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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그때 그 아이 (103/105)


103. 그때 그 아이
2023.03.25.



 


“수아야. 밥 먹게 어서 내려와.”

“응. 지금 내려가.”

연수의 부름에 수아와 하준은 1층으로 내려갔다.


“어서 와서 앉아요.”

연수는 손에 들린 밥그릇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반찬이 조금 허술해도 이해해줘요. 당연히 수아만 오는 줄 알고 아무것도 준비를 못 했어요.”

“아닙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하준 씨 이거 먹어봐요. 우리 엄마가 불고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드시거든요.”

수아가 그의 수저 위에 불고기 한 점을 올려주며 방긋 웃었다.


“네, 고마워요.”

나도 저랬을 때가 있었는데. 연수는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벌써 결혼이라니.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컸을까.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 그렇지 여보?”

연수는 고개를 끄덕이는 진우를 바라보다가 말을 덧붙였다.


“연애를 너무 안 해서 남자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잖아. 어렸을 때는 안 그랬는데 말이지.”

“엄마!”

그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아 수아는 다급하게 연수를 불렀다.


“너 기억 안 나? 어렸을 때 병원에서 만난 오빠가 퇴원했다고 몇 날 며칠을 울고불고 떼쓰고 했던 거.”

과거를 회상하는 연수의 표정이 한껏 들떠 있었다.


“그걸 보면서 남자한테 관심이 많을 것 같다고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데. 이건 뭐 너무 없어서 걱정했으니.”

연수는 쯧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 그 얘기는 그만하지.”

“왜? 남자친구 앞이라서 그래?”

하준을 슬쩍 쳐다보고는.


“아이고. 그게 벌써 몇 년 전 얘긴데.”

허공에서 손까지 내저으며 해맑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때 병원에서 봤던 남자애는 요새 뭐 하고 지내나 몰라. 그 이후로는 본 적이 없네.”

연수의 혼잣말에 하준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랐다.

병원에서 만났던 남자아이.

그러니까 20년 전의 하준이는 가끔 부모님과 어린 시절 사진을 꺼내 볼 때면 소환되던 추억의 인물이었다.

싫다는 남자아이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는 것.

남자아이가 주사를 맞을 때면 자기가 맞는 것처럼 요란을 떨면서 울었다는 것.

나중에 커서 오빠랑 결혼하겠다면서 고집을 부렸다는 것.

말도 없이 퇴원한 남자아이를 못 잊어서 몇 날 며칠을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는 것.

수아를 놀릴 목적으로 가끔 하던 이야기를 설마 오늘 같은 날 꺼낼 줄이야.


“그 오빠. 지금 회사 다니면서 잘 지낸대.”

수아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콕콕 찌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희 그동안 계속 연락하면서 지냈던 거야?”

연수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어쨌든 그 오빠 소식은 내가 잘 알아. 엄마도 이제 곧 잘 알게 될 테고.”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잘 알게 될 거라니?”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툭툭 뱉어내는 수아의 말을 연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제 자주 볼 수 있을 테니까 근황쯤은 엄마가 직접 알아볼 수도 있다는 뜻이야.”

“자주 볼 수 있다니.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수아 너는 알고 있다는 거지?”

“응. 알고 있어.”

“지금은 어때? 건강해 보여? 무슨 일 하면서 지낸대?”

예비 사윗감이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깜박한 건지 연수는 상체를 기울이며 거침없이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렇게 궁금하면 엄마가 직접 물어봐. 지금 엄마 앞에서 밥 먹고 있잖아.”

수아가 하준을 향해 고개를 한번 까딱거렸다.


“……응?”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연수의 눈동자가 천천히 하준을 향해 움직였다.


“설마…….”

“맞아. 20년 전 병원에서 만났던 그때 그 남자아이가 하준 씨야.”

네. 제가 바로 그 아이입니다. 하준은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며 간신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어머. 어머. 그렇게 그 오빠랑 결혼할 거라고 징징대더니 진짜로 결혼을 하는 거야?”

연수가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말없이 밥을 먹던 진우의 눈동자도 크게 벌어졌다.


“엄마.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지? 엄마가 자꾸 그러니까 하준 씨가 밥을 못 먹잖아. 이러다 체하겠어.”

“응?”

그제야 수저를 내려놓지도, 그렇다고 입에 넣지도 못한 채 멈춰 있는 하준의 모습이 연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 그래. 체하면 안 되지. 어서 먹어요. 좀 놀라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놀라실 만합니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치 없는 식은땀은 하준의 척추를 타고 끝도 없이 흘러내렸다.

식사를 끝낸 네 사람은 거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나저나 진짜 인연은 인연이었나 보네. 그렇게 헤어지고 지금 이렇게 다시 만난 걸 보면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지 연수는 하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여보도 무슨 말 좀 해. 아까부터 왜 아무 말이 없어?”

주변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딸 바보라 이것저것 트집을 잡거나 무조건 반대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식사 전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의아했다.


“하준 군 부모님께서는 우리 수아를 허락하시겠나?”

오랜 침묵을 깨고 진우가 물었다.

현성 같은 대기업에서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며느리를 좋아할 리 없지 않은가.

재벌의 결혼 문화를 모르지 않기에 진우는 그것이 내내 걱정이었다.


“당연히 허락하실 겁니다.”

“그걸 어떻게 자신하지? 결혼하겠다고 말씀은 드렸나?”

“아니요. 정식으로 결혼 허락을 받은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희 부모님께서는 이미 수아 씨를 만나보셨고, 무척이나 좋아하십니다.”

하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빠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아는데, 아버님은 다른 회장님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셔.”

수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마 엄마랑 아빠도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될 거야. 나를 진짜 딸처럼 아껴주셔. 그러니까 그 부분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다행이고.”

수아의 대답에 굳어 있던 진우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럼 우리 결혼 허락해주는 거야?”

어째 하준보다 수아가 더 대답을 기다리는 듯 보였다.


“허락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우리 딸이 좋다는데.”

“진짜? 고마워 엄마. 고마워 아빠.”

“감사합니다. 어머님. 아버님.”

하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수와 진우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

하준은 진우와 술을 마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수아의 본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하아.”

익숙한 곳이 아니면 쉽게 잠들지 못하기에 그는 손님방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몸을 뒤척거렸다.


“그래도 손님방이 있어서 다행이네.”

거실 소파에서 자야 했다면 예비 사위가 이토록 잠자리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게 되실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을 더 뒤척이던 하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수아 씨. 혹시 잠들었습니까?]

[아니요.]

몇 초 만에 날아온 수아의 메시지에 하준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많이 졸리지 않으면 잠깐 얼굴 좀 보여줄래요?]

[그래요. 어디에서 볼까요?]

[제가 2층으로 올라가겠습니다.]

1층 손님방에 있던 하준은 맞은편에 위치한 수아의 부모님이 신경 쓰여 자신이 이동하는 방법을 택했다.

2층이라면 새벽에 부모님께서 올라오실 일도 없을 테니 그에게는 나름의 안전지대인 셈이었다.


[그럼 계단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조심히 올라와요.]

하준은 휴대폰의 손전등 기능을 실행시켰다.

살금살금. 하준은 남의 집에 들어온 도둑처럼 발뒤꿈치를 바짝 치켜들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행여 무슨 소리라도 날 새라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하준은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에 멈춰서 계단 끝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아!”

손전등 불빛 끝자락에 수아의 모습이 담겼다.

수아는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기를 반복하며 빨리 올라오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 갈게요. 하준은 서둘러 계단 위에 발을 얹었다.

끼이이익.

이런. 뭐가 이렇게 요란해. 아까 올라갈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녀의 부모님이 깨실까. 하준은 차마 다음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괜찮으니까 그냥 올라와요. 어차피 우리 부모님 잠귀가 어두우셔서 한번 잠들면 잘 안 일어나세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하준은 긴 숨을 내쉬며 멈춰 있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몇 번의 소름 돋는 소리 끝에 겨우 계단 끝에 다다랐다.


“후아. 긴장의 대장정이었습니다.”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쉰 그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수아와 하준은 계단 끝자락에 앉아 커다란 창문 밖에 떠 있는 달을 바라봤다.


“내일은 저희 집에 가는 거 어떻습니까?”

하준이 고개를 돌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허락하신 거나 마찬가지이지만 저희 부모님께도 직접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수아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시라도 결혼이 부담스럽다면 억지로 가지 않아도 됩니다. 조금 더 고민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돼요.”

프러포즈는 자신의 일방적인 결정이었으니, 그녀가 시간을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 기다릴 생각이었다.

기다림은 하준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쉬운 일이었으니.


“억지로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당연히 가야죠.”

수아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고마워요.”

하준의 입술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그나저나 결혼 준비하려면 엄청 바빠지겠네요. 웨딩사진도 찍어야 하고, 청첩장에 예식장 예약까지.”

손가락을 접으며 할 일을 세던 수아가 히익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키웠다.


“그러게요. 지금보다 더 바빠지겠네요.”

“아. 미리 말해두는 건데 우리 웨딩사진 촬영할 때 꼭 들어가야 하는 장면이 있어요.”

수아는 휴대폰에 저장해두었던 사진을 찾아 하준의 얼굴을 향해 내밀었다.

빗속에서 우산을 쓴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신랑과 신부의 모습.


“비 오는 날 사진을 찍고 싶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진짜 비가 오는 날 찍는 게 아니라 위에서 물을 뿌려주는 거죠.”

“왜 하필 비 오는 장면입니까?”

화창하고 밝은 미래를 표현해야 할 웨딩사진에서 왜 하필 비 오는 날인 건지. 하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준 씨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요?”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병원이었죠.”

“아니. 어른이 되어서 처음 만났던 날이요.”

“어른이 되어서라면. 산에서 만난 걸 말하는 겁니까?”

“네. 맞아요. 산에서 갑자기 비가 내렸잖아요.”

수아는 달뜬 얼굴로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바람에 하준 씨가 집에 돌아가지 못했고, 그래서 저랑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죠.”

“아. 그날…….”

하긴. 그날 그 시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자신은 곧장 산을 내려왔을 테고, 그렇게 서로 엇갈린 채로 또다시 각자의 삶을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하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웨딩 앨범의 첫 장면을 비 오는 날로 하고 싶어요. 어때요? 괜찮은 것 같지 않아요?”

어쩐지 들려오는 목소리가 나른하게 늘어지는 것 같아 하준은 고개를 돌려 수아를 바라보았다.

졸음이 쏟아지는지 그녀의 눈이 감기고 떠지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져 있었다.


“수아 씨 졸리구나. 방에 들어가서 편히 자요.”

“아닌데. 졸린 거 아닌데.”

아니기는. 눈에 졸음이 가득 찼는데.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이제 그만…….”

하준이 일어서려 다리에 힘을 주자 수아는 그의 팔을 붙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조금만. 우리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

그녀의 느릿한 음성이 고요한 적막을 가르며 들려왔다.

수아가 그의 넓은 어깨 위로 고개를 기울여오자 하준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럼 아주 조금만입니다.”

“네. 아주 조금만요.”

더디게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그의 마음과는 달리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새 수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쌔액. 쌔액. 그녀의 숨소리가 귓가에 맺히고, 그녀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이렇게 금방 잠들 거면서.”

하준은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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