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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그녀의 웨딩드레스
2023.03.11.


절대로 무리해서는 안 된다고 하준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온 수아는 곧바로 오전 회의에 참석했다.

새로 기획 중인 웨딩 위크 프로모션에 대한 회의였다.


“준비는 차질 없이 준비되고 있습니까?”

지훈의 질문에 희수는 스크린에 띄운 PPT 자료를 가리키며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이벤트에 사용할 웨딩드레스는요? 결정된 겁니까?”

“네. 드레스는 지난번 보여드렸던 JS 웨딩의 드레스로 확정 지었습니다. 나머지 드레스들은 업체 측으로 돌려보내고 행사 일주일 전에 다시 받기로 했습니다.”

“그래요. 다 같이 고생해 준 덕분에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네요. 우리 조금만 더 힘냅시다.”

지훈의 격려를 끝으로 오전 회의는 마무리되었고, 직원들은 하나둘씩 회의실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수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려는데, 회의 자료를 정리하던 희수가 급하게 수아를 붙잡았다.


“수아 씨. 혹시 시간 되면 나 좀 도와줄래요?”

“네. 여기 정리하는 거 도와드리면 될까요?”

“아니. 이거 말고 드레스 정리하는 것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드레스요?”

“오늘 중으로 업체 측에 보내야 하는데 워낙 부피들이 커서 혼자 정리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지금 시간 괜찮아요?”

프로모션 막바지 준비로 정신없이 바쁜 직원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일이 적은 수아에게 부탁하는 것이 조금은 덜 미안한 탓이었다.


“네. 그럼요. 도와드릴게요.”

수아와 희수는 웨딩드레스의 사진촬영이 진행되었던 스튜디오로 걸음을 옮겼다.


“우와. 너무 예쁘네요.”

수아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웨딩드레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무래도 각 업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레스들로 한 벌씩 보내온 거니까 예쁠 수밖에 없겠죠.”

“아. 그래서 그런가. 진짜 전부 다 너무 예쁘네요.”

옷걸이 사이사이를 벌려가며 한 벌씩 자세히 살피는 수아의 눈동자가 스튜디오 조명만큼이나 밝게 빛났다.


“한번 입어볼래요?”

“네?”

“혹시나 원하는 드레스 있으면 한번 입어 봐요.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겠어요.”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 저는 이거 입어볼래요.”

수아는 기다렸다는 듯 드레스 한 벌을 가리켰다.

오프숄더에 풍성한 벨라인. 그리고 화려한 비즈 장식까지.

어려서부터 한결같이 좋아해 온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수아 씨는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탈의실로 같이 가요. 내가 입는 거 도와줄게요.”

“네. 감사합니다.”

탈의실로 향하는 수아의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두둥실 떠오를 듯 가벼웠다.


“자. 하나, 둘, 셋 하면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거예요.”

희수가 숫자를 셈과 동시에 수아는 스읍 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다 된 거예요? 저 이제 숨 쉬어도 돼요?”

“네. 다 됐어요.”

“원래 이렇게 입는 건가요? 아니면 저한테 안 맞는 사이즈 인 건가요?”

갈비뼈를 조여 오는 드레스의 압박에 수아는 숨 한 번을 제대로 내뱉지 못한 상태에서 힘겹게 물었다.


“웨딩드레스는 원래 이렇게 입는 거예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조여야지만 라인이 사는 법이니까요.”

희수가 자신의 결혼식 날을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고. 수아 씨 너무 잘 어울린다. 지금 바로 예식장으로 가도 되겠는데요?”

희수는 화보 속 모델 같다며 박수까지 치면서 칭찬했다.


“에이. 쑥스럽게 왜 그러세요.”

얼굴을 붉히며 허공에서 손을 젓던 수아가 천천히 발끝을 돌려 전신거울을 바라봤다.


“……와.”

살면서 처음으로 입어본 웨딩드레스였다.

스튜디오의 조명 때문일까. 화려한 비즈 때문일까.

눈앞이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아의 입술 사이로 외마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쁘다. 제 자랑인 것 같아 차마 음성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수아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머. 이런 건 무조건 사진으로 남겨야 해요. 앞에 봐 봐요. 내가 제대로 찍어줄게요.”

휴대폰을 들고 서 있는 희수의 표정과 목소리가 어쩐지 들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찰칵. 찰칵. 찰칵.

무슨 화보라도 촬영하는 듯 희수는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사진은 수아 씨 휴대폰으로 보내줄게요. 혹시라도 누가 보면 수아 씨 결혼하는 줄 알 테니까 개인 소장만 해요.”

“네. 그럴게요.”

잠시 후. 드레스를 벗고 정리를 하려는데, 좀 전에 보았던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



“팀장님. 이 사진 너무 잘 나오지 않았어요?”

웨딩 위크 홍보물 확인을 위하여 홍보팀으로 이동하던 희수가 지훈을 향해 휴대폰을 내밀었다.


“아까 드레스 정리하는데 수아 씨가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한번 입어보라고 했었거든요. 너무 잘 어울리죠.”

응? 이수아가 웨딩드레스를 입었다고? 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키우고는 희수의 휴대폰을 자세히 살폈다.


“희수 씨. 혹시 이 사진 저한테 좀 보내줄래요?”

“수아 씨 사진을요?”

이미 홍보물에 들어갈 웨딩드레스는 촬영이 모두 끝난 상태라 사진이 더 필요하지는 않을 텐데.

이 사진이 왜 필요한 거지? 희수가 눈빛으로 물었다.


“아. 20대한테 인기 있는 웨딩드레스에 참고 좀 하려고요.”

희수의 생각을 읽은 지훈이 급하게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20대요?”

“이수아 씨 같은 20대들도 이번 웨딩 위크에 관심이 많다던데 20대들이 좋아할 만한 드레스들을 좀 더 비치하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아. 그렇겠네요.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 업체 측에도 이런 스타일의 드레스들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야겠어요.”

급하게 생각해낸 것이었지만 다행히 희수는 별다른 의심 없이 사진을 전송해왔다.

띵동 소리와 함께 지훈의 휴대폰으로 사진이 도착했고, 사진을 살피던 지훈의 입술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홍보물 확인 후 지훈은 부회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아의 사진을 보면 친아버지 일로 가라앉았던 하준의 기분이 조금은 좋아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민하준이 이런 내 노고를 알려나 몰라.”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사진을 보고 좋아할 하준의 반응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설마 너도 감시하러 온 거냐?”

부회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책상에 앉아 있던 하준이 툴툴거리며 물었다.

무리하지 말라며 부회장실을 들락거리는 수아와 시우. 그리고 박 비서의 감시와 함께 수시로 걸려오는 부모님의 전화까지.

다른 날보다 더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던 하준에게 지훈의 방문이 반가울 리 없었다.


“어허. 내가 뭘 가져왔는지 알면 이런 식으로 나를 홀대할 수가 없을 텐데.”

소파에 앉은 지훈이 천천히 다리를 꼬며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대체 뭘 가져왔기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거야.

하준은 의아한 눈빛으로 지훈을 바라봤다.


“내가 뭘 가져왔는지 알고 싶지 않은가 봐? 안 보면 후회할 텐데.”

“대체 뭔데 그래?”

평소답지 않은 지훈의 행동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는지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다가갔다.


“네가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엄청나게 보고 싶을 사진.”

도통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지훈의 말에 하준의 눈썹이 바짝 모여들었다.


“너. 이렇게 기대감 심어놓고 별거 아니면 알지?”

“별거인지 아닌지는 네 눈으로 직접 보면 알겠지.”

지훈은 싱긋 웃으며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슬쩍 내려다보니 웨딩드레스 사진인 것 같았다.


“이번 웨딩 위크에 사용할 드레스야?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자세히 봐봐. 그 드레스를 누가 입고 있는지.”

시큰둥한 반응에 지훈은 그의 말허리를 잘라내며 말했다.

응?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던 하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급하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건…….”

마치 고장 난 로봇처럼 사진을 살피던 하준의 움직임이 버벅대다가 이내 뚝 멈춰버렸다.


“이벤트용 드레스 정리하다가 한번 입어봤다고 하더라고. 팀원한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어렵게 얻어낸 거야.”

“…….”

생색을 내려는 지훈의 말에도 하준은 멍하니 휴대폰 액정만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그런 반응 정도는 보여줘야 가져온 보람이 있지.’

피식 웃음을 짓던 지훈은 하준의 손에 들린 자신의 휴대폰을 다시 가져왔다.

어? 어? 느닷없이 휴대폰을 빼앗긴 하준의 손이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멈추었다.


“내 휴대폰에 침 떨어지겠다. 그만 정신 좀 차리시지.”

“그 사진 지금 바로 내 휴대폰으로 보내줘.”

말하는 하준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이런 사진보다 직접 실물로 보는 게 낫지 않겠어?”

“응? 실물이라니?”

하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응. 당연히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지.”

하. 서른 살이나 먹은 놈이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묻는 모습이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결혼 말이야. 결혼식 날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잖아.”

“겨, 결혼?”

결혼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였다.

화들짝 놀란 하준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뭘 그렇게 놀라? 그럼 안 하려고 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하준이 말끝을 흐렸다.


“너 그렇게 여유 부리다가 다른 사람이 수아 채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다른 사람?”

“수아가 말 안 하디? 강바다 씨 화보 촬영일자 잡혔는데.”

“뭐? 화보 촬영일자가 잡혔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하준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대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수아 예쁘잖아. 그렇게 예쁜 여자가 하루 종일 오빠, 오빠 하면서 쫓아다니면 어떤 남자가 싫다고 하겠어.”

눈치는 어디에 버리고 온 건지, 아니면 일부러 약 올리려고 저러는 건지.

지훈은 담담한 표정으로 엄청난 말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밀려드는 불안함에 하준의 표정이 심각해지던 바로 그때.

뭔가 툭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아마도 그것은 하준의 인내심이 아닐까 싶었다.


“화보 촬영일자가 언제라고?”

“서로의 상황에 따라 변동이 될 수도 있지만 일단 정해진 건 한 달 뒤.”

“한 달 뒤라…….”

중얼거리던 하준의 얼굴에 갑자기 어떤 결심이 나타났다.


“한 달 안에 수아 씨랑 결혼해야겠어.”

“뭐? 한 달 안에 뭐를 해?”

컥. 얼마나 놀랐는지 지훈은 먹은 것도 없이 들이키던 호흡에 사례까지 들렸다.

하준이 안정된 가정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결혼 이야기를 꺼낸 건 맞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이야.

게다가 한 달 안에 결혼이라니. 뭐 이런 극단적인 놈이 다 있지.


“결혼하려면 뭐부터 해야 하지? 결혼식장 예약? 드레스는 어디에 가서 사야 하는 거지?”

지훈이 콜록대며 기침을 가라앉히는 사이. 하준은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끊임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야! 무슨 번갯불에 콩 볶아 먹냐? 뭐가 그렇게 급해?”

지훈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나 참. 결혼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게 누군데.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든 하준은 미간을 좁히며 지훈을 흘겨봤다.


“누가 지금 당장 결혼하래? 일단은 프러포즈라도 하라는 말이잖아. 그다음에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그다음에 상견례 하고. 그렇게 순서대로 준비를 해야지.”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려줘야 하는 거야.

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마를 짚었다.


“아. 프러포즈.”

그래. 생각해 보면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을 시간에 쫓겨 급하게 진행시키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하준은 프러포즈를 통해 결혼을 하겠다는 그녀의 대답이라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그녀를 만족시킬 프러포즈를 준비하자.

생각 끝에 결심을 마친 하준의 입꼬리가 예쁜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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