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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오해와 진실 (86/105)


86. 오해와 진실
2023.01.24.


수아는 예쁘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하준의 입술 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럴 거면 차라리 하준 씨가 다 먹고 난 다음에 들어오는 게 낫겠어요.”

밀착된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몸을 반쯤 돌리고 나서야 허리에 둘러져 있던 하준의 팔이 풀렸다.


“알겠어요. 안 그래도 지금 먹으려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끼니를 챙겨 먹이려는 수아의 마음도 모른 채 하준은 입술을 삐죽이며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가는 거 어때요?”

깨끗하게 비워진 도시락 그릇을 정리하던 수아가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네. 있어요.”

기다렸다는 듯 수아는 재빨리 휴대폰 화면을 내밀어 보였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여러 종류의 스테이크 사진들.


“지난번 유나 팀장님한테 추천받은 레스토랑인데 여기 스테이크가 그렇게 맛있다네요. 양질의 단백질 섭취를 통해서 하준 씨 면역력 좀 키워주려고요.”

수아는 이미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정말 내 면역력을 위한 거 맞지? 당신 식욕 때문 아니고?

어쩐지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지만 아무렴 어떤가. 당신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한걸.


“그럼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퇴근하고 전화해요.”

“네. 그럼 이따가 만나요.”

수아는 밝게 손을 흔들며 부회장실을 떠났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퇴근 시간.

회사를 나선 하준은 혼자서 레스토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던 일만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 하준 씨 먼저 출발해요.]

[저 배가 너무 고픈데. 미리 주문 좀 해주면 안 돼요?]

퇴근 시간에 맞춰 급하게 보내온 수아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해 직원의 안내에 따라 창가 자리에 앉은 하준은 서둘러 메뉴판을 살폈다.

수아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주문을 마친 뒤 하준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수아 씨가 보면 좋아하겠네.”

창밖의 야경을 보며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하던 하준의 입술이 길어졌다.


“하준 오빠?”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하준이 유나를 발견했다.

유나에게 추천받은 곳이라고 하더니 이렇게 바로 마주친 걸 보면 꽤 자주 오는 곳이긴 한 모양이었다.


“어. 김유…… 아. 안녕하십니까.”

하준은 유나에게 인사하려다 옆에 선 그녀의 엄마 민영을 발견하고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이게 누구야. 혜선이 아들 하준이구나? 어쩜 못 본 사이에 더 멋있어졌네.”

어느새 다가온 민영이 환하게 웃으며 하준을 반겼다.


“이렇게 잘생긴 아들이 있으니 네 엄마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그래서 혜선이가 그렇게 날씬한 건가?”

민영과 하준의 엄마 혜선이 오랜 친구 사이이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데를 혼자 오지는 않았을 테고. 누구 기다리는 중인가 보네.”

민영의 시선이 비어 있는 하준의 맞은편 의자에 닿았다.


“네. 여자 친구…….”

“여자 친구 기다리고 있겠지.”

유나가 아는체하며 하준의 말을 획 가로챘다.


“여자 친구? 어머 하준아. 너 여자 친구 생겼니?”

어머. 어머. 많이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키운 민영이 어머 소리를 연발했다.


“큰아들이 연애에는 너무 관심이 없다고 네 엄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제 걱정하나 덜었네.”

민영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하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눈치 없이 안기는 왜 앉아. 이럴 때는 빨리 없어져 주는 게 예의라고.”

당황한 유나가 급히 민영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인데 뭐 어때. 하준이 여자 친구 얼굴만 보고 바로 일어나면 되잖아. 하준아 그래도 괜찮지?”

“네. 괜찮습니다.”

어차피 부모님, 유나, 지훈이, 시우까지. 주변 사람들 모두 수아를 알고 있기에 특별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정말 주책이야 주책.”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던 유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엄마의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 유나도 빨리 짝을 찾아야 할 텐데. 괜찮은 선 자리를 구해다 준대도 매번 싫다고만 하니. 대체 어쩌려는 건지.”

자리에 앉자마자 민영의 신세 한탄이 시작되었다.


“엄마! 나는 선 같은 거 싫다니까? 나는 자만추라고.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대체 몇 번을 말해.”

“아니. 그러니까 그 자연스러운 만남은 도대체 언제쯤 이루어지는 거냐고. 맨날 추구만 하다가 혼자 늙어 죽을래?”

느닷없이 시작된 모녀의 언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지훈이는 어떠세요?”

민영이 지훈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을 본인에게 직접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하준은 모르는 척 물었다.

지훈이 정도면 꽤 괜찮은 사윗감일 텐데 왜 반대를 하는 건지 그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응? 뭐라고? 뭐가 어떻다고?”

높아진 목소리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한 민영이 하준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훈이는 어떠신지 여쭤봤습니다. 제 친척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지훈이 정도면 꽤 괜찮은 사윗감일 것 같아서요.”

‘오. 하준 오빠. 나이스 타이밍.’

유나가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지훈이? 지훈이라면 네 사촌을 말하는 거야?”

“네. 맞습니다.”

“그걸 말해 뭐해. 지훈이 정도면 일등 신랑감이지.”

민영이 크게 반색하며 말했다.


“혹시 유나가 지훈이를 좋아하고 있는 건 알고 계십니까?”

“아이고. 여자애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이렇게 티를 내고 다니는데, 설마 그걸 모르려고.”

쯧쯧. 고개를 잘게 저으며 혀를 차던 민영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뭐 하겠어. 지훈이가 유나를 싫어하는데.”

“싫어하긴 누가 싫어해. 지훈 오빠도 나 좋아하거든?”

“이것아. 인연이라는 게 너 혼자 억지로 우긴다고 이어지는 게 아니야.”

두 모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하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마 전 지훈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쩐지 이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어머님께서 지훈이와 유나 사이를 반대하신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지금은 일등 신랑감이라고 하시면서 과거에는 왜 반대를 하셨던 건지 알고 싶어졌다.


“뭐라고?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 우리 엄마가 지훈 오빠를 반대한다고?”

화들짝 놀란 유나의 눈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커졌다.

유나가 민영을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엄마! 엄마가 우리 지훈 오빠 반대했어?”

“응? 누가? 내가?”

지훈이와 유나가 이어지기를 항상 바라고 있는 사람한테 왜 반대를 했냐 하니.


“내가 지훈이를 반대했다고? 하준이 너는 그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데?”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눈을 깜박거리며 민영이 물었다.


“지훈이한테 직접 들었습니다. 따로 정해둔 사윗감이 있으니 유나한테 얼씬대지 말라고 하셨다고…….”

“엄마!!”

하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나가 고함을 질렀다.

잔잔한 음악을 가르는 고함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유나에겐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지훈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머. 아니야. 나는 지훈이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민영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유나가 저희 회사에 입사할 때 지훈이를 따로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거?”

하준이 말하는 그 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듯 민영이 눈을 키웠다.


“너도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그때 회사 내 성추행 문제 때문에 뉴스가 시끄러웠어. 물론 현성 그룹은 믿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유나 좀 지켜달라고 부탁하려고 찾아갔었지.”

민영은 곧장 말을 덧붙였다.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같이 붙어 있다 보면 자연히 가까워지겠지 싶어서.”

“그럼 유나가 조만간 선볼 거라는 말은.”

“선본다는 말에 질투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지훈이 엄마랑 말을 맞춘 거였는데.”

하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어긋나 있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지훈이한테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랬다면 이렇게 서로 어긋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아이고. 유나한테 관심도 없는 애한테 사윗감으로 생각한다고 얘기해봐라. 얼마나 부담스러워하겠니.”

말하다가 문득.


“난 다른 놈들 얼씬 대지 않게 지훈이가 우리 유나 곁에 있으라고 돌려 말한 거였는데.”

민영은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한 듯 보였다.


“네.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어머나. 그 말을 그렇게 받아들일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이걸 어쩌면 좋으니.”

제 딸을 위한다고 했던 행동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 같아 민영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엄마. 나 지훈 오빠한테 가봐야 할 것 같으니까 엄마는 아빠 불러서 같이 먹고 들어가든지 해.”

결심을 굳힌 듯 유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팀원들을 먼저 퇴근시킨 뒤 마무리 작업까지 마친 지훈은 지친 몸을 이끌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띵동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가늘게 열린 문틈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김유나. 너 퇴근한 거 아니……!”

유나가 발꿈치를 들어 올리며 두 팔로 목을 끌어안는 바람에 지훈은 말끝을 흐렸다.


“김유나!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여기 회사인 거 몰라?”

지훈이 유나의 팔을 풀어내고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결혼하자.”

“뭐?”

“나랑 결혼하자고.”

“또 그 소리야? 할 일 없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자.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결혼은 유나에게서 워낙 자주 듣는 이야기이기에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나 회사에 입사할 때 우리 엄마랑 따로 만났었다며. 왜 나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어?”

“그,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일 없었어.”

당황함에 머리보다 마음이 앞서 거짓말을 뱉어냈다.


“나 다 알고 왔거든? 우리 엄마가 오빠한테 점찍어둔 사윗감이 따로 있다고 했다며?”

지훈의 눈썹이 삐죽 솟아올랐다.

민하준 이 자식. 내가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그 일을 알고 있는 건 하준뿐이었으니 말의 근원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 알고 있다니 더 말할 것도 없겠네.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어머님께서 맘에 두신 그 사람한테나 가봐.”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흔들리는 동공까지 붙잡아둘 수는 없어 지훈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온 거잖아. 그 사람한테.”

하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하고 싶지는 않은데.


“내 말 못 알아들은 거야? 내가 아니라…….”

“못 알아들은 건 내가 아니라 오빠잖아.”

유나가 지훈의 말 허리를 빠르게 잘라냈다.


“우리 엄마는 애초에 오빠를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고. 아니. 오히려 처음부터 오빠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유나의 말이 무슨 뜻인지 한 번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당혹스러워하는 지훈의 반응에 유나는 조금 전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던 지훈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거지.’

하.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까지 나왔다.

들썩이는 마음을 내리누르며 유나를 밀어내려고 했던 과거의 수많은 노력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그렇게 지훈이 상념에 잠긴 사이. 유나는 또다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제 나한테 장가와라. 민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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