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맞닿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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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맞닿은 손
2023.01.31.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승재와 임원들을 태운 차량을 바라보던 현성은 곧바로 회장실로 향했다.
“마케팅팀 이수아 사원 좀 지금 내 방으로 오라고 하게.”
“네. 전달하겠습니다.”
김 비서가 회장실을 나가고,
“괜히 부탁했다가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소파에 기대앉은 현성의 얼굴에 걱정이 비쳤다.
사실 현성이 수아를 부른 이유는 하준이가 현철과 만났다는 말을 듣고 난 후부터 시작된 혜선의 걱정 때문이었다.
많이 놀랐을 텐데 어디 가서 내색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을 아들에 대한 걱정.
혜선은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겠냐며 하준을 불러 따뜻한 저녁 한 끼를 먹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오란다고 순순히 올 녀석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으니.
결국 두 사람은 수아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핑계로 하준을 본가로 불러들일 계획을 세웠다.
지난번 식당으로 허둥지둥 달려온 걸 보면 아들 녀석은 수아의 말이라면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시를 내리고 몇 분 후. 노크 소리와 함께 김 비서가 들어왔다.
“회장님. 이수아 사원이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게.”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수아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수아 양. 어서 와요.”
그녀의 등장에 현성은 활짝 웃으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아,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식당에서는 아버님이라는 말이 쉽게 나왔었는데, 장소 탓인지 본능적으로 회장님 호칭이 나왔다.
“난 그 말 별로인데.”
“네?”
“회장님이라는 그 호칭.”
현성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하준이한테 질리도록 듣고 있는 말이라 수아 양한테는 지난번 호칭으로 불리고 싶은데 말이에요.”
지난번 호칭이라면 아버님을 말씀하시는 거겠지.
“아무래도 회사에서는 다른 사람들 시선도 있고, 괜히 소문이라도 나면 저보다는 하준 씨가 힘들어질 것 같아서요.”
거절의 의미였으니 말하는 수아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그럼 지금은 우리 둘뿐이니 괜찮겠네요.”
긴장한 듯 굳어 있는 수아를 향해 현성이 싱긋 웃었다.
하긴 그래. 어차피 누가 보는 사람도 없고, 나도 회장님보다는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더 좋으니까.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어떻게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말을 놓겠어요.”
“하준 씨 아버님이신데 당연히 편하게 하셔야죠. 아니면 제가 마음이 불편해요.”
“그럼. 그럴까?”
“네.”
현성과 수아는 마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저. 그런데 혹시 무슨 일 때문에 부르신 건지.”
현성의 지시로 외부 일정이 잡혔다고 했으니 하준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그가 없는 사이 자신만 따로 부른 이유가 궁금했다.
“아니 그냥. 우리 하준이랑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그 녀석이 워낙 무뚝뚝해서 수아 양이 많이 힘들 거야.”
처음부터 식사 초대 이야기를 꺼내면 부담스러울 거란 생각에 현성은 준비한 말을 아꼈다.
“네. 저희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하준 씨가 항상 다정하게 대해줘서 힘든 점도 없고요.”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유혹의 손길을 뻗어 와서 힘들죠.
“그럼 다행인데.”
말끝을 늘이던 현성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워낙 마음속 상처가 깊은 아이라 늘 안쓰럽고 조심스럽거든.”
아. 현성의 말을 이해한 수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아 양. 우리 하준이 더 이상은 상처받는 일 없도록 잘 좀 부탁해.”
“네. 그럼요. 제가 잘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자신 있게 대답하는데.
[어차피 조만간 또 보게 될 텐데. 첫 만남은 이쯤으로도 괜찮겠지.]
순간 현철의 마지막 말이 수아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또다시 찾아와 그날처럼 아무렇지 않게 하준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것이 분명했다.
현성이라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다시는 하준을 찾아오지 못하도록 막아줄 수 있지 않을까.
“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결심이 선 수아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사실은 하준 씨의 친아버지라는 분이 찾아오셨었어요.”
“김현철이 찾아왔었다고?”
현성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수아를 바라봤다.
“아니. 친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혹시 그자가 제 입으로 그 말을 꺼내던가?”
굳어진 현성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네. 그분이 그러시기도 했고, 저는 하준 씨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어요.”
하준이가 친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우리 아들이 수아 양을 많이 의지하고 있나 보네. 과거 이야기는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녀석인데.”
현성은 하준의 의외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아들에게 그만큼 의지할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그나저나 하준이는 괜찮았고? 많이 힘들어하지는 않았어?”
현성은 직접 보지 못해 짐작할 수밖에 없었던 그 날 하준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많이 무서워했어요. 몸을 얼마나 떨던지 하준 씨한테 친아버지는 마주 볼 수조차 없는 두려운 존재인 것 같았어요.”
하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마주쳤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20년 전 하준과 현철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기에 현성은 지금 하준이 느낄 고통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아버님.”
수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분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래. 원하는 바가 있을 테니 조만간 다시 찾아오겠지.”
그가 원하는 것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분이 하준 씨를 다시 찾아오지 못하도록 아버님께서 막아주실 수 있으세요?”
언젠가는 친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질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상태를 보면 그때가 지금이 아님은 확실했다.
그가 두려움에서 벗어나 친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그때까지 친아버지의 접근을 막아줄 힘이 필요했다.
“당연하지. 그건 내가 해결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 감사합니다. 아버님.”
“감사하긴. 내가 더 고맙지.”
제 아들을 위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는 사실에 현성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나저나 하준이랑 언제 집에 와서 저녁이나 함께했으면 좋겠는데. 하준이 엄마도 내심 기다리는 눈치라서 말이야.”
수아의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말을 꺼내는데.
“저녁이요?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말 나온 김에 오늘 저녁에 찾아뵙는 건 어떨까요?”
“오늘 저녁?”
바라던 대답이긴 했지만 당장 오늘이라니. 놀란 현성이 눈을 동그랗게 키우고는 되물었다.
“네. 하준 씨한테는 제가 이야기할게요.”
“그, 그럴까 그럼?”
너무 갑작스러웠나? 슬쩍 살핀 현성의 표정은 반가움보다는 놀라움에 가까웠다.
“오늘은 너무 갑작스러우시죠? 다른 날로 정해볼까요?”
수아가 급히 말을 거두려는데.
“아니야. 오늘 괜찮아. 우리가 이렇게 수아 양 덕을 보네.”
들썩이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며 현성이 말했다.
“덕이라뇨. 하준 씨가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아버님 어머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데요.”
“당최 표현을 해야 말이지.”
“제가 조금씩 연습시켜볼게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네. 신경 써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그럼 이따가 저녁에 뵐게요. 아버님.”
“아. 수아 양.”
다급한 현성의 목소리가 멀어지던 수아의 걸음을 붙잡았다.
“이걸 깜빡했네.”
현성이 내민 것은 자신의 명함이었다.
“하준이 친아버지가 다시 찾아왔을 때 나한테 연락하려면 번호는 알고 있어야지.”
아. 그렇네.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자신의 명함도 내밀었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명함이랍니다.”
그렇게 서로의 명함을 주고받은 뒤 수아는 싱긋 웃으며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수아의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한 현성은 서둘러 혜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녁에 하준이랑 수아 양이 저녁 먹으러 집으로 오겠다는데 괜찮겠어요?”
[오늘 저녁이요?]
목소리에서 혜선의 놀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힘들까요? 힘들면 다음으로 미룰게요.”
수아에겐 이미 괜찮다고 하긴 했지만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혜선의 몫이었기에 현성은 슬쩍 말을 던지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소리예요. 지금부터 얼른 아주머니랑 준비해야겠네요. 이왕이면 당신도 빨리 와서 돕든지요. 어머.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네. 끊어요.]
“네. 지금 바로 들어…….”
말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으이구. 그렇게 좋을까.”
현성은 어두워진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
“하준 씨. 오늘 회사에 엄청난 사건 터진 거 알고 있어요?”
퇴근 후 하준의 자동차에 올라탄 수아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검찰이 왔었다면서요.”
“알고 있었어요? 하긴. 그렇게 큰 사건을 부회장님이 모를 리가 없겠지.”
덤덤한 하준의 반응에 수아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축 처졌다.
“왜요? 제가 모르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어떻게 하긴요. 그때의 상황을 아주 세밀하고 스펙터클하게 설명해 주려고 했죠.”
“그럼 세밀하고 스펙터클하게 얘기해줘 봐요. 어차피 검찰이 왔다는 보고만 받았지 정확한 상황은 못 들었으니까요.”
“정말요?”
축 처져 있던 그녀의 눈썹이 다시 활기를 되찾고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수아는 들이닥친 검찰과 승재,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직원들의 표정까지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준은 자동차를 출발시키지 않은 채 수아의 말에 집중했다.
어느덧 이야기가 막바지에 이르던 그때.
꼬르륵. 느닷없이 뱃속을 울리는 소리에 수아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났다.
“수아 씨 배고팠구나. 우리 나머지 이야기는 밥 먹으면서 하는 게 어때요?”
하준이 발그레 달아오른 수아의 볼을 어루만졌다.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어제오늘 기다렸다는 듯이 답하는 수아의 모습에 맛집 리스트라도 적어놓은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오늘은 어떤 맛집으로 데려가 주실 건가요?”
고개를 기울인 하준의 입술 사이로 미소가 흘렀다.
“음. 어머님 집밥이요.”
“가게 이름이 어머님 집밥입니까?”
수아와 함께 갔던 가게 이름이 언니네 분식, 엄마네 곱창이었으니 어머님 집밥을 식당 이름이라고 착각할 만도 했다.
엉뚱한 하준의 질문에 수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요. 하준 씨 어머님 집밥 말이에요.”
“네? 사모님 댁이요?”
하준이 입가에 흐르던 미소를 빠르게 거둬냈다.
“왜요? 가기 싫어요?”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아마 사모님께서도 많이 놀라실 것 같은데.”
“어머님 아버님께는 미리 간다고 말씀드렸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미리 말씀을 드렸다고요? 어떻게요?”
수아가 현성과 혜선의 연락처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미리 말씀을 드렸다는 그녀의 말이 의아했다.
“하준 씨 없는 사이에 아버님을 뵈었거든요.”
“회장님을요?”
“네. 회사에 일이 있어 잠깐 들리셨다면서 회장실로 저를 부르셨어요.”
“아…….”
이승재 전무 일 때문에 나오셨겠구나. 하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생활은 할 만한지. 하준 씨랑은 잘 지내는지. 그런 대화들을 나누다가 우연히 식사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바로 약속을 잡아버렸죠.”
“아. 그, 그랬구나.”
“나 잘했죠? 이참에 어머님 집밥도 먹어보고, 저녁도 해결하고 일석이조잖아요.”
수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어쩐지 거만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녀의 지금 표정만으로도 웃음이 터졌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미 약속을 정해버렸다니 가긴 가야겠지만 긴장으로 표정이 굳어지는 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네. 잘했습니다.”
맘에도 없는 말을 애써 건네고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내 손 잡아 봐요.”
불쑥 수아의 왼손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응? 그녀가 내민 손의 의미를 궁금해하면서도 하준은 말없이 수아의 손을 잡았다.
“긴장하지 말라고요.”
수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를 팀장님이라고 생각해요.”
지훈이 없는 식사 자리는 어색하다던 하준의 말을 기억하고 건넨 말이었다.
“내가 이렇게 계속 손잡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맞닿은 손을 통해 수아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하준의 몸이 따스한 햇살을 만난 눈송이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하준은 이내 행복하게 웃으며 시동을 걸고 페달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