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두려움에 떨릴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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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두려움에 떨릴지라도
2023.02.21.
“하준 씨!”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하준은 고여 있던 눈물을 빠르게 닦아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이렇게 나와 있어요.”
서둘러 다가온 수아가 하준의 옆에 앉았다.
“아. 잠깐 바람만 쐬고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 병실이 조금 답답해서.”
“…….”
“정말이에요. 정말 금방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
“오늘은 뭔데요?”
생각지 못한 수아의 물음에 하준의 눈이 커졌다.
“여기 올라온 이유 말이에요. 뭔가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올라오는 곳이잖아요.”
“오늘은 그냥 좀 갑갑해서 올라온 겁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쉬어본 적이 없어서.”
숨기는 게 있는 탓에 가슴이 뜨끔했지만 하준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행동했다.
“아무 일도 안 했다니. 그럼 좀 전에 박 비서님과 한 일은 일이 아니고 뭐였을까요?”
나오는 말속에 가시가 박혀 있는 듯 심장을 콕콕 찔러댔다.
“저한테 그 정도 일은 일도 아닌 거 수아 씨도 알잖아요.”
“제가요? 누가 그래요? 제가 안다고?”
난 모르는 일이라며 수아는 연신 입술을 삐죽거렸다.
“몸을 바쁘게 움직여야 다른 생각을 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걱정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다른 생각이라. 시무룩한 그의 표정에 오히려 생각이 많아진 건 수아였다.
그래. 갑자기 나타난 친아버지에 갑작스러운 병원 치료까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걱정들로 생각이 많아졌겠지.
바쁜 당신의 업무가 그 생각들을 잊게 해줄 수 있을까.
그럼 당신의 하루가 조금은 수월해질 수 있을까.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문득.
“많이 힘들면 출근하면서 통원치료 가능한지 의사 선생님께 여쭤볼까요?”
그것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원장님은 안 된다고 하실 겁니다.”
“제가 한번 졸라볼게요. 병원에 있는 게 죽을 만큼 힘들다고 징징대면 듣기 싫어서라도 허락해 주시지 않겠어요?”
수아가 자신감을 드러내며 방긋 웃었다.
“수아 씨…….”
뿌옇게 흐려진 그의 말속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지 그의 표정만으로도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고마워할 거 없어요. 하준 씨를 위한 일이 아니라 순전히 나를 위한 일이니까요.”
“…….”
“힘들어하는 하준 씨보다 그걸 보고 있는 내가 더 힘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거니까.”
“…….”
어느새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는 그의 눈망울이 고맙다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대신 출근해서도 절대 무리하지 말고 책상에 앉아서 결재만 하는 거예요. 약속할 수 있어요?”
“네. 그럼요. 약속할게요. 결재랑 회의만.”
수아의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항목 하나를 끼워 넣었다.
참나. 내가 모를 것 같아서?
피식 웃던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의미였다.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하준은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었다.
퇴원이 결정된 순간부터 가장 바빠진 것은 수아였다.
담당의 선생님을 만나 조심해야 할 사항과 지켜야 할 사항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고,
절대 안 된다는 현성과 혜선에게 자신이 잘 감시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설득도 해야 했다.
그런 수아의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준은 평소엔 부르지도 않던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퇴원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혜선이 챙겨준 저녁을 먹고 퇴원을 하니 밖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짐 정리할 동안 하준 씨는 소파에 앉아서 쉬고 있어요.”
“같이 해요.”
“그 손으로 무슨 정리를 해요.”
수아는 붕대가 감긴 하준의 손을 가리켰다.
“부러진 것도 아니고, 인대 조금 다친 걸로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괜찮아요.”
“갈비뼈는요. 살짝 금 간 정도라도 갈비뼈는 움직이지 않고 푹 쉬어야 금방 낫는 거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결국 하준은 그녀의 고집을 이겨내지 못하고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총총. 총총. 조그마한 몸이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지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햄스터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어느새 정리를 끝냈는지 수아는 하준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왔다.
“내일부터 출근하려면 빨리 자야죠.”
“그러게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줄 몰랐네요.”
“혼자 씻을 수 있겠어요?”
“아니요.”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농담이에요. 농담. 뭘 그렇게까지 놀랍니까? 설마 씻겨달라고 할까 봐요?”
하준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로 도와줘야 하는 줄 알고 놀랐잖아요.”
“어? 그 말은 도와줄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아니거든요? 장난 그만하고 빨리 씻고 나와요.”
놀리는 말투에 수아는 미간을 구기며 눈을 흘겼다.
“알았어요. 지금 들어가잖아요.”
“방수커버 벗겨지지 않게 조심하고, 넘어지거나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고요.”
욕실 문이 닫힐 때까지 수아의 잔소리는 이어졌다.
잠시 후. 한참 동안 들리던 물소리가 멈추고 샤워를 끝낸 하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 와서 앉아 봐요.”
수아의 부름에 하준은 쪼르르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머리는 내가 말려줄게요.”
수아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수건을 들고 앉아 있는 하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섰다.
수건을 하준의 머리 위에 얹고 조심스럽게 물기를 닦아내려는데.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머리를 말려줄 수가 없잖아요.”
따갑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는 그의 눈빛에 수아의 시선이 길을 잃고 허공을 헤맸다.
“아.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을 보고 있는 중인데.”
안전한 곳? 그게 무슨 말이냐며 눈을 키우는데.
“시선이 더 내려가도 괜찮겠어요? 저는 괜찮은데. 아무래도 수아 씨가…….”
삐져나오는 웃음을 감추려 하준이 입술을 말아 무는 사이
그의 말을 곱씹던 수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냥 얼굴 봐요. 얼굴이 좋겠어요.”
수아는 화들짝 놀라며 아래로 향하려던 그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머리는 뒤에서 말리는 게 서로가 민망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친 하준과 수아는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부회장님. 좀 더 병원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박 비서가 하준의 움직임을 살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많이 좋아져서 괜찮습니다.”
천천히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수아는 할 말이 있다는 듯 수행기사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부회장님 갈비뼈가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라서요. 브레이크나 엑셀 같은 거에 조금 더 신경 써주세요. 방지 턱 같은 건 더더욱 이요.”
“네. 알겠습니다.”
대화가 끝나자 수아는 몸을 움직여 좌석에 등을 기댔다.
“어때요? 생각보다 엄청 꼼꼼하죠?”
어깨를 으쓱이며 환하게 웃는 수아의 모습에
“아니요. 생각만큼 엄청 꼼꼼하네요.”
하준의 입가에 핑크빛 미소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하준의 차는 수아의 부탁 때문인지 다행히 큰 움직임 없이 회사에 도착했다.
부회장실에 도착한 하준과 수아를 책상 위 한가득 쌓여 있는 결재서류들이 반겼다.
멍하니 책상 위를 바라보던 수아가 고개를 치켜들며 하준을 바라봤다.
“우리 약속한 거 잊지 않았죠? 무리하면 안 되고, 외부 일정은 더더욱 안돼요. 불시에 찾아와서 확인할 거예요.”
응? 불시에, 라니?
“우리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요? 저 감시한다면서요.”
“같이 있기는요. 저도 출근했는데 일해야죠. 누구 덕분에 최근 결근이 너무 잦아서 잘리기 일보 직전이라고요.”
“누가 감히 수아 씨를 자릅니까? 인사권은 수아 씨 애인한테 있다는 거 잊었습니까?”
“인사권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갓 입사한 파릇파릇한 새싹 사원이라는 게 문제죠.”
“그러니까 그게 왜 문제가 된다는 겁니까.”
그래. 정말 몰라서 묻는 말인 걸 안다.
새싹 사원이 갑자기 며칠 동안을 결근한다는 게 얼마나 눈치가 보이고 마음이 불편한 일인지.
일반 사원을 거치지 않은 그가 알 리가 없었다.
“아무튼 부회장님은 모르는 사원들끼리의 문제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준 씨는 우리 약속이나 잊지 말아요.”
수아가 허공에서 손을 저어 보이며 그의 말을 막았다.
부회장실을 나가려 손잡이를 잡던 수아가 고개를 획 돌렸다.
“불시에 올 거예요. 만약 그때 자리에 없으면 바로 병원으로 끌고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경고의 메시지를 날리는 수아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수아가 부회장실을 빠져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박 비서가 들어왔다.
“알아보라던 건 어떻게 됐습니까?”
박 비서가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그분의 연락처입니다. 집 주소는 이곳으로 되어 있는데 자주 집을 비우는 것 같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가보세요.”
“네.”
하준은 누가 볼까 서둘러 종이를 안쪽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고는 곧장 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잠깐 내 방으로 좀 와.]
[왜? 무슨 일 있어?]
[일단 와. 와서 이야기해. 보여줄 것도 있고.]
[알겠어. 지금 갈게.]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지훈이 들어왔다.
“몸은 좀 괜찮아?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고 큰아버지 큰어머니 걱정이 한가득이시던데.”
현성과 혜선의 핑계를 댔지만 사실 지훈도 그의 건강이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있는 게 더 힘들 거라는 수아의 말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모두 합심해서 말렸을 일이었다.
그렇게 걱정이 담긴 말을 건네며 지훈은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이제 괜찮아.”
대답과 함께 하준도 소파에 다가와 앉았다.
“그래도 쉬엄쉬엄해. 큰아버지, 큰어머니 걱정 많이 하셔.”
“그래. 고맙다.”
하준이 옅게 웃었다.
“그나저나 나는 왜 부른 거야?”
“이거 확인해보라고.”
하준이 손에 들린 결재판을 지훈에게 내밀었다.
“NK 백화점 파주지점 프로모션?”
내용을 확인한 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마케팅팀 직원들이랑 거기 좀 다녀왔으면 해서.”
“여긴 왜?”
“오늘 NK 백화점 파주지점에서 이번 우리 백화점이랑 동시에 입점한 신규 브랜드 프로모션을 진행한다고 하더라고. 가서 보고 오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하준은 자신이 내민 종이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뭐 한번 보고 오는 것도 나쁘진 않지.”
“다른 백화점 프로모션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니까 수아 씨나 시우한테도 도움이 많이 될 거야.”
“그렇긴 하겠네.”
“그래. 그럼 지금 준비해서 다 같이 다녀와.”
어쩐지 빨리 나가라 재촉하는 듯한 하준의 말투에 지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 혹시 우리 다른데 보내놓고 딴짓하려는 거 아니지?”
지훈이 툭 던진 말에 하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딴짓은 무슨! 내가 딴짓할 게 뭐가 있다고.”
“아니면 아닌 거지 발끈하기는. 그럼 직원들 준비되는 대로 바로 출발한다. 갔다 와서 보고할게.”
“어.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지훈이 부회장실을 나감과 동시에 하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의 인기척에 박 비서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회장님. 뭐 시키실 일이라도.”
“마케팅팀 직원들 NK 백화점으로 출발하는 것 확인하시고, 모두 출발하면 저한테 알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달을 마친 하준은 창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이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아마도 오늘 하기로 마음먹은 행동이 그의 심장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