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완벽한 그가 못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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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완벽한 그가 못하는 것
2023.03.14.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시간들이 흐르고, 주말이 찾아왔다.
“와. 이게 얼마 만의 쇼핑이야.”
수아는 내일 근사한 곳에 가자던 하준의 말에 옷이나 한 벌 장만할까 싶어 백화점을 찾았다.
그와 함께 올까 했지만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겼다며 회사로 가버린 탓에 어쩔 수 없이 혼자 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오랜만의 쇼핑에 신이 난 수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백화점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어머. 신상이네. 너무 예쁘다.”
“이건 하준 씨가 입으면 엄청 잘 어울리겠는데?”
마치 한겨울 눈밭에 내놓은 강아지처럼 총총거리며 신나게 돌아다니던 그때.
“이수아.”
어디에선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팀장님.”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던 수아는 저만치에서 걸어오고 있던 지훈을 발견했다.
“백화점엔 웬일이야? 쇼핑하러 온 거야?”
“네. 옷 좀 보려고요. 팀장님은요? 팀장님도 쇼핑하러 오셨어요?”
“어. 나야 뭐…….”
“그런데 왜 혼자세요?”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 묻는데.
“혹시 나 찾아요?”
가방을 고르던 유나가 수아를 알아보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역시 같이 계셨네요. 두 분 사귀신다는 이야기는 하준 씨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두 사람에게 있었던 말 못 할 맘고생을 알고 있기에 수아는 환하게 웃으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그런데 하준 오빠는 어쩌고 왜 혼자 쇼핑을 나왔어요?”
“그러게. 하준이랑 산에 같이 간 거 아니었어?”
산이라고? 무슨 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출근한다고 했던 사람이 지금 산에 갔다는 말이야?
놀란 수아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무슨 산이요?”
“밥이나 같이 먹자고 했더니 내일 산에 가야 해서 준비할 게 많다나? 그래서 안 된다고 하더라고. 나는 너랑 처음 만났던 곳에 같이 가려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네.”
무슨 일인가 싶어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저한테는 분명히 오늘 회사에 출근해야 해서 못 만날 것 같다고 했거든요.”
말끝에 수아의 표정이 굳어졌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지훈의 표정도 덩달아 딱딱하게 굳었다.
“출근한다고 했다고? 이상하네. 아침에 집 앞에서 만났을 때 운동화까지 챙겨 신은 거 확인했는데.”
지훈은 기억을 더듬어 집 앞에서 마주쳤던 하준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등산하기 좋은 옷차림과 신발. 그리고 뭐가 들었는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있던 가방까지.
누가 보아도 그의 모습은 등산객의 모습이었다.
“왜 너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서 산에 간 거지?”
지훈은 별 뜻 없이 꺼낸 말이었겠지만, 그 말 한마디에 수아의 심장은 쿵쿵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제가 알고 있기로 그가 산에 오르는 이유는 단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것. 그래서 그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
“혹시 하준 씨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혹시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생긴 걸까. 수아는 다급하게 물었다.
“글쎄. 며칠 동안 꽤 심각한 얼굴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 같긴 했는데. 그게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건가?”
역시 그랬구나.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죄송하지만 저 먼저 가볼게요.”
“잠깐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서둘러 몸을 돌리는 수아의 손목을 지훈이 빠르게 붙잡았다.
“지금 바로 산으로 갈 거면 내가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여기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 있어요. 그거 타면 금방이에요.”
“혼자서 괜찮겠어?”
“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가보고 전화 드릴게요.”
“그래. 하준이 만나면 나한테 꼭 연락 줘.”
당연히 수아와 함께 간다고 생각했기에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하준의 산행이었다.
그런데 수아에게 거짓말을 하고 간 거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하준의 행동에 그제야 지훈도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별일 아닐 테니까 두 분은 걱정하지 마시고 남은 데이트마저 하세요.”
“그래. 괜찮을 거야. 네 말대로 별일 아닐 거야.”
괜찮을 거야. 별일 아닐 거야. 그 말은 불안함을 가라앉히기 위한 주문과도 같은 말이었다.
“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수아는 애써 들썩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서둘러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
펑!
“흠. 이거 생각보다 너무 어려운데.”
하준은 손에 들린 처참한 몰골의 풍선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타오르는 자신의 열정과는 다르게 벌써 3개째 연속으로 터지고 있는 무심한 풍선들.
하준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푹 가라앉았다.
“프러포즈라는 거. 쉽지만은 않구나.”
하준이 풍선 조각들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랬다. 내일은 하준이 계획한 대망의 프러포즈 날이었다.
지훈과 결혼 이야기를 한 그날부터 눈이 빠져라 검색해 가며 준비한 프러포즈였다.
드러내기 쑥스러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찾아보고 재료들을 주문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어쩐지 준비과정도 순탄치는 않을 것 같아 하루 전부터 준비를 시작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풍선을 부는 것만으로 이렇게 몇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지훈에게 도움을 요청해 볼 걸 하는 후회감이 밀려들었다.
사실 그가 가진 재력이라면 전문 업체를 고용해 누구보다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프러포즈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하준이 원하는 프러포즈가 아니었다.
그는 부족하고 어설프더라도 오로지 자신의 정성만이 담긴 프러포즈를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건장한 체격의 그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풍선을 불고 있는 이런 우스운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풍선 불기에 소질이 없다는 걸 30년 만에 처음 알았네.”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풍선의 잔해를 바라보던 하준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은 뒤, 네 번째로 희생될 풍선을 집어 들었다.
잠시 후. 하준은 몇 번의 실패와 몇 번의 성공을 거친 끝에 겨우 풍선 장식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아으. 허리야.”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탓에 굳어버린 허리를 펴자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탁탁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하준은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결과물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나름 괜찮지 않나?” 하다가.
“그냥 업체를 불러서 할 걸 그랬나?” 하다가.
“아니지. 어설퍼도 내 정성이 들어간 건데.” 하다가.
자꾸만 마음이란 것이 초 단위로 바뀌는 통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나머지는 내일 일찍 와서 마무리 지으면 되겠지.”
마지막으로 자신이 챙겨온 노트북과 빔프로젝터가 연결된 것을 확인한 하준은 짐을 챙겨들고 방을 빠져나왔다.
“이왕 산에 온 김에 수아 씨 처음 만났던 곳이나 한번 보고 갈까.”
하준이 빙긋 웃으며 수아와 처음 밤을 보냈던 숙소를 나와 이내 정상을 향해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
“후아. 내가 이 산을 또 올라가게 될 줄이야.”
산 입구에 서서 등산로를 바라보던 수아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지난번 등산의 여파로 온몸이 쑤셔 며칠을 고생했던 수아는 당분간은 등산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었다.
분명히 그랬었는데.
“높은데 올라가서 생각하는 습관을 버리겠다고 한 지가 언젠데 왜 또 여기는 올라간 거냐고.”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지 못한 수아는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얼마나 걸었을까.
“아가씨.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야! 힘내! 파이팅!”
알록달록 등산복을 맞춰 입으신 아주머니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 지난번에 왔을 때도 저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여전히 조금이 얼마큼인지는 말씀해 주지 않으신 채 아주머니 무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어? 여기쯤이었던 것 같은데.”
어쩐지 낯이 익은 듯한 풍경에 수아의 걸음이 멈췄다.
정상을 향한 길이 아닌 옆쪽으로 작게 뻗은 길.
저기 어디쯤, 하준 씨가 서 있었던 것 같은데라고 생각한 순간. 익숙한 실루엣이 수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민하준 씨!”
나를 이렇게 고생시켜? 나 지금 엄청나게 화났어.
수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의 이름에 성을 붙여 부르는 것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수아 씨?”
그날과 같은 자리에 서 있던 하준은 난데없이 들려온 고성에 몸을 흠칫 떨었다.
“수아 씨.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
하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산에 온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기에 앞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일한다는 사람이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가 회사예요?”
나오는 목소리가 자연히 날카로웠다.
“빨리 거기에서 내려와요.”
“아. 네.”
뭐라 변명을 할 새도 없이 하준은 서둘러 벼랑 끝에서 내려와 수아의 앞에 섰다.
“오늘 회사 간다면서요.”
수아가 팔짱을 낀 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마치 뼈다귀를 숨기다가 들킨 강아지처럼 하준의 놀란 표정은 어떻게 해도 숨겨지지 않았다.
“설마 저한테 거짓말 한 거예요?”
“회사에 간다고 거짓말한 건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사정은 무슨 사정. 못됐어 정말. 높은데 올라가지 않기로 했으면서 왜 약속을 안 지키는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나는.”
말을 하라는 건지, 하지 말라는 건지.
자꾸만 말을 가로채는 수아 때문에 제대로 된 변명 한 번을 하지 못한 하준은 그저 진땀만 흘릴 뿐이었다.
“저 진짜 화났어요. 이제부터는 하준 씨 맘대로 해요. 난 이제 몰라요.”
흥. 소리와 함께 수아의 몸이 획 돌아가자 하준은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놀라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계속 여기 올라와 있었던 게 아니라 지금 잠깐 올라와 본 거였어요. 하필 그때 딱 맞춰서 수아 씨가 본 거라고요.”
“…….”
“진짜예요. 수아 씨랑 산에서 처음 만났던 날도 생각나고 해서 잠깐 올라와 본 거였습니다.”
“진짜예요? 이번에도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그의 말을 듣고도 수아는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회사에 간다던 사람이 산에 갔다는데.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그 얘기는 누구한테 들은 겁니까?”
“팀장님이요.”
아. 민지훈. 하여간 어지간히 도움이 안 된다니까.
하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저는 하준 씨가 여기에 혼자 와 있는 거 싫어요. 정 오고 싶으면 저랑 같이 와요. 생각 정리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옆에만 있을 테니까 같이 오자고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수아의 얼굴에 하준은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이곳까지 올라왔을지 알 것 같았다.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하준은 거리를 좁히며 수아를 품에 안았다.
“미안해요. 진짜 미안. 그런데 이제는 여기 올라올 일 같은 거 없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는 당신이 옆에 있는데 여길 올라올 이유가 없지.
수아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하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으 정말. 저 말을 또 믿네요. 내가.”
가늘게 뜬 눈으로 흘겨보던 수아는 이내 빨리 내려가자며 하준의 손을 붙잡고는 아래로 이끌었다.
빠른 걸음으로 어느새 산 아래까지 내려온 두 사람은 이윽고 숲속의 펜션 앞에 다다랐다.
슬쩍 보고 지나치려는데 하준이 그녀의 걸음을 붙잡았다.
“여기에 짐을 두고 왔는데 잠깐만 들렀다 가요.”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준을 따랐다.
앞서 걷던 하준의 걸음이 멈춘 곳은 201호 앞이었다.
“어? 여기는.”
방 호수를 확인한 수아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맞아요. 우리가 처음으로 밤을 함께했던 곳이죠.”
“어머. 그렇게 얘기하니까 우리가 뭐라도 한 것 같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좁은 공간에서 둘이 함께…….”
“아우. 알겠어요. 알겠어. 빨리 들어가기나 해요.”
수아는 혹시나 누가 들을까 좌우를 급하게 살피며 방 안으로 하준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방 안에 들어선 수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