 내민 팔을 붙잡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 우리 집으로 가요.”
두 사람은 함께 걸음을 맞추며 집으로 향했다.
집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몇 분.
그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스치는 수많은 생각이 수아의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어떤 말이 그에게 위로가 될까.
수많은 말들이 스쳐 갔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집에 도착한 수아는 하준을 침대로 이끌었다.
“좀 누워요.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
수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의 가슴을 살며시 토닥였다.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수아의 부드러운 토닥임에 하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
“안 돼. 안 돼. 가지 말아요. 제발.”
하준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잠깐 쉰다는 게 수아도 잠이 들었나 보다.
그의 중얼거림에 수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대체 얼마 동안 이렇게 혼자 힘들어하고 있었던 건지.
하준은 베개가 잔뜩 젖어 들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준 씨. 왜 그래요.”
수아가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제발. 제발. 가지 말아요.”
어느새 맺힌 눈물이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에 수아는 서둘러 그를 붙잡아야 했다.
“하준 씨! 정신 차려 봐요! 하준 씨!”
수아의 간절함이 통한 걸까. 하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아. 하아.”
그의 입술을 비집고 거친 숨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신이 좀 들어요?”
수아는 그가 자신을 볼 수 있도록 거리를 좁혀 다가갔다.
“수아 씨.”
하준은 벌떡 일어나 그녀를 한 품에 안았다.
“괜찮아요. 괜찮아.”
이렇게나 힘들어하는 그를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고작 괜찮다는 말뿐이라니. 미안함에 심장이 지끈거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테라스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이 말 말고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하준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툭 떨어졌다.
“아니. 저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아주는데, 망설임 가득한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왜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습니까?”
호기심 많은 그녀라면 궁금할 것이 분명한데 아무런 질문이 없으니 오히려 먼저 말을 꺼낸 건 하준이었다.
“아플까 봐요. 내 질문이 하준 씨를 더 아프게 할까 봐.”
“…….”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 항상 이 자리에서 기다릴 테니까 언제든 당신 마음이 원할 때. 그때 말하면 돼요.”
내 마음이 원할 때. 지금이 지나면 그런 날이 오긴 할까.
망설임 끝에 무슨 결심이 섰는지 하준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였습니다.”
과거형. 하준에게 그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저는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밥 한 끼 마음껏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하준은 가슴 한구석에 애써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의 아픔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빚만 늘어갔고, 술을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언제 때릴지 몰라 어머니와 저는 항상 숨어있어야 했습니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고요한 테라스의 정적을 갈랐다.
“10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골수 기증이 돈이 된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검사를 받게 했습니다.”
“골수 검사요?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수아는 믿을 수 없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며칠 뒤에 병에 걸린 어느 부잣집 아들의 골수와 일치한다는 결과를 들었죠.”
“혹시 그 집이.”
“네. 맞습니다. 지금의 회장님과 사모님의 집이었습니다.”
아. 그때의 인연으로 하준 씨를 입양하신 거였구나. 수아는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에게 골수를 기증하기로 한 날. 사모님께 돈을 받은 아버지는 그길로 병원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 어떻게 그런…….”
어린 날의 하준을 안아줄 수 없음이 너무나 안타까워 그녀의 눈망울 가득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저를 불쌍하게 여기신 회장님, 사모님께 거둬져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하준이 고개를 돌려 수아를 바라봤다.
수아는 마치 자신이 버림받은 아이가 된 것처럼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왜 울어요.”
하준은 수아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냈다.
“누가 보면 수아 씨가 버려진 줄 알겠네.”
하준이 무거운 입꼬리를 가까스로 끌어올렸다.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슬펐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수아는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꺽꺽거리며 연신 울음을 뱉어냈다.
그 울음은 마치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울어보지 못한 하준을 대신해 울어주는 것 같았다.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 울어요.”
“안 괜찮은데. 흐윽. 하나도 안 괜찮은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 고작 10살짜리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의 크기가 아닌걸.
도대체 이 남자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온 걸까.
그 큰 아픔을 가슴에 품은 채로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걸까.
“내가 지켜줄 거예요. 그 사람이 하준 씨한테 더는 상처 주지 못하도록 내가 하준 씨 옆에 꼭 붙어서 지켜줄 거예요.”
결국 수아는 하준의 목에 매달려 엉엉 소리까지 내며 격한 울음을 쏟아냈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이제 다 울었습니까?”
하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아와 눈을 맞췄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화장도 다 지워져서 못생겨 보일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대성통곡을 해댔으니 화장이 얼마나 엉망으로 망가져 있을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수아는 밀려드는 민망함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준과의 거리를 넓혔다.
그렇게 먼 산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는 사이 하준은 그녀가 멀어진 거리만큼 다시 공간을 좁혀왔다.
“설마 그럴 리가.”
불쑥 그의 손이 수아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이내 그녀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우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깜짝 놀라는 중이었는데.”
장난기 가득한 그의 음성에 수아는 표정을 굳혔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네? 뭘 말입니까?”
“지금 아프잖아. 슬프잖아. 그런데 왜 억지로 괜찮은 척하려고 해요.”
“…….”
“슬프면 슬프다. 아프면 아프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그래도 돼.
“그렇게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말고, 내가 하준 씨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게 조금만 시간을 남겨줘요.”
귓가로 스며드는 수아의 속삭임에 가슴에 훈풍이 부는 듯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당신이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들이닥친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올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허우적거리고만 있었겠지.
차마 말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당신의 존재만으로도 나는 언제나 위로받고 있다는걸.
하준은 수아의 목덜미를 파고들며 조금 더 깊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