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긴장
(10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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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긴장
2023.03.21.
달콤했던 주말이 지나가고 수아에게는 일상이 찾아왔다.
바쁘고 정신없는 오전 시간을 보내고, 그녀는 옥상정원으로 올라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지금 바빠? 통화할 수 있어?”
“응. 괜찮아.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이번 주 토요일에 집으로 갈까 하는데 엄마랑 아빠 집에 있을 건가 해서.”
대부분의 주말은 봉사활동으로 집을 비운다는 것을 알기에 묻는 말이었다.
“토요일? 봉사활동이 있기는 한데, 아마 6시 전까지는 집에 도착할걸?”
“6시? 알겠어. 그럼 토요일에 봐.”
수아가 전화를 끊으려는데.
“다른 때는 엄마 아빠 없어도 잘만 들렀다 가더니, 새삼스럽게 뭘 물어봐?”
“어?”
정곡을 찔린 듯 가슴이 뜨끔했다.
“실은 엄마랑 아빠한테 할 말이 있거든.”
“할 말?”
“응. 직접 만나서 해야 하는 중요한 말이야.”
“무슨 일이 있기는 있나 보네. 무슨 일인데 그래?”
궁금한 마음에 연수가 재촉하듯 물었다.
“몰라.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토요일에 들어.”
하준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수많은 질문이 쏟아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준과 통화라도 하게 해달라며, 독촉하고 하준을 괴롭힐 게 뻔했다.
특히 아버지 진우는 만나기 전까지 하준이 궁금해 잠도 설칠 모습이 눈에 선했다.
미리 말하지 않는 편이 모두에게 이로웠다.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며 통화를 끝낸 수아는 다시 사무실로 내려왔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토요일이 되었다.
혹시라도 차가 막힐 수도 있을 것 같아 조금 일찍 출발했더니 수아의 본가에 도착한 시간은 3시 15분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봉사활동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6시. 아직 2시간 45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어요.”
“그러게요.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오시겠죠.”
수아가 먼저 차에서 내렸고, 하준도 따라 내렸다.
“아. 잠깐만요. 트렁크에서 꺼낼 게 있어요.”
하준은 트렁크에 한가득 실려 있던 선물들을 꺼내 들고는 수아의 발아래에 내려놓았다.
“이게 다 뭐예요?”
수아는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며 상자들을 살폈다.
“뭐긴요. 수아 씨 부모님께 드릴 선물이죠.”
“선물이요? 그냥 과일바구니 하나 정도만 가져오지,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요.”
“그래도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자리인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달랑 과일바구니 하나라니. 하준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래요. 잘했네요. 잘했어. 어서 들어가요.”
뭐라고 한소리 더 할까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부모님께 드릴 선물이라는데.
수아는 못다 한 말을 삼키고는 그를 집으로 이끌었다.
“우와.”
집에 들어선 순간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진들에 하준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의 졸업사진들과 다양한 장소에서 찍은 가족사진들.
온 세상의 행복을 모두 모아놓은 듯이 사진 속 그녀는 행복 그 자체였다.
“수아 씨가 부모님께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사진만 봐도 알겠네요.”
분명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그 안에 슬픔이 고여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사진만 봐도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금방 알아차리면서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는 왜 몰랐을까.”
당신에게도 당신만을 바라보며 사랑해주는 가족들이 있었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그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잠깐 생각에 잠기던 하준은 이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
가져온 선물을 거실 한 곳에 잘 정리해둔 뒤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이 영화 개봉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TV에서 나오네요. 우리 이거 볼까요?”
“그래요. 재미있겠네요.”
그렇게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영화의 중반쯤 되자 화면에서는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장면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분명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이거 19세였나? 생각이 많아졌다.
하준과는 더한 것도 함께한 사이였지만 어쩐지 부끄러워 수아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수아 씨가 이런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는지 몰랐습니다.”
하준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었다.
“미리 말해주지 그랬습니까. 그랬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텐데.”
“뭐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글쎄요…….”
느른한 음성과 함께 그는 상체를 기울여왔다.
“이런 장르를 취향이라고 인정하는 순간부터 바로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코앞까지 다가온 하준의 입술이 수아의 입술 위로 포개지려던 바로 그때.
“수아야!”
서로의 입술까지 남은 거리는 고작 1센티 남짓.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헉. 하준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고, 수아도 그에 못지않은 속도로 일어나 서둘러 TV 전원을 껐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지만, 들쑥날쑥 엉망인 호흡 소리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수아야. 혹시 집 앞에 있는 차. 누가 주차했는지 알아?”
수아의 엄마 연수가 거실로 향하는 복도로 들어섰다.
“어? 여기 못 보던 신발이 있는데? 손님이라도 온 건가?”
그녀의 뒤를 따르던 수아의 아빠 진우가 신발장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하준의 신발을 가리켰다.
“그래? 그런데 얘는 왜 불러도 대답이 없어? 수아야! 이수…….”
거실로 들어서던 연수와 진우는 거실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던 하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십니까!”
아직 6시가 되려면 좀 더 시간이 남았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오실 줄이야.
인사하는 하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구……?”
인사를 하기에 받기는 했지만 제집에 나타난 낯선 인물의 등장은 꽤 당황스러웠다.
연수와 진우가 반쯤 접힌 눈매로 하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스캔하기 시작했다.
기다란 키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그리고 깎아놓은 듯한 이목구비까지.
어디 한 곳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비주얼의 남자였다.
이런 남자가 왜 우리 집 거실에 있는 거지? 점점 더 궁금증이 더해질 때쯤.
“엄마. 여기는…….”
“저는 수아 씨 남자친구 민하준이라고 합니다.”
소개하려던 수아의 말을 재빠르게 가로채며 하준이 답했다.
“네? 남자친구요?”
그럴 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자친구의 ‘남’자도 못 꺼내게 하던 딸이 아니었던가.
정말이야? 연수가 눈썹을 들썩이며 눈빛으로 물었다.
“말이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우리 자세한 이야기는 앉아서 하는 게 어떨까?”
하하. 수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어! 그래. 일단 앉자. 일단 앉아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수와 진우가 소파에 앉으려던 순간.
“어머님. 아버님. 수아 씨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하준의 폭탄 발언이 이어졌다.
“뭐? 겨, 결혼?”
컥. 얼마나 놀랐는지 진우는 먹은 것도 없이 들이키던 호흡에 사레까지 들렸다.
“제가 수아 씨에 비해 많이 부족하겠지만 최선을…….”
진우가 입을 틀어막으며 기침하는 사이 하준은 준비해온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 잠깐만.”
겨우 기침을 가라앉힌 진우가 손을 내저으며 하준의 말을 막았다.
“우리 조금만 천천히 가지. 이 사람이랑 나는 수아한테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다고.”
딸의 연애만으로도 놀라운데 느닷없이 결혼이라니.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든 인사가 그렇듯 그때부터 하준에 대한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래. 나이는 어떻게 되나?”
“30살입니다.”
“직업은?”
“회사원입니다.”
하준은 안주머니에서 명함 두 장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공손하게 올려놓았다.
[현성 그룹 부회장 민하준]
명함을 확인한 연수와 진우는 혹시나 잘못 본 건가 싶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혹시 자네 아버님 성함이…….”
“네. 민 현자 성자 되십니다.”
헐. 뉴스에서나 봐오던 민현성 회장의 아들을 딸의 남자친구로 소개받을 줄이야.
충격에 말문이 막혀 거실에는 뜻하지 않게 정적이 흘렀다.
수아는 슬쩍 시선을 돌려 하준을 살폈다.
입술을 말아 문 그의 입과 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얼마나 세게 말아 쥐었는지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불편한 자리는 짧을수록 좋은 거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나머지는 천천히 알아가는 거로 하자고.”
긴장한 그의 모습에 수아는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 지었다.
하긴. 여기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많이 불편하겠지.
수아의 말에 연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밥은? 밥은 먹었어?”
“아니. 아직 못 먹었어.”
“그럼 방에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차려줄게.”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밥은커녕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넘기지 못할 것 같아 거절하려는데.
“괜찮긴. 씨암탉은 못 잡아줘도 밥 한 끼는 든든하게 먹여서 보내야지. 수아랑 올라가 있어요. 금방 차려줄게요.”
연수가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진우가 뒤를 따랐다.
씨암탉이라니. 벌써 사위로 생각한다는 거야. 뭐야.
연수의 말을 곱씹던 수아가 피식 웃었다.
“제 방은 2층에 있어요. 여기로 올라가면 돼요.”
두 사람은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2층에 올라서자 직접 만든 것 같은 방패가 눈에 띄었다.
어쩐지 [수아의 방]이라는 큼직한 글자보다 그 아래에 적힌 문구에 더 시선이 갔다.
[노크 없이는 절대로 들어오지 마시오.]
강하게 표현하려던 건지 글씨 옆에는 해골까지 그려져 있었다.
“여기 들어가도 괜찮은 겁니까? 어쩐지 들어가면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하준이 방패에 그려진 해골을 가리켰다.
“아. 그거요? 신경 쓰지 말아요. 중2병 걸린 여학생의 소심한 반항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웃어넘기면 돼요.”
“소심한 반항이요?”
“그 시기가 그렇잖아요. 아직은 어린아이로 보는 부모님과 이제 어른이 된 것 같은 자녀들의 의식이 대립하는 시기.”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받기 위한 소심한 반항이었죠.”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하며 수아가 싱긋 웃었다.
“어려서부터 비밀이 많이 있었나 봅니다.”
“비밀보다는 지켜야 할 물건들이 많았죠.”
“얼마나 대단한 물건들이기에 해골까지 그려 넣은 겁니까.”
“음. 벽에 붙은 연예인 브로마이드랑 잡지들. 그리고 책 대신 책꽂이를 차지하고 있던 여러 굿즈들까지. 어디 지켜야 할 게 한두 가지였겠어요?”
순간 하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물건 중에 바닷물 것도 있는 겁니까?”
묻는 그의 표정이 어이없을 만큼 진지했다.
아. 이 남자 뒤끝이 지구를 다섯 바퀴 돌고도 남겠네.
“강바다 씨는 그때 데뷔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지켜야 할 물건들이 있었을 리가 없겠죠?”
수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빨리 들어가요.”
서둘러 화제를 돌리려는 행동에 하준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따랐다.
방에 들어서자 수아의 방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파스텔 톤의 커튼과 침구. 그리고 방 곳곳에 놓여 있는 아기자기한 소품들까지.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이 방 전체에 담겨 있었다.
“그나저나 아까는 진짜 깜짝 놀랐죠?”
예고 없이 들이닥친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럼요. 다시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하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어땠습니까?”
“네? 뭐가요?”
“너무 긴장해서 목소리도 떨린 것 같고, 말도 더듬거린 것 같은데.”
과거 이야기에 잠시 잊고 있던 긴장감이 다시 밀려들었다.
“많이 긴장됐어요?”
“그럼요.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요? 지금도 그래요?”
“아마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계속 이 상태일 것 같아요.”
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백 명, 수천 명 앞에서도 늘 당당하던 사람이 겨우 두 명 앞에서 이렇게 긴장을 하다니.
“대체 얼마나 심하게 뛰기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지 소리나 한번 들어봐야겠다.”
수아는 하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하준의 심장과 수아의 귀가 맞닿았다.
쿵쿵. 쿵쿵.
“우와. 진짜네요. 심장 소리가 엄청나게 커요.”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술을 모았다.
“그렇다니까요.”
“하긴. 저도 하준 씨 부모님께 처음 인사드리던 날 엄청 긴장하긴 했었는데.”
“수아 씨도 이랬다고요? 저 진짜 심장이 너무 뛰어서 갈비뼈까지 진동이 오는 것 같습니다.”
하준이 미간을 좁히며 갈비뼈 부근을 움켜쥐었다.
“갈비뼈가 아파요? 많이 아파요?”
수아가 황급히 몸을 떼어냈다.
“후우우. 저 따라서 심호흡 해봐요.”
손을 위아래로 움직여가며 수아는 깊은 호흡을 유도했다.
“후우우우.”
그녀의 손 움직임을 따라 하준의 어깨가 오르내렸다.
“저희 부모님. 하준 씨 부모님만큼이나 좋으신 분들이에요. 분명히 당신 마음에 들어 하실 거니까 이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괜찮아. 괜찮아. 그의 심장을 달래듯 수아는 그의 가슴팍을 작게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