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 겁나고 두려워 (97/105)


97. 겁나고 두려워
2023.03.04.


시우와 혜선이 먼저 본가로 출발하고, 하준과 수아를 태운 지훈의 차가 그 뒤를 따랐다.

조심히 운전을 한다고 했는데도 가끔씩 흔들리는 차의 움직임에 하준의 고개가 따라 흔들렸다.

수아는 하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구겨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헤드레스트와 그의 머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여기 좀 기대요.”

살며시 손을 끌어당기자 하준의 머리가 수아의 어깨 위에 닿았다.

슬쩍 내려다본 그의 눈이 감긴 걸 보니 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은데. 확인할 길은 없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무거워 짧은 말 한마디조차 꺼내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러는 사이.


“……나한테 실망했습니까?”

그런 아버지를 둔 나라서.

그런 아버지를 막지 못한 나라서.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한 나라서.

낮고 탁하게 잠긴 그의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며 들려왔다.


“왜요. 내가 실망했을까 봐 겁나요?”

“응. 겁나. 겁나고 두려워.”

어깨에 닿은 그의 머리가 얕게 끄덕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부족한 나라서 실망할까 봐. 실망해서 내가 미워질까 봐. 너무 겁나.”

혼잣말처럼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눅눅히 젖어 있었다.

뭐가 그리 불안할까. 나는 아직도 이렇게 당신 손을 꼭 붙잡고 있는데,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뭐가 겁나요. 부족한 당신 어떻게 채워줘야 하나 그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바쁜데. 실망할 틈이 어디 있어.”

애써 끌어올린 수아의 입꼬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우리 애인. 혼자서 고민하느라 많이 힘들었겠다.”

수아의 손끝이 기울어진 그의 얼굴을 포근히 감쌌다.

그녀의 손길 한 번에 따뜻한 바람이 소리 없이 심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



“어? 원장님께서 회장님댁으로 가신다고 하셨는데.”

부원장이 놀란 눈으로 현성을 맞이했다.

분명 조금 전에 현성 그룹 회장의 집을 방문한다는 원장을 배웅하고 왔는데, 그 회장이라는 분이 눈앞에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응. 그랬겠지. 환자는 내가 아니라 우리 아들이거든.”

“아. 그렇군요. 그럼 병원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여기에 있는 환자 중에 김현철이라고…….”

주변을 둘러보던 현성의 시야에 바쁜 걸음으로 다가오는 김 비서의 모습이 들어왔다.


“김 비서.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자기 병원이라니.”

“그분께서 갑자기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바람에 급하게 병원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현철은 계속되는 기침에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보였고, 결국엔 울컥거리며 핏덩이들을 쏟아냈다.

김 비서는 다급했던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더니,


“미리 말씀을 드리고 왔어야 했는데 병원에 와서야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회장의 지시 없이 제멋대로 결정하고 병원으로 옮겼으니 그 어떤 질타도 감수할 마음이었다.


“아니야. 잘했어. 당연히 그랬어야지.”

현성이 김 비서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자네도 많이 놀랐을 텐데, 오늘은 그만 집에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을 김 비서를 걱정하는 현성의 모습에서 그의 따뜻하고 친절한 품성이 묻어났다.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빨리 들어가. 김 비서가 여기에 있으면 내 마음이 더 불편해. 어서 들어가. 어서.”

“정말 괜찮은데.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김 비서는 현성의 재촉에 떠밀리듯 병원을 나섰다.

*



“폐암입니다. 환자 본인도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부원장에게 김현철의 상태에 대해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라는 게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폐암이라고?”

“네. 저희 병원에서 진단받으신 걸로 확인됩니다.”

이미 진단까지 받았다고? 현성의 눈썹이 들썩였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회장님께서 아시는 분입니까?”

“생존율은?”

부원장의 질문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가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만 궁금했다.


“현재로는 25%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환자마다 다르긴 하지만 이 환자 같은 경우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아서요.”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는군.

드러난 현철의 표정이 그의 뒤엉킨 머릿속과 꼭 닮아 있었다.

사실 원치 않는 만남이긴 했지만, 현철이 나타난 것이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하준의 트라우마를 없앨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방법이 설득이든 협박이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아픈 사람을 두고 해서는 안 될 말인 걸 알지만 그가 끝까지 도움이 안 되는 아버지인 것은 확실했다.


“그래. 고맙네. 다음에 원장이랑 식사나 함께하지.”

“네. 회장님. 혹시라도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응. 그래.”

현성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공허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이내 현철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폐암입니다. 주변 장기로도 이미 전이된 상태이고요. 조금만 일찍 오셨으면 수술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최근 들어 기침이 잦아진다 했더니 기어이 기침 끝에 피가 섞여 나와 찾아온 병원이었다.

하긴. 몇십 년을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아왔으니 오히려 건강한 게 이상할 정도이긴 했다.

하지만 막상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으니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현철의 정신이 멍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시작하시는 게 좋습니다.”

“얼마나 남았소?”

“……그게 확답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망설이는 의사의 꼴을 보니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예상 못 했던 일도 아니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현철이 놀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미련.

죽지 못해 산 인생이었고, 살아 있으니 산 인생이었다.

그런 별 볼 일 없는 인생이었기에 죽어야 할 때가 되면 언제든 미련 없이 죽겠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죽으라고 등 떠밀어지니 이상하게도 오히려 살고 싶어졌다.

치료든 수술이든 뭐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미련이라는 게…… 남아버렸다.

*



“음…….”

옅은 신음 소리와 함께 현철의 눈꺼풀이 밀려 올라갔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약해지는지. 뭐 좋은 기억이라고 처음 암을 선고받던 그날의 일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현철은 가느다랗게 벌어진 시야 사이로 주변을 살폈다.

하얀 천장과 코를 찌르는 독한 소독약 냄새. 그리고 주변을 흐르는 다급한 소리까지.

지금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는데, 결국은 또 이렇게 병원 신세라니.

현철은 마른 세수를 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깼나?”

예고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현철이 몸이 흠칫 떨렸다.


“다, 당신.”

고개를 돌리니 미간을 찌푸린 채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현성이 보였다.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하지.”

차갑게 한마디를 뱉어낸 현성이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현성과 현철은 병원에 있는 정원 벤치에 앉았다.


“그래서 돈이 필요했던 건가? 치료비가 필요해서?”

“…….”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현철은 그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신은 내가 불쌍해 보이겠지. 한심해 보일 테고.”

현철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들 팔아먹고 사니까 그런 죽을병에 걸리는 거다. 뭐 그렇게 꼴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말없이 현철의 말을 듣던 현성의 입술이 열렸다.


“아니. 나는 당신이 불쌍하지도 한심하지도 않아.”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현철이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그런 감정은 상대에게 티끌만큼의 관심이라도 있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니까.”

마주친 그의 눈빛은 매서웠고,


“난 당신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어. 나에게 당신은 그저 하준이를 이 세상에 있게 해준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쏟아내는 음성은 싸늘했다.


“하. 이제 내 병을 알아버렸으니 돈을 주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겠군.”

시한부라는 약점을 잡았으니 당연히 그것을 이용하려 들것이 분명했다.


“하. 우습군. 당신에게 돈 몇 푼 쥐여주는 게 나한테 뭐 그리 어려울 일이라고.”

입은 웃고 있는데 그의 말엔 가시가 잔뜩 돋아나 있었다.


“당신 병과는 상관없이 당신이 내가 제시하는 조건만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주려고 했던 돈이야.”

“조건?”

그런 말 없었잖아. 현철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준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해. 그동안 상처 줬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사과라…….”

현성의 말을 곱씹던 현철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약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뭐라고?”

돈만 받을 수 있다면 없던 감정까지 끄집어내 용서를 구할 것이라는 현성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지? 설마 하준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건가?”

“그럼 당신은 20년 전 일에 대해서 내가 그 녀석에게 미안해할 거라고 생각했나?”

“그게 당연한 것 아니야? 인간이라면 당연히…….”

“아니! 당연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던 그 시절. 무거운 짐일 뿐이던 아들을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에 후회 따윈 없었다.

그렇기에 하준이 현성 그룹의 부회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는 아마도 끝까지 아들을 찾지 않았을 것이었다.

얼마 전, 20년 만에 아들을 만났던 날.

현철은 자신 없이 번듯하게 자란 하준을 보며 그날 병원에 두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덕에 남들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왔을 테니.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날의 일을 후회한 적이 없어.”

“그래. 그렇다면 다른 조건을 제시하지.”

미안하지 않다니. 너무도 뻔뻔한 현철의 태도에 들썩이는 마음을 가라앉힌 현성이 다시 말을 꺼냈다.


“사과하지 못하겠다면 하준이가 보겠다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절대 하준이 눈에 띄지 마.”

미안하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그 어떤 변명이라도 해주길 원했지만 그마저도 못하겠다니 내걸 수 있는 조건은 하나뿐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그랬듯 없는 사람처럼 살아달라는 것.


“당신 때문에 생긴 상처는 우리 가족들이 어떻게 해서든 아물게 만들 테니까 다시 나타나서 상처 내는 일 따위는 하지 말라는 뜻이야. 알아들어?”

현성은 바짝 날이 선 눈매로 서슬 퍼런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왔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

더 바랄 것이 뭐가 있겠으며, 이미 다른 사람의 가족이 되어버린 아들을 만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까지 그래왔듯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며, 서로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것이 너와 나, 서로를 위한 일이겠지.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현철의 얼굴에 결심이 드러났다.


“내가 그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줄 생각인데?”

처음부터 자신은 돈을 목적으로 찾아온 거였다.

다른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명색이 현성 그룹 회장인데 어느 정도는 챙겨주겠지.


“내가 현금으로 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뭐라고?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거야?”

현철이 얼굴을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어차피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현금이 아니잖아.”

당신 살고 싶잖아. 치료받고 싶잖아.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현성은 태연하게 반응했다.


“당신이 지낼 수 있는 요양병원을 알아보지. 물론 발생되는 병원비와 치료비는 현성에서 책임질 거고.”

제 속을 들켰는지 현철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 조건, 받아들이지.”

잠깐 망설이던 현철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할 말을 모두 끝낸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떼려다 몸을 빙글 돌려 현철을 바라봤다.


“당신. 하준이한테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지금 이 순간 고맙다는 감정은 들어야 할 거야.”

“뭐?”

“당신이란 하찮은 존재가 현성 그룹의 회장인 나와 이렇게 나란히 앉아 말을 섞고, 내가 베푼 친절을 받을 수 있는 건 모두 하준이 덕분이니까.”

말을 마친 현성은 다시 발끝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둘 사이의 대화도 거래도 드디어 끝이 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