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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위험한 질주 (89/105)


89. 위험한 질주
2023.02.04.



 
지수는 집까지 들이닥친 사람들로 인해 엉망이 된 거실에 앉아 양주 한 병을 비워내고 있었다.


“아빠. 아빠.”

눈앞에서 멀어져 가던 아빠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라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한 병을 모두 마시고도 부족했는지 지수는 술을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빈속에 독한 양주를 들이부어서일까. 눈앞이 어질거렸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반쯤 주저앉은 지수의 팔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한 변호사님.”

진성 그룹 법무팀 한승우 변호사였다.

언제나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진성과 지수였기에 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승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뒤처리를 해왔다.


“도대체 얼마나 마셨기에 몸을 못 가눠.”

“한 변호사님.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우리 아빠 금방 나올 수 있는 거 맞죠?”

바짝 다가선 지수가 승우의 양복 옷깃을 움켜쥐며 물었다.


“그게…… 쉽지 않을 것 같아.”

승우의 깊은 한숨에 지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지금으로써는 제출된 증거들이 워낙 확실한 것들이라 뭐라 장담할 수가 없어.”

“…….”

“그래도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승우가 지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거예요?”

지수의 물음에 승우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 망설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정보에 의하면 현성 그룹인 것 같아.”

“현성이라고요?”

“그래.”

“도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래요? 내 소환장도 아직 해결이 안 됐는데 이제는 아빠까지.”

곁에 없는 진성이 떠올라 울컥 울음이 솟구쳤다.


“회장님을 찾아가 볼까요? 빌고 사정하면 어떻게든 해 줄지도 모르잖아요.”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자존심 세울 여유 따윈 없었다.


“글쎄. 현성에서 갑자기 왜 이러는지에 대한 정보조차 없으니 무작정 찾아간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아.”

“그럼 어떻게 해요. 대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예요. 제발 알려줘요. 제발.”

지수는 자신의 두 손에 얼굴을 묻고는 절절하게 호소했다.


“일단 돌아가는 상황 보고 다시 연락해 줄 테니까 오늘은 좀 쉬어. 네 소환장에 대해서도 술 깨면 다시 이야기하자.”

지수는 얕은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승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버님. 저희 5분 정도 후면 도착할 것 같아요. 네. 조금 있다가 뵐게요.”

아버님이라는 호칭에 하준이 눈을 키웠다.


“지금 회장님께 전화드린 겁니까?”

수아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물음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곧장 말을 이었다.


“아버님과 저는 명함까지 주고받은 사이라고요.”

때마침 신호에 걸려 자동차가 멈춰 섰고, 하준은 수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칭도 그렇고 어느새 명함까지. 너무 자연스러운데.”

말끝을 늘이더니.


“연습의 결과일까. 경험의 결과일까.”

의심의 눈초리로 하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연습의 결과죠. 그러니까 하준 씨도 부단히 연습해 봐요. 20년이 지나도록 회장님, 사모님은 좀 너무하잖아요.”

“그게 성격 탓인지 쉽지가 않습니다.”

어쩐지 시무룩한 하준의 말투에 수아는 잡고 있던 그의 오른손을 토닥였다.


“지금 당장 억지로 하라는 건 아니에요. 다만 하준 씨가 어머니 아버지라고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는 건 잊지 말아요.”

“여러 사람들이라니. 회장님 사모님 외에 또 있습니까?”

“당연하죠. 저랑 지훈 팀장님. 그리고 시우 씨도 있잖아요.”

언젠가 그날이 올 거라 믿어요.

붙잡은 수아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조금씩 노력해볼게요.”

“아이 착하다. 누구 남자친구인데 이렇게 말을 잘 들을까.”

수아가 상체를 기울여 하준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잠시 후 하준의 차는 현성의 집이 있는 골목에 들어섰다.


“어? 저기 어머님, 아버님 밖에 나와 계신 것 같은데요?”

애정이 가득한 두 사람의 모습은 멀리에서도 눈에 띄었다.

하준은 차를 세운 뒤 조수석 문을 열었다.


“여보 하준이 좀 봐요. 저런 매너가 있는 줄 몰랐네요.”

조수석 문을 여는 하준의 모습이 신기한지 혜선이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가 알던 그 무뚝뚝한 하준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네요.”

속삭이는 혜선과 현성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어머님. 아버님. 쌀쌀한데 왜 나와 계세요.”

어느새 다가온 수아가 현성과 혜선에게 말했다.


“더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러지. 저녁 식사 준비 다 됐어. 어서 올라가자.”

현성의 말에 다 같이 걸음을 옮기던 그때.

하준의 시선이 현성의 뒷모습에 닿았다.


‘오늘 일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하준은 지훈을 시켜 자신을 보호해 준 현성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자꾸 연습을 해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어쩐지 지금이 아니면 이 말을 꺼낼 수 없을 것 같아 하준은 망설이던 입술을 열었다.


“회장님.”

“응? 왜?”

들려온 하준의 목소리에 현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바로 해야 할 정도로 급한 이야기인가?

현성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보. 수아 양이랑 먼저 들어가 있어요. 나는 하준이랑 잠깐 얘기 좀 하고 들어갈게요.”

“국 식으니까 너무 오래 있지는 말아요.”

“알겠어요.”

현성과 하준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무슨 얘기를 하려나. 혹시 수아 양은 알고 있어요?”

마당을 가로지르던 혜선이 수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마 오늘 회사에서 일어난 일 때문일 거예요.”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네. 오늘 회사에서.”

이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던 바로 그때.

끼이이이익 쾅!


“안 돼!!”

고막이 찢어질 듯 거친 파열음과 함께 누군가의 처절한 절규가 현관 너머에서 들려왔다.

*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어느새 지수는 현성의 집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지수는 운전석에 앉아 마침 현관 앞에 나와 있던 현성과 혜선을 응시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무작정 빌어야 하나? 아니면 김하준 이야기로 협박이라도 해볼까?

지수는 입술 안쪽을 피가 맺힐 정도로 세게 짓씹었다.


‘나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검찰에 끌려간 진성이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고, 자신도 언제 검찰에 끌려갈지 모르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현성을 설득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래. 애원이 되었든 협박이 되었든 일단은 뭐라도 해보자.’

결심을 굳히고 문손잡이를 잡던 지수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현성의 집 앞에 멈춰 선 낯익은 자동차 한 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준 오빠?”

지수의 예상대로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하준이었다.

지수는 움직임을 멈춘 채 하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서둘러 보닛을 돌아 조수석 문을 여는 모습까지도.

하지만 이내 조수석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수아의 모습에 지수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지금 지옥을 걷고 있는데. 너희들은 지금 웃음이 나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데. 감히…….

지수는 순간적으로 차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핸들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이내 지수는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있는 힘껏 엑셀을 밟았다.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자동차는 빠르게 골목을 질주했다.


“할 말이 뭔데? 집에 들어가서 하면 안 되는 얘기야?”

“아니. 다름이 아니라.”

감사합니다. 그 한 마디가 뭐 이리 어려운 건지 입술을 달싹이던 하준의 시선이 골목 끝에 닿았다.

저녁이라 어떤 자동차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동차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준의 시선이 자동차와 현성의 얼굴을 오갔다.

망설임 없이 현성을 옆으로 밀어낸 하준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지수의 자동차 보닛과 앞 유리에 부딪혔다.

허공에 떠오른 하준의 몸이 차가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끼이이이익.

강한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지수의 자동차가 멈췄고, 지수는 핸들에 얼굴을 묻은 채로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안 돼!!”

창밖에서 들려오는 현성의 절규에 지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엑셀을 밟았지만 하준이 자신의 자동차에 부딪히는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여전히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들을 부여잡은 지수는 차마 백미러를 쳐다보지 못한 채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하준아. 하준아.”

현성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해버렸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 어떤 생각조차 떠올릴 수가 없었다.

현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하준의 상태를 살폈다.

아들에게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현성의 손을 적시고 바닥을 적셨다.


“하준아! 정신 차려봐. 하준아!”

“……아, 아버…… 지.”

너무 놀라 귀가 어떻게 된 걸까.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아…… 버…….”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려는 듯 하준의 입술이 달싹이는데.


“하준 씨!”

“현성 씨!”

문밖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에 놀라 재빨리 뛰어나온 혜선과 수아가 현성을 향해 달려왔다.


“꺄악!”

힘없이 누워 있는 사람이 하준이라는 것을 알아챈 수아가 비명을 질렀다.


“빨리 119! 119!”

다급한 현성의 목소리에 수아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119 버튼을 눌렀다.


“하준아. 정신 차려봐. 아빠 보이니? 정신 잃으면 안 돼.”

현성은 간절한 목소리로 흐려져 가는 하준의 의식을 붙잡으려 애썼다.

1초가 10년과도 같았던 시간이 흐르고 구급차가 도착했다.

구급 대원들은 하준의 맥박과 호흡을 확인하고, 목 보호대를 사용하여 목을 고정하고는 서둘러 구급차에 태웠다.

하준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술실로 옮겨졌다.

남겨진 세 사람은 한참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는 수술실 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한 기다림을 이어갔다.

아버지.

현성의 귓가에 아들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정신을 잃어가던 아들은 분명 아버지라고 했다.

20년 동안 그토록 기다리던 말이었는데.

오랜 기다림 끝에 들려온 그 말은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어쩐지 그게 아들의 마지막 인사인 것 같아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뱉어낸 것 같아 현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써 외면했다.


‘하준아. 아빠 아직 못 들었어. 네가 하려고 했던 말, 아빠는 아직 못 들었으니까 아직은 가면 안 돼. 알겠지? 응?’

현성은 자신의 목소리가 하준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수술실의 문이 열리고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현성과 혜선 그리고 수아는 빠르게 의사를 향해 다가갔다.


“선생님. 우리 하준이는요? 하준이는 괜찮은가요?”

“뇌에 출혈이 있었는데 다행히 잘 잡혔고, 나머지 부분도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의사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온몸에 힘이 풀린 수아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VIP 병실로 옮겨진 하준을 바라보고 있던 수아가 현성과 혜선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준 씨 옆엔 제가 있을게요.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어머님 아버님께서는 집에서 좀 쉬고 오세요.”

“하준이가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편히 쉬겠어요. 우리가 하준이 곁에 있을 테니…….”

“그럼 오늘은 수아 양이 하준이 곁을 좀 지켜주겠어? 우리는 집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 좀 챙겨서 내일 올 테니.”

수아를 보내려던 혜선의 말을 현성이 막았다.


“네. 아버님. 제가 잘 보살피고 있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현성이 혜선의 어깨에 손을 올려 살며시 이끌자 혜선은 미간을 좁히며 현성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하준이 옆에 있을래요. 있고 싶어요.”

“일단은 나갑시다. 나가서 이야기해요.”

병실 문을 나서자마자 현성이 말했다.


“나도 당연히 하준이 옆에 있고 싶어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뇨?”

“당신은 하준이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야 하고, 나는 누가 이런 사고를 일으키고 도망갔는지 알아봐야죠.”

“그래도…….”

“당신 하준이 옆에 있으면 지금처럼 이렇게 눈물만 흘릴 텐데 하준이는 그런 당신 모습 원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오늘은 집에 가서 마음 좀 추스르고 내일 다시 옵시다.”

잠시 망설이던 혜선은 이내 현성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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