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조건
(84/105)
84. 조건
(84/105)
84. 조건
2023.01.17.
어느새 밝아온 아침.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하준의 눈꺼풀이 밀려 올라갔다.
‘벌써 일어난 건가.’
옆자리에 수아가 없음을 알아챈 하준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거실로 들어서자 주방에 있는 수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묶어 올려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핑크색 앞치마.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발걸음.
저곳이 저렇게 넓은 곳이었나. 저렇게 따뜻한 곳이었나.
어쩐지 자신의 주방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준은 발소리를 죽이며 수아의 뒤로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어? 일어났어요?”
갑작스러운 체온에 놀란 수아가 고개를 돌렸다.
“좀 더 쉬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항상 일어나던 시간이라.”
어려서부터 깊은 잠이 들어본 적이 없는 하준에게 이른 기상은 이미 익숙한 일상이었다.
수아가 몸을 빙글 돌리며 하준과 시선을 맞췄다.
“그래서. 잠은 잘 잤어요?”
아침 햇살을 머금은 듯 내려다본 그녀의 눈동자가 빛났다.
“네. 잘 잤습니다.”
“다행이네요. 혹시 나쁜 꿈이라도 꿨을까 봐 걱정했는데.”
“…….”
또 걱정을 시켰구나.
문득 걱정시킬 일은 만들지 않겠다던 며칠 전의 약속이 떠올라 하준은 미안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괜찮아요. 그건 하준 씨 잘못이 아니에요.”
축 처진 눈썹에 수아는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우리 같이 아침 먹어요.”
수아의 눈짓에 하준의 시선이 식탁을 향했다.
어설프게 말려 있는 계란말이와 미역국.
눈에 익은 반찬 외에 새롭게 추가된 것들에 시선이 갔다.
“계란말이 연습한 지 얼마 안 돼서 맛도 모양도 보장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만든 노력을 생각해서 맛있게 먹어줘요.”
“맛이 없을 리가 없죠. 누가 만들어 준 건데.”
하준이 피식 웃으며 의자에 앉았고, 수아는 그의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오늘 누구 생일입니까?”
“왜요. 꼭 생일이어야만 미역국을 먹나요.”
이 미역국에는 나름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은 잊고 새로 태어나라는 의미.
수아가 수많은 국 중에서 미역국을 고른 이유였다.
“궁금해하지 말고 어서 먹어요.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또 열심히 일을 하죠.”
“네. 맛있게 먹겠습니다.”
하준이 수저를 들어 밥 한 숟가락을 덜어냈다.
그때. 수저 위로 작게 잘린 계란말이 한 조각이 올라왔다.
응? 하준의 시선이 올라왔다.
“로망이었어요. 애인 숟가락 위에 반찬 올려주는 거.”
수아가 싱긋 웃었다.
무슨 로망이 그렇게 소박한지. 하준도 따라 싱긋 웃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출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거울 앞에서 옷차림을 정돈하던 하준의 시야에 수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
“뭘 그렇게 열심히 봅니까?”
슬쩍 그녀의 휴대폰 액정을 살폈다.
“혈 자리요.”
“무슨 자리요?”
“혈 자리 말이에요. 눈 부기 빼는 혈 자리 찾아보고 있어요.”
“눈이 왜요? 예쁘기만 한데.”
하준의 미소에 수아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이 눈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어제의 여파로 애벌레 두 마리가 얹혀 있는 듯 부어 있는 눈을 가리키며 수아가 언성을 높였다.
“왜요. 예쁜데. 계속 예쁜 중인데.”
하준은 말끝에 입술을 말아 물며 웃음을 삼켰다.
“이거 봐. 웃는 거 봐. 지금 놀리는 거죠?”
“아니요. 놀리다니요. 어떻게 감히.”
겨우 웃음을 멈춘 하준이 수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혈 자리는 찾은 겁니까?”
“네. 이렇게 여기를 눌러주면 부기가 빨리 빠진대요.”
이거 보라며 수아가 휴대폰 액정을 내밀었다.
잠시 액정을 쳐다보던 하준은 이내 수아의 휴대폰을 빼앗아서는 침대 위로 툭 던져버렸다.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빨리 따라 해야 된단 말이에요.”
“다 외웠습니다. 저 때문이니까 제가 해줄게요.”
하준이 기다란 손가락을 흔들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정말요? 그럼 제대로 해줘야 해요. 이대로는 창피해서 출근할 수가 없다고요.”
“걱정하지 말고 눈 감아 봐요.”
하준은 엄지손가락을 수아의 얼굴에 가져다 대고는 콧대 부분을 지그시 누르며 동그랗게 돌렸다.
“정말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왜 자꾸 의심을 할까. 설마 저를 못 믿는 겁니까?”
콧대 부분에 머무르던 하준의 손가락이 눈꺼풀 쪽으로 이동했다.
참 작기도 하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이 작은 얼굴 안에 어떻게 이렇게 오밀조밀 눈, 코, 입이 꽉꽉 들어차 있는지.
이마에서 시작된 하준의 시선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콧대를 지나 귀여운 콧방울을 지나 도착한 그녀의 입술.
자신이 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집중을 한다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건지.
대체 이 유혹을 어떻게 견디라는 건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하준이 천천히 수아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그러다 쪽.
짧은 순간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놀란 수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아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제대로 해준다더니.”
토라진 듯 수아가 눈을 흘기며 입술을 삐죽였다.
“제대로 하고 있는 겁니다. 동시에 눌러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제 손은 두 개뿐이니까 어쩔 수 없이.”
아으. 정말.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아. 진짜. 이러고 어떻게 출근을 하냐고요. 다들 엄청 비웃을 텐데.”
“마침 오늘 팀장단 회의가 있는데.”
하준이 좋은 생각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회의 시간에 오늘 하루 동안은 절대로 수아 씨 얼굴을 보지 말라고 공지하는 건 어떻습니까.”
뭐라고? 뭘 공지해? 수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아니면 마주치고도 절대 웃지 않기. 어때요? 꽤 괜찮은 생각 같은데.”
어이없는 말을 뱉어놓고 참 해사하게도 웃는다.
“진짜 그러기만 해봐요.”
누가 들어도 현실성이 없는 말에 그의 목소리가 현실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수아는 이를 꽉 깨물며 경고했다.
그 말을 입 밖에 내놓는 순간 분노의 피바람이 불어닥칠 거라고.
*
“수아 씨.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눈이 왜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퉁퉁 부어 있는 수아의 눈이 충격적이었는지 사무실에 들어서는 직원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제 잠이 안 와서 영화나 한 편 보고 잔다는 게 너무 슬픈 영화를 고르는 바람에.”
애써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데 뒷자리에서 손 하나가 쑥 뻗어 나왔다.
“호박즙 하나 줄까요? 부기 빼는 데는 호박즙이 즉효죠.”
“아. 감사합니다.”
수아는 희수가 건넨 호박즙을 받아들었다.
“몇 개 더 있으니까 더 필요하면 말해요.”
“네. 그럴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먹을까. 아니면 조금 있다가 먹을까 고민하는데 옆자리에 있던 시우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혹시 형이랑 싸운 거예요?”
시우는 누가 들을까 속삭이듯 물어왔다.
“싸우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컴퓨터 화면에 메시지 창이 떴다.
“혹시 하준이랑 싸웠어?”
차마 대놓고 묻지 못한 지훈의 메시지였다.
이 사람들이 정말. 아니라면 아닌 줄 좀 알지.
수아는 눈이 가라앉을 동안은 자리를 벗어나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생각 끝에 오후로 계획한 신규 오픈 매장 방문을 지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팀장님. 신규 오픈 매장 지금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지훈은 다른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싸웠네. 싸웠어.’
‘아니라니까요.’
가방을 챙겨 든 수아가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 없는 분노를 드러냈다.
눈이 부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사무실을 나선 수아는 희수가 전해준 호박즙을 뜯어 입에 물고는 혈 자리를 꾹꾹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
“회장님. 이승재 전무님께서 오셨는데요.”
띵동 소리에 인터폰을 확인한 가사도우미가 소파에 앉아 있던 현성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 전무가? 들여보내세요.”
잠시 후 승재가 현관으로 들어섰고, 현성은 그를 서재로 이끌었다.
서재 소파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인가?”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승재는 손에 들린 서류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뭔가?”
현성은 서류봉투를 들어 안에 있던 내용물을 꺼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여러 장의 사진이었다.
“이건…….”
사진을 살피던 현성의 동공이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그가 건넨 것은 하준이 한 남자와 마주 서 있는 장면이 찍힌 사진이었고, 그 남자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김현철. 하준의 친아버지.
2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비정했던 그 얼굴이 잊혔을 리 없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 아닙니까?”
말투를 보니 남자의 실체를 알고 묻는 질문이었다.
“우리 부회장님께서 친아버지를 몰래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회장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역시 알고 있었군. 친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건 남들 몰래 하준의 뒷조사를 했다는 것.
순간 현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돈이 필요해 보이는데. 혹시나 친아버지를 위해 회사 돈을 사용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네요.”
걱정스럽다는 말과는 달리 그의 한쪽 입술은 여유롭게 밀려 올라가 있었다.
“원하는 게 뭔가.”
말없이 사진을 응시하던 현성이 입을 열었다.
경영자로 하루 이틀 살아온 게 아니니 한발 물러나 있다 한들 그 노련함이 사라질 리 없었다.
“진성 그룹과의 브랜드 론칭 프로젝트 원상 복귀와 김지수 양의 고소 건 취하. 이 두 가지만 해결해 주시면 됩니다.”
승재의 조건에 현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준이를 빌미 삼아 진성을 돕겠다는 건가? 이유가 뭐지?”
“그건…….”
진성의 협박 때문이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승재는 난처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네.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일단은 돌아가 있게.”
“되도록 빠른 결정 부탁드립니다. 저도 사정이라는 게…….”
“알겠으니 그만 가보라고 했을 텐데.”
이젠 아예 대놓고 척을 지겠다? 순간 현성의 눈빛이 위압적으로 변했다.
“네. 그,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의 눈빛에 승재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빠져나갔다.
혹시 일이 잘못되더라도 진성에 자리하나 정도는 있겠지 싶은 마음에 저지른 일이었지만, 당장 눈앞의 현성이 두려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기다렸다는 듯 혜선이 서재로 들어왔다.
“이 전무는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예요?”
현성을 향해 다가오던 혜선의 시선이 테이블 위 사진에 닿았다.
“여보. 이건…….”
사진을 들어 확인한 혜선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맞아요. 김현철.”
“이 사진을 그 사람이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걸까요.”
“아무래도 이 전무가 일을 꾸민 듯해요.”
“어떻게 해요. 우리 하준이 어떻게 해요.”
아직도 버림받은 기억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이인데 그는 어쩌자고 나타난 걸까. 왜 나타난 걸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진을 들고 있던 혜선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 전무가 이 사진을 준 이유가 뭔데요? 혹시 거래를 제안하던가요?”
혜선의 물음에 현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 두 가지를 제시하더라고.”
“조건이 뭔데요? 당신이 들어줄 수 있는 조건이었어요?”
“들어줄 수는 있지만 들어주고 싶지 않은 조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현성은 대답 대신 휴대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김 비서. 준비했던 서류 검찰청에 접수하게.”
짧은 통화가 끝나고.
“감히 누굴 건드려.”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가 현성의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