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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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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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첫사랑
2023.02.18.
“주문하신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 나왔습니다.”
커피를 받아들고 카페를 나온 수아가 피식 웃었다.
“이게 먹고 싶은 걸 보면 긴장이 풀리긴 한 모양이네.”
수아는 좋아진 기분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실을 향하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주 앉은 아이의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주문을 말하고 있는 하준의 모습.
‘내가 저 주문을 언제 알려줬더라.’
기억을 더듬거리다 한국병원에서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병원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했는데. 그래도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네.’
수아는 천천히 하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민호야!”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하준과 함께 앉아 있던 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하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엄마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사라져갔다.
“지난번 병원에서 알려준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요.”
수아는 물끄러미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준의 옆자리에 다가와 앉았다.
“사실 이 주문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훨씬 전이라고요?”
이건 내가 첫사랑 오빠를 위해서 만든 주문이라 그가 들었을 리가 없는데.
“훨씬 전 언제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카롭게 묻는 수아의 표정에 하준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20년 전이었습니다.”
20년? 지난번에도 20년 타령을 하더니. 2년도 아니고 왜 하필 20년이야?
“워낙 오래전 일이니까 자세히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표정에 드러난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하준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20년 전 이곳에서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10살짜리 남자아이가 있었습니다.”
20년 전. 이곳 병원. 10살 남자아이.
“비상계단!”
번뜩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수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알아요. 매일같이 비상계단에 쪼그려 앉아서 울고 있던 오빠. 그럼 그때 그 오빠가 바로…….”
“네. 그 오빠가 바로 저였습니다.”
헐. 어떻게 이런 일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수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럼 하준 씨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비밀 주문을 알려주었던 여자아이가 저였다는 걸?”
“처음부터는 아니고 병원에서 만났던 날 알게 됐죠.”
당신이 알려준 비밀 주문 덕분에.
“그럼 그때라도 말해줬어야죠. 그런 걸 왜 숨겨요?”
수아는 다그치듯 물으며 둥글게 쥔 주먹으로 하준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윽!”
어깨에서 시작된 진동은 순식간에 갈비뼈까지 닿으며 엄청난 고통을 가져왔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하준의 상체가 반사적으로 구부러졌다.
“어머! 하준 씨.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 의사 선생님 모셔올까요?”
수아는 쉽사리 그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한 채로 발을 동동거리며 질문들을 쏟아냈다.
“괜찮아요. 침대에 누워서 조금만 쉬면 될 것 같은데 좀 도와줄래요?”
하준은 여전히 찌릿거리는 통증에 눈썹을 움찔거리면서도 그녀의 죄책감을 덜어주려 도움을 요청했다.
“진짜 미안해요.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가 있지? 저 진짜 바보인가 봐요.”
침대에 기대앉은 하준을 바라보던 수아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축 처졌다.
“아픈 걸 빨리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런 게 있어요? 그게 뭔데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수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알잖아요. 비밀의 주문.”
하준이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침대 옆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행동의 의미를 눈치챈 수아가 눈을 흘겼다.
“벌써 다 나은 거 아니에요?”
“아닌데. 아직도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픈데. 이걸 어떻게 보여줘야 하나.”
하준은 갈비뼈 부근을 움켜쥐며 미간을 좁혔다.
“아니기만 해봐.”
수아는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자 그럼 비밀의 주문으로 부탁합니다.”
하준이 수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던 수아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벌써 20년이나 지난 일인데 어떻게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잊어버릴 수가 없죠. 수아 씨의 비밀 주문이 아니었다면 지옥 같았던 병원생활을 버텨낼 수 없었을 테니까요.”
“제 비밀 주문이 그렇게 강력한 줄 몰랐네요.”
수아는 입술을 둥글게 모으며 감탄의 소리를 냈다.
“글쎄요. 그게 비밀 주문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좀…….”
말끝을 흐리는 하준의 모습에 수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예뻤거든요.”
반짝이던 눈망울과 위로해주던 목소리와 해맑던 미소와 보드랍던 손과 따뜻했던 마음이.
“어머 10살짜리 남자아이가 보는 눈이 높았네요.”
“보는 눈은 지금도 높습니다.”
“흠. 그 말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수아는 두 손으로 턱받침을 하고서는 부지런히 열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는 그렇다고 치고 수아 씨야말로 어떻게 기억합니까? 그걸 알려준 사람이 저뿐만은 아닐 텐데.”
“제 첫사랑이거든요.”
어쩐지 부끄러워 수아는 말끝에 입술을 말아 물고는 시선을 돌렸다.
“비상계단에서 울던 오빠가 어찌나 잘생겼던지 첫눈에 반해버렸다니까요.”
떠오른 그 날의 기억에 수아의 입술이 예쁘게 휘면서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오빠랑 결혼할 거라고 부모님을 얼마나 졸라댔는지 몰라요.”
그때는 그렇게 졸라대면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러다 말없이 퇴원해버려서 몇 날 며칠을 울고불고. 아마 저희 부모님은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걸요?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진상이었거든요.”
어우. 말도 마요. 수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원에서도 오빠 데려오라고, 오빠 사는데 알려달라고 얼마나 난리를 피웠는지 한동안은 병원 봉사활동도 못 갔어요.”
아름다웠던 첫사랑 이야기의 끝이 병원 출입 금지라니.
풉 소리와 함께 하준의 입에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러고 보니 우린 같은 점이 있었네요.”
“같은 점이요?”
“서로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는 거.”
나직한 그의 목소리는 봄 햇살이 담겨 있는 것처럼 따뜻했다.
아. 당신도 내가 첫사랑이었구나. 그렇게 헤어졌어도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던 거구나.
우리는 운명이었구나.
밀려드는 설렘에 심장이 저릿했다.
*
수아와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중 병실 문이 열리며 박 비서가 들어왔다.
“부회장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괜히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아닙니다. 번거롭기는요. 그런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긴 합니다.”
박 비서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뭉치에 닿았다.
“하준 씨 혹시 지금 병원에서 일을 하겠다는 거예요?”
대체 연락은 언제 주고받은 건지. 수아가 미간을 좁혔다.
“이건 지금 꼭 결재를 해야 하는 서류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수아는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많이 화났나 보네. 눈도 안 마주치고 나갔어.’
하준은 잔소리보다 침묵이 더 무섭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하아.”
병실을 나선 수아는 로비 의자로 향했다.
지금은 쉬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차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어쩐지 그 서류들이 그가 앉아 있는 부회장이라는 직책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그 무게감 때문에 맘껏 쉬지도 아파하지도 못하는 하준이 안쓰러운데, 그 마음이 혹시라도 표정에 드러날까 급히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걱정한다는 걸 알면 그는 나보다 더 걱정할 테니까.
*
“김지수 사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결재를 서두르던 하준이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
“일단 이번 사고에 대해서는 현행범으로 구속된 부분이라 혐의가 인정되었지만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어 수사가 지연되고 있는 듯합니다.”
“수집한 증거는 모두 제출한 겁니까? 증인은요?”
“증거는 모두 제출하였고 증인으로 출석한 김동우 대리의 진술도 확보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신경 쓰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할 테니 너무 자세히는 말하지 말라던 지훈의 말이 떠올라 마지막 말이 망설여졌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박 비서의 말이 이어지지 않자 하준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죄명이나 형량 부분에서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진성 그룹 쪽 검사들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마음은 그러했으나 눈치 못 챌 하준이 아니었기에 박 비서는 숨김없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 가만히 두 손 놓고 두고 볼 사람들이 아니죠.”
하아. 하준이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사건에 대한 진행은 지훈이가 알아서 하겠지만 진행 사항에 대한 보고는 필요합니다. 저도 알고는 있어야 하니까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준은 다시 시선을 내려 결재서류를 살폈고 드디어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마쳤다.
“수고하셨습니다.”
펜을 정리하던 하준의 시선이 병실 문을 향했다.
“이수아 씨 불러드릴까요?”
“아니요.”
“그럼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눈치 빠른 박 비서가 문을 열어 병실 앞을 살피고는 다시 하준에게로 돌아왔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따로 지시하실 사항이 있으신 겁니까?”
“급히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하준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죽이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종이를 박 비서에게 내밀었다.
“김현철이라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겁니까?”
종이를 펼쳐 내용을 살피던 박 비서가 물었다.
“네. 그 사람의 연락처와 지금 살고 있는 주소가 필요합니다. 적혀 있는 생년월일과 그전에 살았던 주소를 참고하시면 좀 더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됩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대한 서둘러 찾아보고 보고드리겠습니다.”
박 비서가 병실을 나선 뒤 하준은 잠깐 바람을 쐬고 오겠다는 쪽지를 남겨놓고 병원 옥상 정원으로 올라왔다.
먼 곳을 응시하는 하준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실 하준은 완전히 깨어나기 전 가끔 한 번씩 정신이 돌아온 순간들이 있었다.
엉망으로 잘린 기억의 조각들은 얼기설기 맞춰진 듯했지만 들려오던 사람들의 목소리만은 선명했다.
외면하고 싶은 친아버지의 목소리까지도.
[양심은 돈이 안 되거든. 부회장이 된 아들은 돈이 되지.]
[아버지한테 돈 몇 푼 주는 게 아깝겠어?]
[내 아들 하준이 몸에 손대지 마!]
[원하는 게 돈뿐이라면 그 돈 내가 줄 테니까.]
역시나 그랬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친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돈 때문이었다.
비참했다.
이제야 겨우 온전한 민하준으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철은 그 모든 것들을 2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목구멍이 울음으로 꽉 막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왜 나를 낳았냐고.
왜 나를 그토록 미워했냐고.
왜 나를 버렸냐고.
왜 나를 찾지 않았냐고.
왜 나를 다시 찾아왔냐고.
그렇게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원망의 말들이 둑이 터지듯 막을 새도 없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