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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기다림의 끝 (92/105)


92. 기다림의 끝
2023.02.14.



“……그러기만…… 해요…….”

가늘게 열린 하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소리에 수아의 상체가 총알처럼 튕겨 올랐다.


“아…….”

그토록 기다리던 그의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말문이 막혀 수아는 입술만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수아…… 씨.”

하준이 힘겹게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리고 있던 산소호흡기를 빼내었다.


“깨어난 거예요? 깨어난 거죠? 지금 이거 꿈 아니죠?”

혹시나 너무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라 꿈에서 이루어진 건 아닐까. 믿을 수 없다며 눈만 껌뻑이다가.


“하준 씨!”

더 이상 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아는 상체를 구부려 하준을 껴안았다.


“윽!”

갑작스러운 통증에 하준이 외마디 신음을 뱉어냈다.


“아. 미안해요. 너무 기뻐서 저도 모르게 그만. 많이 아파요? 의사 선생님 불러올까요?”

번뜩 정신을 차린 수아가 서둘러 몸을 떼어냈다.


“……괜찮아요.”

그의 목소리는 탁하게 잠겨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흑. 분명히 의사 선생님은 금방 깨어날 거라고 했는데. 흐윽. 나는 하준 씨가 이대로 못 깨어날까 봐. 흐흑.”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결국 참고 참았던 수아의 눈물이 터져버렸다.


“왜 이제야 깨어나. 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흐아앙.”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미안.”

어린아이 같은 수아의 울음에 하준은 손끝으로 그녀의 눈물을 스윽 닦아주었다.

수아의 울음이 온 병실을 울리던 그 시각 현성과 혜선이 탄 자동차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Rrrr.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 현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현성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가늘게 떨리는 손끝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버님!]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휴대폰 너머에서 한껏 들뜬 수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버님! 하준 씨 깨어났어요. 지금 방금 깨어났어요.]

“뭐라고? 하준이가 깨어났다고?”

옆에 앉아 있던 혜선이 고개를 획 돌리며 현성을 바라봤다.


“어. 그래 알았다. 지금 바로 가마.”

현성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


“지금 당장 한국병원으로 돌아가지.”

현성의 말에 기사는 급히 차를 돌려 한국병원으로 향했다.


 

*



“하준아!”

현성과 혜선은 침대에 기대앉아 있는 하준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하준아. 아빠야. 아빠 알아보겠어?”

“아…….”

걱정스러운 현성의 눈빛에 뭔가를 말하려는 듯 하준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음성을 뱉어내지는 못했다.

순간 현성의 시선이 수아를 향했다.


“혹시 말을 못 하는…….”

“……아버……지.”

고장 난 기계처럼 현성의 시선이 천천히 하준을 향했다.


“지금 뭐, 뭐라고.”

“아……버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하준이 정신을 잃기 전 힘겹게 뱉어냈던 그 말이 정말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어머니.”

“흐읍.”

혜선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막으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20년 만이었다.

그들도 사람일진대, 이 말이 왜 듣고 싶지 않았겠는가.

왜 재촉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묵묵히 20년을 기다렸던 건 그 단어가 아들의 마음속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맘껏 어리광 한 번 부려보지 못하고 떠나보낸 어머니와 돈 때문에 자신을 매정하게 버리고 떠나버린 아버지.

하준에게는 고통스러운 단어라는 걸 알기에 그저 스스로 마음을 열고 말해주기만을 기다렸을 뿐이었다.

말을 꺼낸 사람도 말을 들은 사람도 모두 놀라 병실 안에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너무 오래 걸려서 죄송합니다.”

침묵을 깬 하준의 시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니야 죄송할 거 없어. 오히려 고마운걸. 너무 놀라서 그래. 놀라서.”

시무룩한 아들의 모습에 현성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혜선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우리 아들 힘들었겠다.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드러운 손길로 하준을 품에 안은 혜선이 천천히 그의 등을 토닥였다.

토닥이는 손길 때문이었을까.

따뜻한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하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어머니…….”

그렇게 그들은 완전한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어서 들어가 봐. 하준이 기다리겠다.”

좀 전과는 확연히 다른 표정의 현성과 혜선을 배웅한 뒤 수아는 곧장 병실로 돌아왔다.

하준은 어느새 일어나 창가에 서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수아가 병실에 들어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수아의 시야에 힘 없이 처져 있는 하준의 어깨가 들어왔고, 창문에 비친 그의 표정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일까. 분명 모두가 기다리던 일이었으니 당연히 그도 기뻐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수아는 발소리를 죽인 채 하준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살포시 감싸 안았다.


“잘한 거예요. 아주 잘한 거예요.”

“정말 잘한 걸까요?”

하준의 목소리에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어머니께서 서운하다 하시지 않을까요?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어머니라고 부른 아들이 혹시나 밉지는 않을까요?”

수아는 그제야 왜 그렇게 슬픈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니께 해드린 것도 없는데. 어머니라는 말까지 다른 사람에게 줘버려서 이제 당신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슬퍼하시면 어떻게 하죠.”

사모님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어질 때마다 자신에게 늘 던져왔던 물음이었다.

사모님을 어머니라고 불러도 될까.

그리도 아끼셨던 아들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는 생각에 홀로 속상해하고 계시는 건 아닐까.

서운함과 속상함에 하늘에서조차 편히 쉬지 못하고 계시는 건 아닐까.

그렇게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을 반복하며 지내온 세월이 20년이었다.

애써 담담한 척 뱉어낸 하준의 말에 수아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아니요. 하늘에 계시는 어머님께서도 분명 잘했다고 하실 거예요.”

수아의 따뜻한 음성이 하준의 등을 타고 울렸다.


“그게 하준 씨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내린 결정이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왜냐하면…….”

말끝을 늘인 수아가 하준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하늘에서도 언제나 하준 씨가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계실 테니까요.”

하준의 눈동자가 요란히 흔들렸고, 그 움직임을 따라 눈가에 맺힌 그의 눈물도 함께 일렁였다.

수아는 다시 하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그의 가슴팍에 기댔다.


“20년 동안의 마음고생으로도 충분하니 더는 아파하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아마 이렇게 말해주고 싶으실 거예요.”

결국 맺혔던 눈물이 하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으로 애써 눈물을 막아보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아.”

눈물을 쏟은 탓인지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질해지면서 하준의 몸이 휘청였다.

움직임에 놀란 수아가 빠르게 몸을 떼어내고는 터질 듯 큰 눈으로 하준을 바라봤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어지러워요?”

“아니. 괜찮아요.”

“괜찮기는요. 빨리 침대에 누워요. 의사 선생님께서 절대 안정 취하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빨리요. 빨리.”

수아의 재촉에 하준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이제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푹 쉬어요. 부딪힌 머리도 문제지만 갈비뼈에도 금이 가서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하준은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는 수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옆에서 토닥여주면 더 빨리 잠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잘못하다가 부딪히면 어떻게 하려고요.”

“지금은 이렇게 붕대도 감겨 있어서 부딪혀도 아프지 않을 겁니다. 괜찮아요.”

하준이 환자복 사이로 보이는 붕대를 가리켰다.


“아으.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수아는 어쩐지 싫지 않은 표정으로 하준의 옆에 누웠다.


“자. 이제 옆에 누웠으니까 어서 자요.”

“네.”

대답과 함께 눈을 감는 듯하더니, 이내 그의 입술이 열렸다.


“몸이 차에 부딪히면서 허공에 붕 떴는데, 순간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천히 하준의 눈꺼풀이 밀려 올라갔다.


“그 순간 갑자기 후회되는 일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원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친다는 데 하준 씨는 아니었나 보네요.”

“그러게요. 이상하게도 저는 그랬습니다.”

하준이 곧장 말을 덧붙였다.


“가장 후회되는 일이 부모님께 어머니 아버지라고 불러드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자마자 불러드렸던 거예요?”

“네.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잘 생각한 거예요. 어머님, 아버님 좋아하시는 거 봤죠?”

“그러게요. 조금 더 빨리해드릴 걸 그랬어요.”

하준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더 빨리 더 늦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하준 씨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거죠.”

아. 예쁜 입술에서 예쁜 말만 나오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하준이 고개를 살며시 기울이더니 수아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맞대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수아 씨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몸으로 직접 보여주고 싶은데…….”

차라리 팔이나 다리가 다쳤다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갈비뼈는 정말이지 움직일 때마다 찌릿거리는 게 아무래도 오늘은 무리인 듯싶었다.


“뭐, 뭘 몸으로 보여줘요. 그런 거 안 보여줘도 되니까 어서 잠이나 자요.”

수아가 얼굴을 붉히며 하준의 눈 위에 손을 올렸다.


“혹시 잠들 때까지 이대로 옆에 있어 줄 겁니까?”

정말 잠이 쏟아지고 있었던 걸까. 하준의 말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럼요. 하준 씨 잠들 때까지 옆에 꼭 붙어 있을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요.”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쌕쌕 일정한 숨소리를 내며 하준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아침.


“하준이가 드디어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다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침에 눈 뜨자마자 달려왔다는 거 아니겠어.”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지훈과 시우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20년 만에 부른 소감이 어때? 죽다 살아나더니 이제야 철이 좀 들었나 보다?”

“철은 원래 들어 있었거든?”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하준과 지훈의 모습을 보며 시우는 피식 웃었다.


“엄마, 아빠가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 오죽하면 다시 안 불러줄지도 모른다고 녹음하고 싶다고까지 하셨다니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했다. 그동안 못 불러드렸던 것까지 합쳐서 자주자주 불러드려.”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해. 그런 잔소리나 하려거든 출근이나 하지? 이미 지각인 것 같은데.”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럼 이따가 또 들를 테니까 몸조리 잘하고 있어.”

시우와 지훈이 병실 문을 향해 발끝을 돌리자 수아도 그들을 따라나섰다.


“저 두 사람 배웅하면서 1층 카페 좀 다녀올게요.”

“카페는 왜요? 커피는 여기에도 있는데.”

“어쩐지 오늘은 엄청 달달한 게 마시고 싶어서요.”

“그래요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요.”

소란스럽던 사람들이 떠나고 병실 안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허공을 바라보던 하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침대를 벗어났다.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 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치열한 삶을 살아오던 그에게 이런 고요함은 익숙하지 않았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갈비뼈의 통증을 참아가며 수아를 맞이할 요량으로 하준은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 문을 막 나서려는데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하준의 걸음을 붙잡았다.

어린 남자아이가 자신의 병실 앞 의자에 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모습 위로 20년 전 병원에 버려졌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부모님은?”

아이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하준을 바라봤다.


“아빠는 회사에 가셨고, 엄마는 병원비 내러 가셨어요.”

하아. 다행이다. 부모님이 곁에 계시는구나.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여기서 울고 있어.”

“엄마 오시면 치료받으러 가야 하는데 가기 싫어서요. 매일 아프기만 하잖아요.”

다시 걱정이 밀려오는지 아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도 너처럼 울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불현듯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하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저씨도 저처럼 매일매일 울었어요?”

“아니. 나는 별로 울지 않았는데.”

“거짓말. 아픈데 어떻게 울지 않을 수가 있어요.”

“나는 아픈 걸 잊게 해주는 비밀 주문을 알고 있었거든.”

“비밀 주문이요?”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키우며 되물었다.


“알려줄까?”

“네. 네. 알려주세요.”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로로 격하게 끄덕였다.


“그럼 손 이리 줘봐.”

하준은 아이의 손바닥 위에 천천히 동그라미를 그렸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이렇게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는 거야. 그러면 진짜 괜찮아져. 울고 싶을 때마다 해봐.”

수아가 자신에게 그랬듯 아이에게도 힘든 시간을 이겨낼 힘이 되어주길. 작은 바람이 담긴 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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