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프러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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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프러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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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프러포즈
2023.03.18.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프러포즈는 내일 저녁에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래서 시간상으로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작스러운 수아의 등장으로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와야 하나. 이미 여기까지 와버렸는데 오늘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고민 끝에 하준은 프러포즈 날짜를 하루 앞당기기로 했다.
오늘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내일 다시 산에 오게 된다면 프러포즈를 시작하기도 전에 걱정만 한가득 안기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밀려드는 걱정에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이건…….”
방 안에 들어선 수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실 그녀의 눈빛은 놀라움보다는 당혹감에 가까웠다.
방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봐서는 이벤트가 분명한데,
바닥에 놓인 불 꺼진 LED 촛불들도 그렇고, 창문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색도 모양도 제각각인 풍선들도 그렇고.
뭔가 조금씩 부족하고 어설펐다.
그렇게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하준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노트북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나마 빔프로젝터라도 미리 설치해놓고 간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마우스. 내가 마우스를 어디에 두었더라.’
긴장한 탓에 머릿속이 굳어버렸는지 노트북의 터치패드 같은 건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결국 주변을 허우적대다가 마우스를 겨우 찾아내긴 했는데, 움켜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준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재생 버튼을 눌렀다.
가사까지 꼼꼼히 살펴 가며 선택한 청혼 노래와 함께 여러 장의 사진들이 스크린을 통해 흘러나왔다.
‘잘 보고 있는 건가.’
하준은 슬쩍 눈동자를 움직여 수아의 반응을 살폈다.
사진이 마음에 안 들었나. 너무 식상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하준은 애꿎은 마우스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굳어 있던 수아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밀려 올라갔다.
사진 찍기 싫다던 그를 조르고 졸라 찍었던 몇 안 되는 커플 사진들이 이렇게 사용될 줄이야.
며칠 전, 그가 느닷없이 커플 사진을 달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평소 해보지 못한 일이라 준비하는데 며칠은 걸렸을 텐데.
그동안 혼자 끙끙대며 고생했을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기분은 너무 좋았다.
그렇게 들썩이는 입술을 애써 내리누르며 사진을 감상하는 사이 어느새 영상은 끝이 났다.
“수아 씨.”
아랫입술을 잘근대며 영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하준이 곧장 거리를 좁혀왔다.
“제가 오늘 수아 씨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네. 얘기해요.”
“제, 제가 말을 좀 더듬거릴 수도 있는데. 그건 너무 떨려서 그런 거니까 수아 씨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이든 들어줄 테니까 걱정 말고 편하게 말해요.”
수아는 눈매를 살짝 접으며 싱긋 웃었다.
“후우.”
들쑥날쑥 엉망인 심장 박동을 진정시키려 잠시 숨을 고르던 하준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무릎이 닿은 자리에서 쿵 소리가 났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혀끝으로 간신히 적신 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처음이라 표현이 서투를 겁니다.”
20년 동안 당신 하나만 생각해왔으니까.
“수아 씨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빨리 알아채지 못해 답답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고요.”
20년 동안 기다리기만 했으니까.
“부족한 게 너무 많아서 수아 씨를 실망하게 할까 봐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해지지만 노력하겠습니다.”
경직된 입가가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수아 씨도 알다시피 저는 노력하고 애쓰는 거 잘합니다. 잘할 수 있어요. 부족한 거 모두 채워볼게요. 그러니까.”
잠시 말이 멈추고.
하아. 짙은 숨 끝에 하준은 떨리는 손으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수아 씨.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하준이 내민 상자 속 반지가 그의 미소와 함께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노란빛의 금반지였다.
“이 반지는 저희 어머니 유품입니다. 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직접 전해주고 싶다고 하셨는데…….”
제 손에 반지를 쥐여 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그의 음성이 눅눅하게 젖어 들었다.
“프러포즈 반지라고 하기엔 많이 초라해 보이겠지만. 읍!”
수아가 하준의 입술을 덮치며 그의 말을 막았다.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딘가 많이 어설퍼 보이는 그의 이벤트에 웃음이 나왔었다.
하지만 그가 어렵게 꺼내 보인 진심에 어느새 웃음은 사라지고, 수아의 눈망울엔 그렁하게 눈물이 맺혔다.
“고마워요. 이렇게 소중한 반지로 프러포즈 해줘서. 반지가 너무 예뻐요. 너무너무 예뻐요.”
이윽고 맺혀 있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준 씨의 부족한 부분은 제가 채워줄게요. 그러니까 더는 노력하지도, 애쓰지도, 불안해하지도 말아요.”
“그 말은 저랑…….”
“네. 할게요. 하준 씨랑 결혼할 거예요.”
수아의 대답에 하준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마치 맞추기라도 한 듯 반지는 그녀의 손에 꼭 맞았다.
“하준 씨. 사랑해요.”
물기 어린 수아의 고백이 그의 심장에 날아와 꽂혔다.
하준은 대답 대신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고, 벌어진 수아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었다.
거실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키스는 침실까지 이어졌다.
등 뒤로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느껴짐과 동시에 단단한 하준의 몸이 수아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의 손끝은 마치 길을 찾는 듯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에 맞춰 수아의 몸이 움찔거렸다.
“하아. 하준 씨…….”
숨소리가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 그동안 참아왔던 본능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맺혔다.
“사랑합니다.”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기다림도 불안도 걱정도 그리고 터질 것 같은 이 심장 박동까지도 모두 담긴 그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하준의 입술이 수아의 목선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아.”
느껴지는 아찔한 감각에 수아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자 하준은 좀 더 깊숙하게 그녀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닿은 입술이 어찌나 뜨거운지 그의 입술이 머무른 자리마다 열꽃이 피어나는 듯 화끈거렸다.
집요한 그의 움직임을 따라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수아가 어깨를 파르르 떨며 하준의 목덜미를 끌어안자 침대 시트 위를 헤매던 그의 손이 들썩이는 수아의 허리 뒤를 파고들었다.
방 안이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와 뜨거운 숨결로 채워졌다.
그렇게 달콤하고도 짜릿한 둘만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들어온 아침 햇살이 수아의 얼굴 위에서 잘게 부서졌다.
“으음.”
미간을 좁히는 수아의 모습에 하준은 몸을 돌려 모로 누우며 쏟아지는 빛을 막아주었다.
뭐지? 단잠을 방해하던 빛이 갑자기 사라지자 수아는 상황을 살피려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가늘게 열린 시야 사이로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준의 모습이 보였다.
“왜 벌써 일어났어요. 좀 더 자도 되는데.”
아직 잠이 덜 깼는지 귀엽게 말아 쥔 주먹으로 눈을 비비는 수아의 모습에 하준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 몇 시인데요? 이런 데는 퇴실 시간이 11시이던데.”
“토요일, 일요일. 이틀 예약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졸린 와중에도 퇴실 시간을 걱정하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하준이 수아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틀을 예약했다고요? 왜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수아가 의아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계획상으로는 어제가 준비하는 날이었고, 오늘이 프러포즈하는 날이었으니까요.”
“아. 그럼 일요일에 근사한데 가자고 했던 게 여기를 말했던 거였어요?”
하준의 대답에 수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네.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수아 씨가 찾아오는 바람에 하루를 앞당기게 되었죠.”
하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바람에 준비한 촛불은 켜보지도 못했다고요. 그 촛불만 켜놓았어도 좀 더 근사해 보였을 텐데.”
아. 그래서 바닥에 있던 촛불들이 모두 꺼져 있었구나.
그제야 어제 일어났던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고개를 얕게 끄덕이던 수아는 시무룩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썹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까짓 촛불이 뭐라고. 그거 없이도 충분히 근사하고 멋졌으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촛불이 있었더라면 조금 더 낭만적이고, 조금 더 로맨틱할 수 있었을 텐데.
이미지 검색을 통해 촛불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확인했기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제가 하준 씨한테 프러포즈를 한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봤는데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수아는 두 손을 올려 그의 볼을 감쌌다.
“오늘 시켜 먹은 치킨이 너무 맛있는데 나랑 결혼할래요?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좋은데 나랑 결혼할래요? 이렇게 느닷없고 어이없는 이유로 청혼했을 거예요.”
응? 의외의 단어에 하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치킨을 먹거나 바람을 느끼는 것. 이런 사소한 일상들 모두를 하준 씨와 함께하고 싶다는 뜻이니까요.”
수아가 빙긋 웃으며 곧장 말을 이었다.
“촛불이 켜지고 꺼지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 하준 씨의 그 마음 하나면 충분해요.”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가슴을 울리자 하준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매일 이렇게 사랑스러우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오늘이라도 당장 결혼해버리고 싶잖아.”
그는 얼굴을 비비적대며 그녀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그러고 싶은데 결혼을 하려면 순서라는 게 있으니까요.”
순서? 하준이 눈을 번뜩 키우며 급히 몸을 떼어냈다.
“그 순서라는 것 저도 알고 있습니다.”
호오. 이미 알고 있다고? 수아가 의외라는 듯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는 눈썹을 들썩거렸다.
“프러포즈하고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상견례 하고. 그게 제일 기본적인 순서인 거 맞죠?”
그쯤이야. 하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주 주말이 어떻습니까?”
“네? 뭐가요?”
그의 물음에 수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키웠다.
“순서상으로 수아 씨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잖습니까. 돌아오는 주 토요일로 합시다.”
“흠. 토요일은 너무 빠르지 않아요?”
“빠르다고요?”
미세하게 구겨진 그의 표정에 수아는 아차 싶었다.
“아니, 제 말은 인사를 드리러 가려면 준비할 것들도 많을 텐데, 요즘 하준 씨 많이 바쁘잖아요. 일주일은 너무 빠르지 않을까 싶은 거죠.”
순발력을 발휘해 수아는 뱉어낸 말을 서둘러 수습했다.
“빠르긴요. 일주일이라는 길고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하나 저는 벌써부터 걱정인데요.”
하루라도 빨리 그 순서라는 거 해치워버립시다.
올려다본 그의 눈망울은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