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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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2023.02.28.
“내가 하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떻게 알고 온 건지 방 앞에는 현성이 서 있었다.
아니. 현성뿐만이 아니었다.
현성과 혜선, 지훈과 수아. 그리고 시우까지.
하준이 그토록 간절하게 지키려 했던 그의 가족들 모두가 함께였다.
현성의 음성은 고막을 뚫을 듯 날카로웠고,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 차가웠다.
“내, 내가 찾아온 게 아니라고! 저 자식이 먼저 만나자고 연락한 거야!”
혹시라도 돈을 받지 못할까 급하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다급함이 담겼다.
현성이 고개를 획 돌리며 김 비서를 불렀다.
“이 사람 차에 태워놔.”
“네.”
김 비서가 한 걸음 다가서자,
“아, 아니 하준이 놈이 먼저 보자고 한 거라니까.”
현철은 주춤거리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 입 다물고 얌전히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당신은 하준이 다음이야.”
음성에도 무게가 있는지 반박조차 할 수 없는 위압감에 현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김 비서를 따랐다.
“너희들은 지금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
혜선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려던 현성이 뒤를 돌아봤다.
“너희들은 몰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거기에 보낸 것 같은데. 일단은 우리가 먼저 얘기해볼 테니까 너희는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진정 좀 되면 데리고 갈게.”
“네. 아빠. 그게 좋겠네요.”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 양이 아니었으면 하준이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을 거야. 얘기해 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당연히 모두가 알아야 할 일인걸요.”
현성의 인사에 수아는 대단한 일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수아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
박 비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다며 하준의 병실을 찾아왔던 날.
정원에 앉아 마음을 추스르고 병실로 돌아가던 수아는 하준의 병실 문이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일이 끝난 건가 싶어 병실로 들어가려는데 문밖으로 박 비서가 얼굴을 쑥 내밀고는 두리번거리는 게 아닌가.
혹시 자신을 찾는 건가 싶던 그때. 그는 문을 닫고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내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듯한 모습.
누가 봐도 비밀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수아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을 요량으로 병실 문에 귀를 대 보았지만 VIP가 괜히 VIP이겠는가.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에 내가 있는지 없는지까지 확인하는 거야?”
어쩐지 좋은 일은 아닌 듯했다.
여자의 촉이라는 것이 어떤 위험을 감지했는지.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직접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제 물음에 순순히 대답해줄 하준이 아니었다.
수아는 생각 끝에 병실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박 비서를 기다리기로 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세요.”
몇 분 뒤. 수아는 병실 문을 열고 나오는 박 비서의 팔을 붙잡아 복도 끝으로 이끌었다.
“이수아 씨. 혹시 저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갑작스러운 힘에 제대로 저항 한번 하지 못한 채 끌려온 박 비서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네. 박 비서님께 여쭤볼 말이 있어서요.”
수아는 그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빼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병실에서 하준 씨가 박 비서님께 따로 지시한 사항이 있었나요? 가족들 모르게 말이에요.”
“네? 그게 무슨…….”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박 비서는 수아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좀 전에 병실 밖을 살피신 건 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려고 그러신 거 아니셨어요?”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물음은 마치 따져 묻는 것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잠시 당황한 박 비서가 대답할 말을 찾는 사이. 수아가 곧장 말을 덧붙였다.
“박 비서님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하준 씨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 지나치게 말을 아끼는 사람이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나 고통, 처한 상황까지 모두 다요.”
하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속으로 삼킨 상처가 곪아 터지고 있는데도 아프다는 내색 한 번을 하지 못하는 사람.
수아의 말에 공감했는지 박 비서가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그래서 여쭤보는 거예요. 하준 씨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박 비서는 별다른 대꾸 없이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수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지금 하준 씨 주변에서 위험한 일들이 자꾸만 생겨나고 있어요. 이번 사건도 그중 하나이고요.”
“뭐라고요? 이번 일이 우연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벌인 사건이었다는 겁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박 비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네. 맞아요. 상황이 이렇게 위험한데 하준 씨가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서만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너무 불안해요.”
낮게 가라앉은 수아의 목소리에 박 비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만약 지시받으신 일이 하준 씨를 위험하게 만들 일이라면 누구라도 한 명쯤은 미리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그건…….”
지금까지의 대화로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지만 박 비서는 선뜻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의 망설임이 느껴졌는지 수아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부회장님의 지시사항을 거부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저 가족들이 미리 대비할 수 있게 알려만 달라는 거예요.”
수아는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자,
“……김현철.”
무거운 호흡과 함께 박 비서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김현철이라는 사람의 연락처와 주소를 알아봐달라고 하셨습니다.”
“김현철이라고요?”
그 이름이라면 현성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왜 갑자기 친아버지의 연락처를 알아보라고 한 걸까. 마주 보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두려워했으면서.
“김현철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수아 씨는 알고 있는 겁니까?”
“네. 들은 바로는 회장님을 협박하면서 돈을 요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어요.”
굳이 그의 친아버지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수아의 말에 많이 놀랐는지 박 비서의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회장님을 협박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건데. 그런 사람을 혼자서 상대하려 했다는 거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의 등 뒤로 식은땀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신이 건넨 연락처로 인하여 하준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락처를 건네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아서 천만다행이었다.
후우. 박 비서는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박 비서님. 하준 씨가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되더라도 분명 고맙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렇게 수아는 하준이 현철을 만나려 한다는 것에 대해 미리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던 것이었다.
*
나머지 가족들을 옆방으로 보낸 현성과 혜선이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섰다.
20년 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내려는 건지 하준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로 울고 있었다.
“…….”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에 현성과 혜선은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나 눈물이 많은 아이인데 그동안 어떻게 참아온 걸까.
그 모습이 애처로워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저렇게 울어대다가는 쓰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현성은 하준의 등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아버지?”
몸을 흠칫 떨며 상체를 세운 하준이 현성을 발견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흐윽. 죄송합니다.”
하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현성을 부르며 그의 품에 안겼다.
“그래. 알았어. 네 마음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울어.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다.”
현성은 하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그를 위로했다.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들썩거리던 몸의 움직임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현성은 조심스럽게 하준의 몸을 떼어냈다.
여전히 눈물을 아들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처음만큼의 슬픔은 아닌 듯했다.
“하준아. 민하준.”
아들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애처로운 내 아들아.
“이제 그만 울고 아빠 좀 봐봐.”
현성은 눈물로 가득한 하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죄송해요. 제가 그런 사람 아들이라 죄송합니다.”
괜찮다고. 그러니 속상해하지 말라고 말해주려 했는데, 하준은 그런 위로조차 받을 수 없다는 듯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뱉어냈다.
“제가 현성에 있는 한 그 사람은 몇 번이고 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요구할 겁니다.”
“하준아.”
“또다시 그 사람이 아버지를 찾아와 괴롭히게 둘 순 없어요.”
“하준아.”
“제가 떠나면. 부회장직을 내려놓고 제가 떠난다고 하면 다시는 아버지를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말하는 하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상태였다.
“민하준!”
현성이 하준의 양어깨를 잡으며 그의 이름을 힘주어 불렀고, 그제야 하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민하준. 정신 차리고 아빠 말 잘 들어. 네 아버지는 나고, 나는 너를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현성의 말투는 단호했지만 부드럽고 따뜻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떠나겠다는 건지 알겠는데, 이번에는 네가 잘못 생각했어. 그건 가족들을 위해서도 너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야.”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망설였을까.
겨우 붙잡은 하나를 떠나보내겠다고 말하는 그 마음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준이 너는 그동안 못 부렸던 투정도 좀 부리고, 맘껏 기대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지내면 되는 거야. 나머지는 아빠랑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그래. 민하준. 네 가족은 여기 있잖아. 이렇게 좋은 가족들을 두고 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야?”
“그래 형. 나 형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하여간 생각하는 게 7살 어린아이랑 똑같다니까.”
기다림을 참지 못한 지훈과 시우, 그리고 수아가 방으로 들어섰다.
“다들…….”
멈춘 줄 알았던 울음이 또다시 울컥 차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겨우 지탱하고 있던 하준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그렇게 울어댔으니 무리가 간 것이 당연했다.
현성과 지훈이 서둘러 하준의 몸을 붙잡았다.
“나는 김현철 좀 만나고 갈 테니까. 너는 하준이 데려가서 눕히고 지금 바로 와달라고 병원에 연락 넣어.”
현성은 하준이 듣지 못하도록 지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네. 그럴게요.”
그렇게 지훈 편에 하준과 가족들을 보낸 현성은 시선을 돌려 자신의 자동차를 찾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자동차가 없었다.
‘어디에 있는 거지?’
무슨 일인가 싶어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때마침 현성의 휴대폰이 울렸다.
“김 비서. 자네 지금 어딘가?”
“회장님. 미리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 김현철 씨와 병원에 와 있습니다.”
“병원?”
예상치 못한 김 비서의 말에 현성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