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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용서하지 않을 거야 (90/105)


90. 용서하지 않을 거야
2023.02.07.



“내, 내가 하준 오빠를.”

지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을 넘어지면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힘겹게 거실 소파에 주저앉은 지수의 몸은 두려움에 휩싸여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내가 하준 오빠를. 그럴 리가 없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하다가.


“미쳤어. 김지수.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분노하다가.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꿈. 악몽이라고!”

또다시 현실을 부정했다.

지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열장에 있던 양주 한 병을 꺼내 들었다.

온몸을 휘감는 두려움을 애써 잊어보려 지수는 다급하게 목구멍 뒤로 술을 넘겼다.

*

고요한 VIP 병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일어나 제 이름을 불러줄 것 같은데 하준은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수아는 하준의 곁에 앉아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크고 작은 상처들은 그를 발견하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힘없이 바닥에 누워 있던 당신을 본 순간.

숨은 쉬는지, 심장은 뛰는지 떨리는 손으로 확인하던 순간.

그 순간순간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는지 당신은 알까.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울음에 내뱉는 목소리 끝이 떨렸다.


“병원에 오게 하는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약속했잖아.”

눈동자 가득 고인 눈물에 그의 얼굴이 흐릿해지더니.


“흐윽.”

결국 참았던 울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약속 어긴 거 용서해 줄 테니까 빨리 일어나 줘요. 제발.”

혹시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수아는 제 목소리가 그가 돌아오는 길을 밝혀줄 빛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



“회장님. 차량번호 조회 결과가 나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현성은 하준의 블랙박스를 통해 차량의 번호를 알아냈고, 경찰에 차량번호 조회를 요청한 상태였다.


“차량 소유주가 김지수라고 되어 있다고 합니다.”

“김지수?”

“네. 김진성 회장의 딸 김지수 양입니다.”

역시나. 진성 그룹이나 이승재와 관련된 사람일 거라는 현성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아버지가 검찰에 연행된 것에 대한 복수였겠지.

아들을 지키고자 했던 행동에 아들이 다치게 될 줄이야.

하아. 굳어진 현성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경찰에서 지금 김지수 양의 행방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상황 계속 주시하고 체포되는 대로 보고하도록 해.”

“네.”

김 비서가 현성의 서재를 빠져나가자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혜선이 서재로 들어왔다.


“범인이 누군지 알아냈어요?”

“네. 차량번호 조회 결과가 나왔다고 하네요.”

“설마 우리가 아는 사람이에요?”

낮게 가라앉은 현성의 목소리에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지수라고 하네요.”

“네?”

말도 안 된다며 눈을 키우는 혜선에게 현성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김 회장과 이 전무가 검찰에 구속되었으며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에 대해.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나를 노렸던 것 같은데 하준이가 나 대신…….”

아들을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에 현성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웅크린 그의 어깨가 한없이 작아 보였다.


“자책하지 말아요. 결과가 이렇게 된 건 안타깝지만 당신의 행동이 하준이를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걸 아니까.”

어느새 다가온 혜선이 현성을 품에 안았다.


“당신 말처럼 하준이는 이렇게 아파할 우리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다른 생각은 말고 하준이만 생각하기로 해요.”

혜선이 건넨 위로의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진 현성은 그녀의 품에 좀 더 깊이 고개를 묻었다.

*

다음 날 아침.

혜선과 현성은 아침 일찍 하준의 병실을 찾았다.


“아버님, 어머님 오셨어요?”

하준의 손을 붙잡은 채 잠이 들었던 수아가 두 사람의 인기척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혜선이 들고 온 가방을 내려놓고는 수아에게 다가왔다.


“저쪽에 보호자 침대도 따로 있는데 왜 여기에서 불편하게 자고 있어요.”

“이렇게 옆에 있어야 마음이 놓여서요.”

그의 작은 움직임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기에 잠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의사 선생님께서 보고 가셨는데 검사 결과는 다 정상이라고, 이제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 금방 깨어날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현성이 무거운 입꼬리를 끌어올려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버님. 혹시 경찰에서는 연락이 왔나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수아가 물었다.


“응. 체포되었다고 보고받았어.”

“정말요? 누구예요? 도대체 왜 그런 거래요?”

“차량을 조회해봤더니 지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더라고.”

“……!”

김지수가 벌인 짓이라고? 충격으로 벌어진 수아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지금 조사하고 있다니까 왜 그랬는지는 아마도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저…… 아버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뒤 수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김지수를 만나볼 수는 없을까요?”

“지수를?”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지금이 아니면 못 할 것 같아서요.”

“그래? 일단 한번 알아보고 바로 알려주마.”

두 사람이 대학교 동창이라고 했던가.

지난번 창고 일에 하준이 사고까지.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겠지.

현성은 어쩐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더 이상은 묻지 않은 채 수아의 부탁을 수락했다.

잠시 후. 현성과 혜선 그리고 수아가 소파에 앉아 하준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하준아!”

“형!”

숨을 헐떡이며 지훈과 시우가 병실로 들어섰다.

어제 하준과 수아가 본가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는 혜선의 연락에 예비 며느리와 즐거운 시간 보내라며 지훈의 집으로 자리를 피해준 시우였다.

그렇게 지훈의 집에서 출근 준비를 하던 중에 현성의 연락을 받고 정신없이 병원을 찾아온 것이었다.

다급한 걸음으로 침대까지 다가온 지훈이 고개를 획 돌리며 현성을 바라봤다.


“왜 어제 연락 안 주셨어요.”

원망이 담긴 표정이었다.

하루가 지나서야 하준의 사고 소식을 듣게 된 것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어제는 나도 혜선 씨도 정신이 없었어. 그리고 여기에서 잘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괜히 걱정하느라 잠 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은 우리 세 사람으로 족해.”

“아무리 그래도 연락은 주셨어야죠.”

생각해 보니 지훈과 시우가 서운해하는 것도 이해가 가 현성은 빠르게 잘못을 인정했다.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다. 미안하다. 미안해.”

현성의 사과에 지훈은 구겨졌던 미간을 펴고 하준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하. 김지수. 이런 짓까지 벌일 줄이야.”

주먹을 쥔 지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어떻게든 구속영장이 나오도록 했어야 했어. 그랬다면 이번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었겠지.”

지훈은 사고를 막지 못한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소환장으로 결정한 건 검찰이지 팀장님이 아니잖아요. 팀장님 잘못이 아니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수아가 지훈을 위로했다.


“창고 사건 때도 생각은 했지만 그 김지수라는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요.”

“그러게. 이런 일까지 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시우의 말에 지훈이 말을 보탰다.


“그나저나 빨리 깨어나야 할 텐데. 걱정이네.”

지훈이 무거운 한숨을 쉬는 사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병실을 나갔던 현성이 돌아왔다.


“수아 양. 너무 길게는 안 될 것 같고 잠깐은 가능할 것 같다는데. 잠깐이라도 괜찮겠어?”

지수를 만나고 싶다던 부탁에 대한 대답이었다.


“네. 잠깐이라도 괜찮아요.”

“그럼 차 내줄 테니까 지금 갔다 와. 내가 얘기는 해놨으니까 가면 안내해 줄 거야.”

“네. 그럼 하준 씨 깨어나기 전에 서둘러서 다녀올게요.”

수아가 가방을 챙겨 나가려는데.


“어딜 다녀온다는 거예요?”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지훈이 물었다.


“아. 지수한테 잠깐 다녀오려고요.”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런 인간이랑 대화해봤자 화만 더 날 텐데.”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무서운 일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지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저도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한 번쯤은 만나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물론 수아도 알고 있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걸.

그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은 만나야 했다.

사랑에 도망쳤던 나를 패자 취급하던 너에게 인생의 패자는 내가 아니라 너라고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었다.


“뭐. 그래. 그렇게 해서 네 맘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해. 그럼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나랑 같이 가자.”

“그래. 그러면 되겠네. 지훈이 네가 같이 갔다가 다시 병원으로 데려다주면 되겠다.”

현성이 지훈의 말을 반겼다.


“네.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아버님. 어머님. 다녀오겠습니다.”

시우는 출근을 위해. 지훈과 수아는 지수를 만나기 위해 세 사람은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

어둠이 내려앉은 조사실.

천장에 매달린 전등 하나가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왜 그랬니?”

무거운 적막을 먼저 깬 것은 수아였다.


“하준 씨한테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이러고도 네가 하준 씨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이수아 너 때문!”

“나 때문이라고?”

지수의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 수아는 대꾸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게 내가 떠나라고 할 때 떠났으면 좋았잖아.”

“…….”

“네가 그때 하준 오빠를 떠났다면 너랑 오빠가 같이 웃고 있는 얼굴을 내가 보지 않았을 테고, 보지 않았다면 빡쳐서 엑셀을 밟는 일 따위 없었을 거 아니야!”

“고작 그 이유 때문이었어?”

위험한 질주의 이유가 고작 웃음 때문이라니. 밀려드는 분노에 악문 어금니가 부르르 떨렸다.


“고작? 지금 고작이라고 했어?”

지수가 눈을 사납게 치뜨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지금 지옥 속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를 이렇게 만든 너희는 그렇게 웃고 있다는 게 말이 돼?”

“너는 여전히 남의 탓만 하고 있구나.”

거칠게 날뛰는 속과 달리 나오는 수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지옥을 만든 게 우리라고? 아니. 잘 생각해 봐. 진짜 너희 가족을 지옥 속으로 떠민 게 누군지.”

“지금 뭐라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네가 말한 그 지옥. 너도 너희 아빠도 스스로 걸어 들어간 거잖아!”

“닥쳐! 너만 가만히 있었으면. 너만 얌전히 하준 오빠를 떠났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지수는 계속 언성을 높였다.


“너야말로 닥치고 내 말 잘 들어. 네 아버지 횡령 배임? 애초에 이중장부까지 만들면서 횡령을 일삼았던 게 누구야? 바로 네 아버지야. 그리고 창고에서 나를 죽이려고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하준 씨까지 저렇게 만든 게 누구야? 바로 너잖아. 아니야?”

“…….”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는지 지수는 입술만 달싹일 뿐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김지수. 내가 너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하. 네까짓 게 용서 못 하겠다면 어쩔 건데?”

“이번 하준 씨 사고에 대한 건 물론이고 지난번 창고 일에 대한 증인까지 이미 확보했어.”

수아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주변을 얼려버릴 듯 시린 한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김지수!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살인 교사에 살인미수. 벌써부터 기대되네.”

수아는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뱉어냈고 더는 들을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웃기지 마! 나 진성 그룹 외동딸 김지수야! 내가 이렇게 쉽게 당할 것 같아?”

수아는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질러대는 지수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시선을 맞췄다.


“어디 한번 해봐. 진성이라는 썩은 동아줄이 얼마나 버텨줄지 나도 궁금하네.”

“이수아. 두고 봐. 여기에서 나가면 내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래. 네가 언제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대할게.”

수아는 한쪽 입꼬리를 밀어 올려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조사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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