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하루 종일 같이
(85/105)
85. 하루 종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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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하루 종일 같이
2023.01.21.
“하아…….”
부회장실 책상에 앉은 하준은 찾아든 두통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날 내가 너를 병원에 두고 오지 않았으면 네까짓 게 감히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어?]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가 지난 20년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알고도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이 가져간 10억 때문에 얼마나 큰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아왔는지.
매일 밤 당신에게 버림받았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라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그리고 또다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버티며 살아왔는지.
모르잖아.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다 날 위한 것이었다고?
그의 음성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뭐. 그래. 어차피 조만간 또 보게 될 텐데.]
“……돈 때문이겠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가 나에게서 얻고자 하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으니.
애써 담담한 척해보려 했지만 숨겨지지 않는 절망감에 악문 어금니가 부르르 떨렸다.
언제 다시 찾아온다는 걸까. 만약 회사로 찾아오면 어떻게 하지. 그럼 회장님께서 알게 되실 텐데. 그땐 회장님께 뭐라고 설명드려야 할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던 그때.
부회장실 문이 열리며 현성이 들어섰다.
노크 소리를 못 들었나? 평소 같았으면 벌써 들려왔을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책상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현성은 심각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하준을 발견했다.
바라보고 있는 것이 결재서류가 아닌 것을 보아 업무에 대한 고민은 아니었다.
‘친아버지를 만난 것 때문에 생각이 많아졌겠지.’
아들의 생각을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준아.”
현성의 목소리에 하준의 몸이 흠칫 떨렸다.
“회, 회장님”
화들짝 놀란 하준의 몸이 용수철 튀듯 튀어 올랐다.
“많이 바쁠 때 찾아왔나 보네.”
“아, 아닙니다.”
하준은 서둘러 현성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어? 골치 아픈 일이라도 생긴 거야?”
“아닙니다. 그냥 잠깐 생각한다는 게.”
“그래? 무슨 고민이 있는 건 아니고?”
“네? 그게 무슨.”
마치 무언가를 알고 묻는 듯 오늘따라 현성의 질문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아니. 얼굴이 좀 까칠해 보이길래. 무슨 고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
사실 마음 같아선 현철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게 충격일 수 있을 것 같아 말을 삼켰다.
“아니면 회사 일이 너무 힘든가?”
“아닙니다. 힘든 일 없습니다.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또 죄송합니다. 언제쯤 저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으려나.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지 죄송할 일이 아니야. 인사를 하고 싶으면 차라리 감사하다고 하던지.”
“네.”
하여간 대답은 잘하지. 다음에도 죄송하다고 할 거면서.
“그럼 말 나온 김에 연습 한번 해볼까?”
“연습이요?”
“그래 연습. 이런 것도 자꾸 연습을 해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 아빠 말 따라 해 봐.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범을 보인 현성이 하준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내가 지금 너의 말을 기다리고 있어.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한 문장을 말하는데 귀까지 빨개질 것까지야. 하여간 보기와는 다르게 너무 순수하다니까.
“아. 한 번만 다시 하자. 엄마한테도 들려주고 싶은데 아빠가 깜박하고 녹음을 못 했네. 한 번만 다시. 응?”
현성이 입가 가득 웃음을 머금고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휴대폰을 찾았다.
“회, 회장님. 그건.”
다급함에 하준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알았어. 오늘은 아빠 혼자 들은 걸로 만족할게. 대신 다음에는 엄마한테도 직접 말해줘야 한다. 알겠지?”
현성이 손에 잡힌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바쁠 텐데 아빠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다. 그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긴. 어쨌든 나는 네 얼굴 봤으니까 그걸로 됐어. 먼저 갈 테니까 하던 일 계속해.”
현성이 소파에서 일어서자 하준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나오지 마. 나오지 말고 일해. 그래야 빨리 퇴근하고 수아 양이랑 데이트하지.”
걸음을 옮기던 현성이 할 말을 남은 듯 빙글 돌아 다시 하준을 바라봤다.
“하준아.”
현성은 봄바람처럼 따뜻한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혹시라도 아빠가 도와줘야 할 일이 생기면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바로 연락해.”
“네.”
“그리고 네 옆에는 항상 우리 가족들이 있다는 거 잊지 말고. 알겠지?”
“…….”
현성의 마지막 당부에 울컥 울음이 올라와 하준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끝에 잠깐 망설이다가.
“……감사합니다.”
쑥스러워 시선도 마주치지 못한 채로 인사를 전했다.
하루에 두 번은 기대도 안 했는데.
예상치 못한 아들의 인사에 현성의 눈은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그래. 수고해라.”
현성은 하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고는 곧장 부회장실을 나섰다.
부회장실을 나서는 현성도. 남아 있는 하준도 입술 가득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큰아버지. 저 왔어요.”
자신의 방으로 잠깐 올라오라는 현성의 연락에 지훈은 서둘러 회장실을 찾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갑자기 회사를 다 오시고.”
“응. 하준이 상태도 좀 보고, 너한테 긴히 해야 할 말도 있고 해서 들렸어.”
“하준이 상태라뇨?”
지훈의 물음에 웃음기를 지운 현성이 입을 열었다.
“아침에 이 전무가 집으로 찾아왔더라.”
“이승재 전무 가요? 갑자기 무슨 일로요?”
“와서는 이걸 주고 갔어.”
현성은 승재가 놓고 간 사진 몇 장을 지훈에게 내밀었다.
“이 사람이 누군데요?”
사진을 살피던 지훈이 하준의 건너편 남자를 가리켰다.
현철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지훈에게 그는 그저 낯선 남자일 뿐이었다.
“하준이 친아버지. 김현철.”
“네? 하준이 친아버지요?”
당황한 지훈은 눈을 번쩍 뜨고는 사진을 자세히 살폈다.
“하준이가 친아버지를 만났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이 두 사람이 만나는 걸 알고 있었냐고 묻더라.”
그 질문에 내가 당황하기를. 그리고 사실을 숨겼을 하준에게 실망하기를 바랐겠지.
“그러고는 하준이 일을 모르는 척 덮어주겠다면서 조건을 걸었어.”
“조건이요? 감히 큰아버지한테 조건을 걸었단 말이에요?”
“그러게. 어지간히 급하긴 했던지 겁도 없이 나한테 조건을 제시하더라고.”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현성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조건이 뭐였는데요?”
“브랜드 론칭 계약 원상 복귀랑 김지수에 대한 고소 취하.”
뭔지 감이 오지? 현성의 눈썹이 들썩였다.
“조건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가네요. 이 전무가 이번 프로젝트 건으로 진성에게 뭔가를 받아 챙긴 거겠죠.”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가는 받아 챙겼는데 프로젝트가 엎어졌으니 아마도 진성 쪽에서 압박이 들어왔겠죠.”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더니. 딱 그 격이었다.
“그래서 나나 하준이를 협박할 뭔가를 찾다가 알아냈겠지.”
“그래서요? 그 조건 들어주실 거예요?”
“아니? 그런 하찮은 협박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그럼요? 어떻게 처리하시게요?”
지훈의 물음에 현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내일 진성 그룹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이 집행될 거다. 이 전무에 대한 검찰 수색도 같이.”
“압수수색영장이요?”
“그래. 감히 하준이를 두고 거래를 하려 들다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그의 얼굴엔 한껏 날이 서 있었다.
“사실 이 전무가 프로젝트 업체 선정에서 별 인지도도 없는 진성을 추천할 때부터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어.”
너무 적극적이어서 눈치를 못 채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전무와 진성에 대한 정보를 모아 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사용하게 될 줄이야.”
아.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셨구나. 놀라움과 감탄에 지훈의 입이 벌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하준이야.”
“하준이가 왜요?”
“이승재가 검찰로 이송될 때 하준이랑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무슨 말을 뱉어낼지 알 수가 없어.”
혹시나 모든 직원이 보는 앞에서 친아버지를 언급하거나 상처가 될 만한 말들을 쏟아내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하긴. 둘이 마주쳐봐야 좋을 건 없죠.”
“그래서 말인데. 네가 핑곗거리 하나 만들어서 하준이 좀 데리고 나갔다 와. 그사이에 되도록 빠르게 처리할 테니까.”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지훈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는 회장실을 나섰다.
*
사무실 직원들과 점심을 먹은 뒤 수아는 부회장실을 찾았다.
“혹시 안에 계세요?”
수아가 박 비서를 향해 작게 속삭이며 부회장실을 가리켰다.
“네. 계십니다.”
“혹시 점심 식사는 하셨나요?”
“아니요. 화상회의가 예상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아직 못하셨습니다.”
이미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박 비서는 그녀의 물음에 순순히 답해주었다.
“아. 그렇구나.”
이럴 때일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하는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녀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박 비서가 말했다.
“부회장님 식사로 도시락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도시락이요?”
“네. 업무로 식당까지 가실 시간이 없으실 때를 대비해서 늘 도시락을 준비해 둡니다.”
“다행이네요. 뭘 사다 줘야 하나 고민됐는데.”
수아가 안심하며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박 비서의 책상에 놓여 있던 전화기가 울렸다.
“네. 부회장님.”
“한 시간 뒤에 시작됩니다.”
“지금 도시락이라도 챙겨 드릴까요?”
“네.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박 비서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뭐라고 하세요? 도시락 달라고 하셨어요?”
도시락을 챙기냐는 박 비서의 목소리만 듣고 하준의 대답은 듣지 못했기에 수아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물었다.
“아니요. 괜찮다고 하십니다.”
괜찮다니. 잠깐이라도 시간이 남았을 때 빨리 챙겨 먹어야지. 왜 안 먹겠다는 거야?
하준의 행동이 탐탁스럽지 않아 수아는 미간을 구겼다.
“박 비서님. 지금부터 한 시간 정도 여유 있는 거 맞죠?”
“네. 맞습니다.”
“그럼 그 도시락 저 주세요. 제가 가지고 들어갈게요.”
“네.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박 비서도 식사를 거른 채 업무에만 집중하는 하준이 걱정되던 차였기에 서둘러 도시락을 챙겼다.
박 비서에게 도시락을 전해 받은 수아는 똑똑 노크를 하고 부회장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박 비서님. 회의 시간을 앞당겨서 지금 바로 할 수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수아가 안으로 들어서자 박 비서라고 생각한 하준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부회장님. 그건 안 됩니다.”
“……?”
느닷없이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하준의 고개가 순식간에 들어 올려졌다.
문 앞에 서 있는 수아를 발견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빠르게 이동해왔다.
“수아 씨. 언제 왔어요.”
하준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반기는데.
“그 회의 시간 앞으로 못 당겨요. 아니 안 당겨요.”
수아는 대뜸 미간을 좁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시간이 남았으면 밥을 먹어야지, 왜 회의를 앞당겨요?”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이번 회의 끝나고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 말 못 믿겠어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뭘 말입니까?”
“하준 씨 밥 먹는 거요. 이 도시락 다 먹을 때까지 부회장실에서 안 나갈 거예요.”
“설마 지금 저한테 협박하는 겁니까?”
“네. 협박하는 겁니다.”
하. 겁은커녕 귀엽기만 한데. 무슨 협박을 하겠다고.
하준은 수아의 손에 들린 도시락을 한 손으로 가볍게 거둬내고는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뭐, 뭐예요?”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자 하준이 시선을 내리며 씩 웃었다.
“아무래도 밥은 못 먹겠네요.”
“뭐라고요?”
“제가 밥 다 먹을 때까지 여기에서 안 나간다면서요.”
아차. 수아는 그제야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급하게 수습하려 했지만 하준에게 더 이상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수아 씨랑 하루 종일 같이 있을 방법을 이제야 찾았네요.”
하준은 입술 가득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