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불어오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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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불어오는 바람에
2023.03.07.
곧 도착한다는 현성의 연락에 가족들은 거실에 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현관 앞 센서 등에 불이 들어오더니 이내 어두운 낯빛의 현성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하준이는?”
“원장님 다녀가셨고, 당분간은 푹 쉬게 하라고 하시면서 수액 놔주고 가셨어요. 지금은 잠들었어요.”
현성의 물음에 소파에 앉아있던 지훈이 대답했다.
“그래? 갈비뼈 금 간 데는 더 악화되지 않았고?”
하준의 방 쪽으로 시선을 보내던 현성이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네. 아까 살펴보시더니 다행히 더 악화되지는 않았다고 하셨어요.”
“다행이네.”
그제야 현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준이 친아버지랑은 어떻게 되셨어요? 이야기는 잘 끝내신 거예요?”
“그게…….”
말끝을 흐리는 현성의 모습에 가족들과 수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의 표정에 망설임이 나타나더니 이내 지워졌다.
“지금 병원에서 오는 길이야.”
“병원이요? 갑자기 병원은 왜요?”
“김현철 그 사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말의 뜻을 금방 이해하지 못한 혜선이 당혹감이 묻어난 얼굴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폐암이래. 이미 전이도 꽤 진행된 상태고.”
“어떻게 그런…….”
순간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돈을 주는 조건으로 하준이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했더니 그럴 수가 없다고 하더군.”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현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과거의 일에 대한 조금의 후회도 없어 그럴 수가 없다네.”
착잡한 마음으로 현성은 긴 숨을 내뱉었다.
“후회가 없다니.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요? 하준이 형이 너무 불쌍해요.”
그런 사람도 아버지라고. 그에게 버림받은 기억에 아직도 힘들어하는 하준이 생각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하셨어요? 돈은 주고 오신 거예요? 아니면 그냥 그대로 끝내신 거예요?”
지훈이 물었다.
“아니. 따로 돈을 주지는 않았고, 그 사람 마지막 날까지 병원비와 치료비를 우리 쪽에서 부담하기로 했어.”
“병원비와 치료비를요?”
지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큰아버지 결정에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저는 동의할 수 없어요. 왜 그 사람 치료비를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거죠?”
나오는 말투는 자연히 날카로웠다.
“하준이를 돈으로만 취급하는 양심도 없는 사람이에요. 사과조차 하지 않겠다는 사람한테 병원비라뇨. 치료비라뇨.”
끓어오르는 분노에 지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래. 네 맘 이해한다. 나라고 뭐 그러고 싶었겠냐.”
어쩔 수 없었다며 현성이 한숨을 푸욱 쉬고는 말을 이었다.
“하준이를 위해서였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욕하는 아버지라고 해도 어쨌든 하준이에게는 자신을 낳아준 친아버지니까.”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의 존재.
“하준이, 아픈 엄마를 치료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떠나보냈어. 그런데 아버지마저 그렇게 보내면 되겠니? 원망스럽고 미워도 마지막 도리는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친아버지를 용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저 훗날 하준이가 친아버지의 상황에 대해 알게 되더라도 마음의 짐은 갖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결국 친부모님 모두를 잃게 되었네요. 이 사실을 하준 씨가 알면 마음이 어떨까요.”
수아의 말에 다른 가족들도 속으로 삼켜낸 안타까움을 저마다의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일단은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놓았으니 하준이가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추스른 후에 알려도 늦지는 않을 거야.”
원하는 방향대로 일이 해결되지 않음에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아쉬워하고,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현성은 상념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으니까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하준이만 생각하자.”
“네. 당연히 그래야죠.”
“하준이 보면 다들 아무 내색하지 말고 평소처럼 대해. 안 그래도 마음 쓰일 텐데 우리까지 달리 대하면 더 마음 쓰이지 않겠어?”
현성의 말에 다들 알겠다고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과연 이 마음을 감출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
“하아. 잠이 안 와.”
시간이 너무 늦어 손님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수아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연신 몸을 뒤척거렸다.
하준은 아직도 자고 있으려나 생각하다가 문득.
“하준 씨 보고 싶다.”
저도 모르게 마음속 바람이 음성이 되어 새어 나왔다.
사랑하는 연인을 옆방에 두고 독수공방을 하려니 하준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그의 옆에 누워 상처를 보듬듯 그를 안아 보듬어 주고 싶은데.
그의 부모님이 언제 들어오실지 모르니 차마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하아. 그래도 보고 싶은 걸 어떻게 해.”
이대로는 밤새 뒤척이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게 뻔한데.
갈까? 말까? 마음이 오락가락하고 몸도 따라 오락가락했다.
그러다 결국.
“얼굴만 잠깐 보고 오자. 옆에서 자겠다는 것도 아니고 잠깐 얼굴만 보는 건데 그 정도는 괜찮겠지.”
결심을 굳힌 수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소리를 죽이며 문을 나섰다.
걸음 한 번에 숨 한 번.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결국 하준의 방에 다다랐다.
누가 와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방문을 닫은 뒤, 수아는 곧장 하준에게로 다가갔다.
많이 힘들었던 건지. 지금껏 깊은 잠을 자본 적이 없다던 그는 마치 죽은 듯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래. 잘 자는 거 확인했으니 이제 됐다. 그렇게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다가 문득.
‘지난번처럼 악몽을 꾸면 어쩌지?’
현철과 마주쳤던 그 날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던 하준의 모습이 수아의 걸음을 붙잡았다.
잠시 망설이는 듯싶더니 수아는 이내 그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는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혹시라도 악몽을 꾸는 듯싶으면 곧장 깨워줄 생각이었다.
방 안은 고요했고, 쌔액쌔액 하준이 내뱉는 숨소리만이 정적을 가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잠든 하준의 얼굴을 바라보던 수아가 천천히 그와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갔다.
그러고는 쪽. 그의 이마와 수아의 입술이 맞닿았다.
오늘 밤 그의 꿈속은 평온하길.
입술 끝에 담긴 바람이 그에게 닿기를.
그렇게 간절한 시간이 두 사람 사이를 흘러가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하준은 자신의 옆에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수아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일 때문에 화가 많이 났을 텐데. 내 맘대로 저질러버린 일 때문에 모두 화났을 거야.’
하아. 어떤 표정으로 가족들을 대해야 할지 밀려드는 걱정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던 그때.
“으음.”
눈썹이 꿈틀대더니 이내 수아의 눈꺼풀이 가늘게 열렸다.
“어?”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수아의 눈이 번뜩 뜨였다.
“제가 왜 하준 씨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걸까요?”
수아의 경직된 입꼬리 끝이 파르르 떨렸다.
“새벽에 일어났는데 수아 씨가 옆에서 자고 있기에 제가 침대로 옮겼습니다.”
헐. 옮기려거든 손님방으로 옮기든가. 아니면 깨우지.
“설마 우리가 이렇게 자고 있는 거 아버님이나 어머님께서 보셨으면 어쩌죠?”
불안한 마음에 동공이 흔들렸다.
“들어오시지 않으셨을 거예요. 혹시나 들어오셨어도 뭐. 그냥 그러려니 하시지 않으실까요?”
하긴. 우리가 7살 유치원생들도 아니고 그냥 옆에서 잠만 잔 것뿐인데. 이해해 주시겠지.
이내 불안함이 사라진 수아는 하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그럼 우리 딱 30초만 이러고 있을까요? 딱 30초만.”
수아가 1초부터 천천히 초를 세기 시작했다.
가슴팍에 묻은 수아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하준의 가슴을 간질였다.
흐르는 시간을 따라 보드라운 봄바람이 일렁이는 듯했다.
“……29초. 30초.”
30초는 마치 3초처럼 금세 흘러갔다.
“아. 그런데 떨어지기가 싫다. 그냥 계속 이러고 있을까요?”
가슴 설레는 목소리로 묻더니.
“아니야! 그래도 일어나야지. 출근해야지. 흐잉.”
허리를 감은 두 팔에 조금 더 힘을 줘 꼬옥 안고는 채 뜨지 못한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씻으러 갈게요. 이런 몰골로 어머님, 아버님을 뵐 수는 없잖아요.”
수아가 손님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하준은 넋 나간 표정으로 그녀가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왜 화를 내지 않지? 왜 어제 일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까.
수아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더 이상한 건 그런 모습이 수아뿐 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준이 일어났니? 배고프지? 어서 밥 먹자.”
“수아랑 아침밥을 같이 먹으니까 느낌이 이상하네.”
“그러게요. 선배님이랑 아침밥을 같이 먹게 될 줄이야.”
가족들은 미리 말이라도 맞춘 듯 밥을 먹고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설 때까지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다른 날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날보다 더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회사로 이동하는 차 안.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하준은 옆에 앉은 수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은데 그저 입술만 달싹일 뿐 하준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궁금해요?”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던 수아가 고개를 획 돌리며 물었다.
“네?”
정곡을 찔린 하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족들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궁금하냐고요.”
하준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알고 있으니까요. 하준 씨가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모두 아니까 굳이 말하지 않는 거예요.”
수아가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하준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겠죠.”
“…….”
“가족들 곁을 떠나는 것만이 당신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감춘다고 감췄고, 숨긴다고 숨겼지만 결국 모든 것은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그분에 대한 문제는 잘 해결하신 것 같으니까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해결하셨다니. 그럼 결국 돈을…….”
하준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아니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자세한 건 잘 모르겠지만 다시 하준 씨를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셨어요.”
“아. 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준의 시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왜요? 이제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아쉬워요?”
“…….”
“괜찮아요. 솔직하게 말해 봐요. 서운해요?”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수아는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그동안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잘 살아왔는걸요.”
“그런데 표정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가 않는데요?”
“……결국엔 또 아버지께 폐를 끼치게 되었으니까요.”
고마운 마음과 죄송한 마음. 그리고 뭐라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여러 감정이 한데 뒤엉켜 명치 부근이 아릿했다.
“폐라뇨.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서로 의지하고 돕는 게 가족인데.”
그의 마음을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가 어떤 마음일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마음에 위로가 되기를.
수아는 잡은 그의 손을 더욱 단단하게 붙잡았다.
“그런데 말이에요.”
수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은 하준 씨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저는 한마디는 꼭 해야겠어요.”
그래. 그래야 이수아지.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간 수아를 바라보던 하준이 빙긋 웃어 보였다.
“얘기해요.”
들을 준비도 혼날 준비도 모두 되어있습니다. 하준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20년 동안 하준 씨를 한결같이 사랑해 주신 분들을 떠난다고 하다니. 이번에는 하준 씨가 정말 잘못한 거예요.”
“네.”
“가족들을 진짜로 생각한다면 다시는 그런 생각 하지 말아요. 알았죠?”
“네. 명심할게요.”
하준의 대답에 수아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는 활짝 웃었다.
그렇게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으로 마음에 잔물결이 이는 그런 하루가 또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