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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끊어지지 않는 악연 (91/105)


91. 끊어지지 않는 악연
2023.02.11.


하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선이 갑자기 가방을 챙겨 들었다.


“어디 가려고요?”

소파에 앉아 있던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잠깐 집에 좀 다녀오려고요.”

“집에는 왜요? 뭐 두고 온 거라도 있어요?”

현성은 두고 온 것이 있다면 제가 다녀올 생각으로 물었다.


“생각해보니까 하루 사이에 수아 양 얼굴이 수척해진 것 같아서요. 집에 가서 먹을 거라도 좀 챙겨오려고요.”

“아. 거기까진 나도 생각을 못 했네요. 하준이가 깨어나더라도 걱정하지 않게 잘 먹이고 잘 쉬게 해야겠어요.”

혜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병실 문을 향하자 현성이 그 뒤를 따랐다.


“당신은 왜요?”

“당신 데려다주려고요.”

“그러면 하준이 혼자 있게 되잖아요. 나는 괜찮으니까 하준이 옆에 있어 줘요.”

“그럼 엘리베이터 앞까지만 데려다줄게요.”

“진짜 괜찮은데.”

“이러고 있을 시간에 벌써 데려다주고 왔겠네요. 어서 가요. 어서.”

현성과 혜선은 병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두 사람이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반대편 복도에서 기다렸다는 듯 현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하준이 사고를 당하던 순간 현철도 그곳에 있었다.

하준을 아들로 키우고 있다는 승재의 말에 뭐라도 하나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찾아간 현성의 집이었다.

무슨 우연인지 때마침 집 앞에 나와 있는 현성과 혜선을 보았고, 20년 전 그 사람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대로 조금만 상황을 지켜보다 다가갈 생각이었는데.

차에서 내린 하준의 모습에 현철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현성과 혜선을 향한 하준의 미소 때문이었다.

어릴 때도, 얼마 전 마주쳤을 때도 자신을 보는 하준의 얼굴에는 공포와 경멸의 감정만이 존재했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김하준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던 순간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도, 처리도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현철은 하준을 싣고 가는 구급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20년 동안 떠올려본 적 없는 아들의 존재.

그런데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상하게도 밤새 하준의 사고 장면이 떠오르며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저 얼마나 다친 건지, 지금 상태는 어떤지만이라도 직접 봐야 이 울렁거리는 머릿속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구급 대원을 향해 한국병원으로 가달라던 현성의 말을 떠올리며 병원을 찾아온 것이었다.

현철은 잠깐 얼굴만 보고 나오려는 생각으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병실 안쪽으로 다가가니 침대에 누워 있는 하준의 모습이 보였다.

하준은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힘겨운 호흡을 이어가고 있었고, 사고로 인한 크고 작은 상처들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하준과의 거리를 좁혀가던 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배웅 나갔던 현성이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란 현철이 병실 문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하준에게 다가오던 현성과 눈이 마주쳤다.


“다, 당신!”

현성은 단번에 현철을 알아봤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아비가 아들 보러 온 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 않나?”

들썩이는 속을 애써 내리누르며 현철은 태연하게 말했다.

아비라고? 순간 현성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지금 아버지라고 말한 겁니까?”

“왜? 민하준으로 성을 바꾸었다고 내 아들을 당신 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럼 당신이 하준이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당연하지. 그걸 당신이 모르지는 않을 텐데?”

현성은 현철의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히고 치가 떨렸다.


“가지 말라고 붙잡던 어린아이를 버리고 가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 아버지라고? 대체 양심이란 게 있기는 한 겁니까?”

“양심? 그딴 거 버린 지 오래야. 양심은 돈이 안 되거든. 대신 부회장이 된 아들은 돈이 되지.”

현철이 한쪽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웃음을 흘려보냈다.

순간 현성의 시선이 하준을 향했다.

혹시나 깨어나 현철이 뱉어낸 말들을 듣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준의 눈은 아직도 감긴 채였다.

현성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호흡이 들쑥날쑥 엉망이었지만 숨을 고르며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자그마치 20년입니다. 당신이 정말 아버지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그 긴 세월 동안 한 번이라도 아들을 찾아왔어야 하는 겁니다.”

“나 하나 먹고살기도 바쁜데 아들을 찾아 뭐 하게?”

하. 저 당당함에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하준이가 부회장이라니까 이제 와서 돈이라도 얻어내겠다는 겁니까?”

“안 될 건 뭐야? 설마 지를 10년이나 키워준 아버지한테 돈 몇 푼 주는 게 아깝겠어?”

현철이 몸을 돌리더니 하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김하준. 빨리 일어나서 이 아비 편히 살 건물 하나는 줘야 하지 않겠냐? 응? 김하…….”

탁! 하준에게 닿기 전 손목을 낚아챈 현성에 의해 현철의 움직임이 멈췄다.


“내 아들 몸에 손대지 마!”

 

 
현성의 섬뜩하리만큼 날카로운 눈빛과 음성에 현철의 몸이 흠칫 떨렸다.


“하, 하준이가 왜 당신 아들이야? 내 아들이지!”

현철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목에 잔뜩 힘을 주었다.


“분명히 경고했어. 손대지 말라고.”

“싫다면 어쩔 건데?”

현철은 턱을 들어 올리며 비아냥댔다.


“잘 들어. 이대로 병실 밖으로 나가서 다시는 하준이 눈에 띄지 마.”

현철의 손목을 잡고 있는 현성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당신이 원하는 게 돈뿐이라면 그 돈 내가 줄 테니까 하준이한테 당신 모습 절대 보이지 말라는 소리야. 알아들어?”

“나야 뭐 돈만 준다면야. 그래서 언제 주겠다는 건데?”

“기다리고 있어. 혹시라도 먼저 전화하거나 찾아오는 날엔 한 푼도 넘겨주지 않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알아들었으면 하준이 깨기 전에 전화번호나 남겨놓고 빨리 나가!”

“하긴 부회장보다야 돈은 회장이 더 많겠지.”

비열한 웃음을 짓던 현철은 협탁 위 메모지에 휴대폰 번호를 적어놓고는 건들거리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현성은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준아. 하준아.”

현성이 조심스럽게 하준의 손을 잡았다.


“아빠가 너 두 번 버림받게는 안 할 거야.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깨어나서 아빠한테로 와.”

하준을 향한 현성의 부드러운 음성이 고요한 병실을 채웠다.

*



“이야기는 잘 끝낸 거야?”

지수를 만나고 나오는 길.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훈이 다가왔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질러놓고도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을까요.”

이 모든 게 다 내 탓이라니. 지수의 말들을 떠올리던 수아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래서 내가 만날 필요 없다고 했잖아.”

“자라온 가정환경 탓에 그저 이기적인 성격이라고만 생각했지 정말 저 정도까지 일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지훈은 수아의 표정만으로도 안에서 어떤 대화들이 오고 갔을지 짐작이 갔다.


“김지수에게 양심을 기대하지 마. 그럴 가치가 없어.”

“그러게요. 아니라고 하면서도 내심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나 봐요.”

“기대라는 게 사람 마음을 참 힘들게 하지. 내가 하고 싶다고 하게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지훈이 이해한다며 수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요.”

“다행?”

“네. 혹시라도 후회하거나 눈물이라도 보였다면 마음이 불편했을 텐데 오히려 저렇게 나오니까 마음은 편한 것 같아요.”

“그러게. 그건 다행이네.”

지훈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제부터의 일은 경찰이나 검찰에게 맡기고 우리는 하준이만 생각하자.”

“네. 그래야죠.”

지훈과 수아는 혹시나 자리를 비운 사이 하준이 깨어날까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



“누가 찾아왔었다고요?”

전복죽이 담긴 쇼핑백을 내려놓던 혜선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거세게 흔들렸다.


“김현철. 하준이 친부 말이에요.”

“도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래요?”

“그러게. 나도 너무 놀라서 그걸 물어볼 정신이 없었어요.”

“여긴 왜 온 거래요?”

“…….”

말을 망설이는 현성의 모습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해주는 것 같았다. 혜선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설마…….”

“사람이 쉽게 달라지지는 않더라고요.”

혜선은 말끝을 흐렸지만, 그 흐려진 말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성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럼 정말 돈 때문이라는 거예요? 20년 만에 찾아온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라고요?”

하아. 무슨 할 말이 있을까. 현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무거운 한숨을 내뱉는 것밖에 없었다.


“돈 때문에 버리더니, 이제는 돈 때문에 찾아왔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어쩌면 이렇게도 잔인할 수 있는지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렇게 보기만 해도 안쓰럽고 가엾은 아이를 두고 어떻게 그런 생각만 할 수 있는지.”

혜선의 입술 사이로 울음 가득 찬 목소리가 새어 나오던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다녀왔습니다.”

인사하던 수아가 혜선의 눈물을 발견하고는 눈을 키웠다.

왜 우시는 거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혹시 하준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아니. 하준이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속상해서 그러지.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수아의 불안한 시선에 현성이 서둘러 변명하듯 말했다.


“아. 네.”

하긴. 나도 이렇게 속상한데 부모님은 오죽하실까. 애타는 그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수아는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수아 양 아직 식사 못 했지?”

“괜찮아요. 조금 이따가 먹으면 돼요.”

“하준이 엄마가 수아 양 먹인다고 집에서 음식을 좀 가져왔는데. 그렇지 여보?”

“네. 밥보다 죽이 나을 것 같아서 전복죽으로 가져왔어요.”

현성의 물음에 혜선은 애써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하준 씨 때문에 힘드실 텐데 저까지 이렇게 챙기지 않으셔도 돼요.”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수아 양도 챙겨야지. 하준이 깨어나서 걱정하지 않게 든든하게 잘 챙겨 먹어요.”

사랑이 담긴 혜선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려왔다.


“네. 잘 챙겨 먹겠습니다. 이제 제가 하준 씨 곁에 있을게요. 어머님 아버님은 좀 쉬세요.”

“그래. 그럼 우리는 집에 갔다가 내일 다시 오마.”

자신만큼 놀랐을 혜선을 쉬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현성의 마음을 알았는지 혜선도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병실 문 앞에서 배웅을 마친 수아는 다시 하준의 침대로 돌아와 앉았다.

수아의 시선이 하준의 감겨 있는 눈꺼풀에 닿았다.

지금 당신은 어딜 헤매고 있는 걸까.

어둠 속에서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금방 깨어날 거라던 의사의 말이 거짓이었을까.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해봐도 심장을 조여 오는 불안한 생각들에 결국 눈망울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하준 씨. 무슨 잠을 이렇게 오래 자요.”

수아는 하준의 손을 붙잡아 제 얼굴로 끌어왔다.


“이제 그만 일어나 주면 안 돼요? 나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분명 내 목소리를 듣고 있을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만 불안해하는 거 불공평해. 하준 씨도 불안해 봐야지.”

듣고 있다면 어서 일어나라고.


“하루 종일 3박 4일 프로그램만 볼 거고, 산호 오빠 광고 촬영 현장으로 가버릴 거야.”

수아가 맘에도 없는 소리를 쏟아내던 그때.


“……그러기만…… 해요…….”

스치듯 미약한 하준의 음성이 수아의 귓가에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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