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배신자를 위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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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배신자를 위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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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배신자를 위한 선물.
2023.01.28.
마무리는 자신이 할 테니 먼저 퇴근하라는 지훈의 말에 수아는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지훈에게는 미안했지만 레스토랑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을 하준 생각에 어쩔 수가 없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해 안내받은 자리로 향하던 수아의 시야에 하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혼자 화보라도 찍고 있는 것처럼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그윽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어색하게 앉아 있을 거란 생각에 급히 서두른 건데, 그를 보는 순간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준 씨.”
수아가 밝게 웃으며 하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는데 괜찮았습니까?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많았을 텐데.”
“제가 탄 택시 기사님이 지름길을 잘 알고 계시더라고요.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어요.”
말을 마친 수아가 옆에 놓인 메뉴판을 바라봤다.
“혹시 주문은요? 주문은 미리 해놨어요?”
“네. 이 레스토랑에서 제일 맛있는 걸로 주문해놨습니다.”
하준이 직원을 불러 서둘러 준비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동안 수아의 시선은 창밖을 향했다.
“우와. 여기 야경도 너무 예쁘네요. 서울 야경은 어디에서 봐도 항상 예쁜 것 같아요.”
역시나. 하준의 예상대로 수아는 눈을 반짝이며 창밖에 펼쳐진 야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내 눈엔 당신이 더 예쁜데.”
순간 입술 사이로 속마음이 새어 나왔다.
“네? 뭐라고 했어요?”
흐르듯 스쳐간 음성이라 잘 안 들렸는지 수아가 되물었다.
“아니. 야경이 예쁘다고 했습니다.”
하준이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미소를 짓는데 때마침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잘라줄 테니 이리 줘요.”
하준은 그녀 앞에 놓인 접시를 제 앞으로 가져갔다.
덤덤한 표정으로 수아의 스테이크를 자르던 하준이 뭔가 생각났다며 입을 열었다.
“좀 전에 여기에서 유나를 만났어요.”
“여기 레스토랑에서요?”
어디? 어디? 수아가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지금은 없습니다. 이미 갔어요.”
“아. 벌써 먹고 가셨어요?”
좋은 곳 소개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아니요. 마음이 급해서 먹지도 못하고 그냥 갔습니다.”
달라진 수아의 말투에 힐끗 올려다본 하준이 말을 더했다.
“그냥 갔다고요? 마음이 왜 급했는데요?”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데.
“배고프다면서요. 일단 먹어요.”
하준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스테이크를 수아의 앞에 놓아주었다.
“이야기는 먹으면서 들어도 됩니다.”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자르며 하준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
“어머. 진짜 잘됐네요.”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수아의 표정이 밝았다.
“그럼 팀장님은 그동안 유나 팀장님을 좋아하면서도 아닌 척했다는 거네요?”
“뭐 그런 셈이죠.”
“조만간 유나 팀장님이랑 축하주 한 잔 마셔야겠어요.”
“뭘 마셔요?”
접시를 향하던 시선을 하준이 급하게 들어 올렸다.
“축하주요.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으니까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술 한 잔 마시면 좋잖아요.”
물음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수아는 태연하게 답했다.
하. 그건 안 될 말이지.
“제 생각엔 술보다는 밥을 먹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말만 놓고 보면 권유인 듯했지만 그의 나직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는 무조건 밥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껌뻑 껌뻑. 말없이 눈을 깜박거리다가 불현듯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수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아. 지난번 일 때문에 그러는구나. 친구분 가게에서 유나 팀장님이랑 술주정한 것 때문에.
흠. 민망함에 수아는 헛기침을 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 급할 건 없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볼게요. 어우. 여기가 스테이크 맛집이었네요. 육즙이 제대로네. 제대로야.”
확답 대신 말을 얼버무리며 수아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 뜻을 알아챈 걸까. 고개를 내려 접시를 바라보는데 정수리에 날아와 꽂히는 그의 시선이 따가웠다.
잠시 후.
“내일 오전에 외부 일정이 잡혀서 저랑 지훈이가 같이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아요.”
하준의 음성에 드디어 어색한 침묵이 깨졌다.
“출장이에요?”
“아니. 출장은 아니고, 회장님 지시로 현성 호텔에 갑니다.”
아. 그렇구나. 수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가 없는 동안 혹시 김지수가 찾아와도 절대 만나면 안 됩니다. 되도록 회사 밖으로는 나가지 말고요.”
사무실에 지훈이라도 있다면 마음이 놓일 텐데.
하준은 현성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함께 자리를 비우게 된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
다음 날 아침.
“이 전무님. 어떻게 됐습니까? 해결은 될 것 같습니까?”
진성은 여유롭게 앉아 승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일단 회장님께 보고는 드렸습니다. 아들 문제니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빠른 시일 내로 답변 주시기로 하셨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죠.]
바로 그때. 탕! 거친 소리와 함께 회장실 문이 열렸다.
큰 소리에 화들짝 놀란 진성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문 앞에는 파란색 박스를 손에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굳은 표정으로 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찰입니다. 진성 그룹에 대한 압수수색영장 집행하겠습니다.”
무리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활짝 펼치며 진성을 향해 내밀었다.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모두 다 넣어.”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파란색 박스 안에 회장실의 물건들을 빠짐없이 담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진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온몸으로 막아서며 악을 쓰는 진성을 향해 남자가 다시 다가왔다.
“횡령과 배임에 대해 증거인멸 및 도주가 우려되므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같이 가주시죠.”
건장한 체격의 경찰 두 명이 다가와 진성을 붙잡았다.
“당신들. 내가 누군 줄은 알고 이러는 거야? 내 전화 한 통이면 너희 다 잘라버릴 수도 있어!”
진성이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난동을 피우는 사이.
“아빠!”
때마침 회사를 찾은 지수가 사무실의 문서들을 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급히 회장실로 들어섰다.
“아빠! 이 사람들 누구야? 대체 누군데 아빠한테 이러는 거냐고! 당신들 대체 누구야?”
지수가 잔뜩 날을 세우며 진성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찰입니다. 비켜서세요.”
“못 비켜! 당신들이 뭔데 우리 아빠를 데려가?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지수가 진성의 팔을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비켜서지 않으면 공무집행방해죄로 연행될 수 있습니다.”
수사관의 말에 진성은 다급하게 지수를 말렸다.
“지수야. 진정해. 뭔가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 아빠 금방 나올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아빠가 이렇게 가는데 어떻게 걱정을 하지 말라는 거야. 누가 이런 거야? 대체 누가 아빠를 이렇게 만든 거냐고!”
“아빠 믿고 걱정하지 말고 있어.”
좀 전까지만 해도 못 간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더니.
딸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진성은 별다른 반항 없이 스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빠! 안 돼. 가지 마! 아빠!”
지수의 울부짖음에도 진성과 검찰청 직원들은 회장실을 빠져나갔고, 지수는 혼자 남겨졌다.
목까지 차오른 절망감 속에서 지수는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아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이었다.
*
그 시각 현성 그룹 전무실.
[진성 그룹에 대한 압수수색영장 집행하겠습니다.]
[횡령과 배임에 대한 증거인멸 및 도주가 우려되므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휴대폰을 잡고 있던 승재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전무님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창백하게 질린 승재의 얼굴에 승재의 방에 모여 있던 임원진들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도망쳐야 해’
그들의 물음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승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다급한 손길로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순간 달칵 소리를 내며 문이 저절로 열렸다.
“회, 회장님.”
임원진들은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현성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전무. 어딜 가나? 뭐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보지?”
현성의 싸늘한 시선이 승재와 마주쳤다.
“그리 바쁜 일이 아니라면 조금 있다가 가는 게 어때. 내가 할 말이 좀 있어서 말이야.”
현성은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빨리 와서 앉지? 그래야 어제 대화에 대한 답을 줄 게 아닌가. 급하다고 하지 않았어?”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그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주변을 얼려버릴 듯 강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결국 승재는 무거운 걸음을 겨우 떼어내며 소파로 향했다.
“다들 그렇게 서 있지들 말고 앉으시죠.”
임원진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현성의 입술이 열렸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전무실에 모여앉아 협박 거리나 만들고 있는 우리 임원진들을 위해 제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회장님 저희는…….”
“입 다물고 내 말만 들어.”
한껏 힘이 실린 현성의 음성이 빠르게 승재의 말을 막았다.
“그럼 선물 개봉 전에 내가 간단하게 몇 마디만 하지.”
순식간에 현성의 눈동자 가득 살기가 들어찼다.
“네까짓 것들이 감히 내 아들을 건드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 건지 직접 겪어봐. 내 아들을 협박 거리로 삼은 걸 뼛속 깊이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현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검찰입니다!”
*
승재의 구속으로 회사 전체가 소란스럽던 그때.
하준은 지훈과 함께 현성 호텔 스위트룸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현성이 지시했던 현성 호텔의 작년과 올해 매출 자료와 수익 비교 자료들이었다.
왜 갑자기 매출 자료가 필요하다고 하셨을까. 혹시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현성에게는 그저 아들을 회사 밖으로 내보낼 구실이었던 이 지시가 하준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었다.
하준은 현성의 의도를 알아내려 글자 하나, 숫자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고 있었다.
“저. 부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 비서가 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네. 말씀하세요.”
“본사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이승재 전무님과 몇몇 임원진 분들이 지금 검찰로 연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네? 검찰이요?”
얼마나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준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박 비서님. 차 대기시키세요. 지금 바로 출발합니다.”
다급하게 소파에 걸쳐둔 재킷을 챙겨 드는데.
“그럴 필요 없어.”
태연한 지훈의 목소리가 하준의 걸음을 붙잡았다.
“무슨 뜻이야? 갈 필요가 없다니?”
지금쯤이면 다 마무리되었겠지. 지훈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승재 전무 구속. 큰아버지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야.”
“뭐라고?”
“알고 봤더니 이 전무가 진성으로부터 돈을 받고 브랜드 론칭 프로젝트에 자리를 마련해 준 거였더라고. 그걸 어쩌다 큰아버지가 알게 되셨고.”
지훈은 승재가 하준을 빌미 삼아 거래를 요구해왔다는 말은 전하지 않았다.
“이 전무가 너한테는 처음부터 호의적이지 않았잖아. 그래서 검찰에 연행될 때 너랑 마주치면 네가 고발한 거라고 이 전무가 오해할까 봐 나한테 같이 나가 있으라고 지시하셨어.”
“아. 회장님께서…….”
할 말을 잃은 하준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