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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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제발
2023.02.25.
“하아.”
창밖을 바라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데, 띵동 소리와 함께 하준의 휴대폰 액정에 불빛이 들어왔다.
[하준 씨. 저 오늘 외근 있어서 잠깐 나가요. 저 없다고 다른데 가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죠?]
[네. 그럼요.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요.]
[저 이제 출발해요. 다녀올게요. 이따 또 연락해요.]
수아의 마지막 문자가 도착함과 동시에 부회장실의 문이 열렸다.
“부회장님 마케팅팀 직원들 모두 출발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하준은 무거운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 사람의 연락처.
하준은 깊이 찔러 넣었던 종이를 꺼내놓고는 적혀 있는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직 전화를 건 것도 아닌데, 그의 번호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거칠게 날뛰었다.
숫자를 누르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고, 결국 통화 버튼 위에서 하준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쿵쿵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장이 날뛰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후우. 괜찮아. 괜찮아.”
하준은 길고 느리게 호흡을 삼키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망설임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들려왔고, 이내 휴대폰 너머에서 탁하게 갈라진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
하준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이던 사이 현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회장님이신가?”
현성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현철이었기에 서둘러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다.
“……민하준입니다.”
“누구라고? 김하준?”
“아니요. 민하준입니다.”
“민하준 좋아하시네. 그건 그렇고 넌 언제 깨어난 거냐?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고?”
내가 언제 깨어났는지 정말 궁금하긴 한 걸까.
“잠깐 만났으면 합니다.”
하준은 대답 대신 곧장 용건을 전했다.
현철에게 장소를 전하고 통화를 끝낸 하준은 옷걸이에 걸어둔 재킷을 챙겨 들고 부회장실을 나섰다.
“부회장님. 어디 가십니까?”
박 비서가 물었다.
그의 몸 상태로 인해 모든 외부 일정이 취소되었기에 묻는 질문이었다.
“잠시 외출합니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따라나서려 재킷을 챙기는 박 비서의 모습에 하준은 손을 들어 보이며 그를 제지했다.
“아니요. 개인적인 일입니다.”
응? 그럼 혼자 외출을 하겠다는 건가.
“부회장님. 혹시 급하신 일이 아니라면 외출 일정을 조정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말하는 박 비서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라도 저 찾는 연락이 오면 잠깐 다른 팀에 갔다고 전해주시고요.”
“그렇지만…….”
“다녀오겠습니다.”
하준은 괜찮다는 의미의 짤막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회장님께서 외출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그에게 닿지 못한 박 비서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한숨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준은 아직 운전을 하기에는 무리인 것 같아 회사를 빠져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
하준이 이 식당을 선택한 이유는 수아보다 먼저 회사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보호받을 수 있는 구조인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대기업 간부나 고위직 공무원들이 비밀리에 만남을 가져야 할 때 이용한다고 알려진 식당이었다.
“후우.”
무거운 호흡을 내뱉은 뒤 하준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예약된 방으로 들어섰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미리 도착해 있던 현철이 하준을 반겼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현성 그룹 부회장님 아니신가?”
현철은 술이 가득 담긴 술잔을 들어 단숨에 털어 넣고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하준은 천천히 그의 맞은편으로 다가가 앉았다.
현철의 시선이 하준의 위아래를 훑었다.
“김하준이 민하준 되더니 아주 신수가 훤해졌네?”
“…….”
“사람을 불렀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하준의 태도에 현철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왜 찾아온 겁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하준이 꺼낸 첫마디였다.
20년 만에 만났어도 현철의 안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목적을 두 귀로 확실하게 들어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를 반가워하지는 못할망정. 쯧쯧.”
현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아버지?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아버지라는 단어에 하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김하준의 아버지는 이미 20년 전에 죽었습니다.”
“죽어? 누가 죽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누구 맘대로 죽여?”
“당신이 나를 병원에 버리고 갔던 그 날. 내 아버지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아들이었던 김하준도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 말하면서도 하준의 목소리와 눈빛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너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하. 이제 와 20년 전 이야기라니.
“어렸을 때도 딱 지금 같은 눈빛이었지. 나를 경멸하는 듯한 눈빛.”
하준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인상을 구겼지만 현철은 그의 표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내가 네 아버진데! 넌 나를 항상 그렇게 쳐다봤다고! 안 그래? 이 건방진 새끼야!”
분노로 가득 찬 현철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피차 떠올려서 좋을 것 없는 과거 이야기는 그만하시고 찾아온 목적이나 말씀하시죠.”
그를 만나기 전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막상 그를 마주하고 보니 온몸을 휘감던 떨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분노에 찬 현철의 음성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들었으니 하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큼이나 익숙한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뭐 목적이라기보다 요즘 내가 생활이 좀 어려워져서 말이야. 그래도 아들이 명색이 현성 그룹의 부회장이라는데.”
역시 그거였구나.
예상한 일이었는데도 직접 들어 확인하니 심장이 땅으로 꺼지고 이내 머리까지 욱신거렸다.
“내가 당신에게 돈을 줄 거라는 기대감으로 찾아온 거라면 잘못 찾아온 겁니다. 당신에게 줄 돈 따위는 없으니까요.”
하준은 담담했다. 아니 담담한 척했다.
입술 안쪽 여린 점막에 피가 맺힐 정도로 깨물고 있으면서도 그는 태연한 척 상처받지 않은 척하려고 애썼다.
“하!”
현철은 그런 하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 네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했어. 너같이 인정머리 없는 자식이 나한테 쉽게 돈을 줄 리가 없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는 있었는데. 아쉽네.”
더 이상 현철을 마주 보기가 힘들었던지 하준의 시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가 이내 다시 올라왔다.
현철이 던진 말 한마디 때문에.
“그럼 나는 회장님한테나 가봐야겠다.”
“……!”
그가 말하는 회장님이 현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준의 눈동자는 거세게 흔들렸다.
“회장님이라고?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아버지를 만나?”
“아버지라니! 그놈이 왜 네 아버지야? 네 아버지는 나라고 나! 김현철!”
현철은 사납게 인상을 구기며 곧장 말을 이었다.
“게다가 자격? 무슨 자격이 더 필요해? 허락도 없이 남의 아들 데려다 키웠으면 당연히 보상을 해줘야지.”
“보상? 지금 보상이라고 했습니까?”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하준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그래 보상. 왜? 뭐가 잘못됐어?”
“어떻게 보상이라는 말을 꺼낼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친아버지도 거두기 싫어 버리고 간 나를 내버리지 않고 거둬줬잖아. 이만큼 길러줬잖아.”
내보이지 않으려 숨겨두었던 슬픔이 다시 차올랐다.
“난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감사한데. 이렇게 죄스러운데. 어떻게 보상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왜 자꾸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겁니까. 도대체 왜!”
밀려드는 죄책감에 숨이 조이고 몸이 짓눌렸다.
“죄인은 무슨 죄인이야. 나도 다 알아봤어. 지 친자식은 외국에서 팔자 좋게 놀게 하고 너는 주워온 놈이라고 밤낮없이 일시키고 부려먹고 있는 거.”
“그게 무슨…….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그건 알 필요 없고. 어쨌든 너는 돈을 줄 생각이 없는 거잖아. 그럼 회장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지. 그래도 약속을 했는데 회장이라는 사람이 이제 와 말을 바꾸지는 않겠지.”
“그 돈은 당신이 받을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끓어오르는 분노에 하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받을 수 있고 없고 가 어디 있어? 회장이 준다는데.”
현철과의 대화는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비참했다. 이런 인간의 피가 내 몸속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없이 절망스럽고 저주스러웠다.
‘아버지가 이 사람의 뻔뻔스러움을 마주한 순간.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나마저 저주스러울 거야.’
어떻게 해서든 현철을 막아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마지막 술잔을 들이킨 현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만 가봐야겠다. 잘 먹었다.”
“안 돼!”
현철이 느린 걸음으로 하준의 옆을 스쳐 지나가던 순간 하준은 급한 마음에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이거 왜 이래! 이거 안 놔?”
“윽!”
현철이 잡힌 다리를 빼내려 흔드는 바람에 금이 간 갈비뼈에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이거 놓으라고!”
“제발!”
“……!”
“제발 한 번만이라도 진짜 아버지처럼 자식의 행복을 빌어줄 수는 없는 겁니까?”
“이, 이 자식이 지금 뭐, 뭐라는 거야. 그럼 내가 네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이야, 뭐야?”
말을 버벅거리는 현철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신 단 한 번도 나한테 아버지였던 적 없었잖아. 단 한 번도 내가 당신 아들이었던 적 없었잖아.”
끝끝내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너! 내가 너를 10년 동안이나.”
“그래 10년. 그 10년 동안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이제야 겨우 나를 바라봐 주는 가족을 만났는데. 왜 그것마저 뺏어가려고 해요. 도대체 왜!”
나도 한 번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나도 한 번쯤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을 살아보고 싶다고.
하준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온 방 안을 채웠다.
“그래 좋아. 네가 말하는 가족? 안 건드릴게. 돈만 주면 안 건드린다니까?”
결국 또 제자리.
“……차라리 내가 포기할게요.”
“뭐라고?”
현철은 울음과 뒤섞여 흘러나온 하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당신에게 현성 그룹의 돈을 주느니 차라리 내가 부회장을 포기하겠다고.”
당신만 막을 수만 있다면. 당신만 포기시킬 수 있다면.
차라리 내가 그들에게서 떠나겠다고.
“뭐? 너 미쳤어?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그걸 포기해!”
현철은 하준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깟 돈 몇 푼에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돈이야 차고 넘칠 만큼 많은 사람이니 그깟 돈 몇 푼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움받기 싫어요. 나도 사랑받고 싶고, 투정도 부리고 싶고, 기대도 보고 싶은데, 당신이 이러면. 자꾸 이러면 다 잃게 되잖아. 나는 또 버려지게 되잖아.”
힘이 빠진 건지 현철의 다리를 붙들고 있던 하준의 손에 힘이 풀리면서 그는 주르륵 무너져 내렸다.
“그러니까 제발……. 우리 가족들만은 건드리지 말아 줘요.”
“……미친놈.”
현철은 중얼거리듯 욕을 뱉어내고는 바짓단 끝에 걸린 하준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며 방을 나섰다.
방안에 남겨진 하준은 갈비뼈의 통증도 잊은 채 바닥에 엎드려 서럽게 울었다.
“김현철.”
신발을 신던 현철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 당신은.”
제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현철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