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이러니까 참을 수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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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이러니까 참을 수가 없지
2023.03.28.
“엄마. 이게 다 뭐야?”
다음 날 아침, 하준의 자동차 트렁크에 짐을 한가득 싣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에 수아가 물었다.
“너도 오늘 하준 군 부모님께 인사 갈 거 아니야.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잖아.”
내가 그 얘기를 했었던가? 수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네가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엄마, 아빠 잠귀 안 어두워.”
어느새 다가온 연수가 수아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응? 잠귀라니? 그게 무슨…… 앗!”
연수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곱씹던 수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괜찮으니까 그냥 올라와요. 어차피 우리 부모님 잠귀가 어두우셔서 한번 잠들면 잘 안 일어나세요.]
“그, 그런 걸 왜 엿듣고 있는 거야!”
수아가 눈을 흘기며 따져 물었다.
“어머. 그건 엿들은 게 아니지. 들리니까 그냥 들은 거지.”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수아는 씩씩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여보. 짐 다 실은 것 같은데. 수아야. 어서 출발해야지.”
짐을 모두 실은 진우가 트렁크 문을 닫았다.
“하준 군은 운전 조심하고, 수아 너는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졸지 말고.”
“알겠어. 걱정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
“어머님. 아버님.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요. 조심해서 올라가요.”
인사를 나눈 뒤 수아와 하준은 차에 올라탔다.
“어때?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응. 무엇보다 수아가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지 뭐.”
연수와 진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골목을 빠져나가는 자동차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하준과 수아는 현성의 집을 찾았다.
“수아 씨 부모님 찾아뵙고 결혼 허락받고 오는 길입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얼굴조차 보기 힘든 아들 녀석이 불쑥 찾아온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결혼 허락을 받았다니.
현성은 하마터면 손에 들린 커피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어제 수아 양 본가에 가서 결혼 허락을 받고 왔다는 거야?”
“네. 그리고 저건 수아 씨 부모님께서 아버님, 어머님께 전해드리라고 챙겨주신 겁니다.”
잘못 들었나 싶어 하준의 말을 따라 하며 되물었는데, 아들의 반응은 황당하리만큼 태연했다.
“너는 대체 그런 중요한 얘기를 왜 미리 하지 않은 거야?”
현성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네?”
“인사를 드리러 가기 전에 미리 말을 했었어야지!”
어휴. 현성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 눈가를 쓸어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아. 내가 또 뭔가 잘못을 저질렀나 보다.
하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당신은 왜 애한테 화를 내고 그래요. 하준이 놀랐잖아요.”
혜선도 현성 못지않게 놀라긴 했지만, 당황하는 아들의 모습에 남편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아니. 내가 화를 낸 게 아니고.”
좁아졌던 현성의 미간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그래도 첫인사인데 아무것도 챙겨 보내지를 못했으니까 아쉬워서 그렇지…….”
애써 괜찮은 척해보려 했지만 숨겨지지 않는 아쉬움이 그의 목소리에 담겨 흘러나왔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하준 씨가 트렁크 터질 만큼 많이 챙겨 왔거든요.”
눈을 껌뻑이며 앉아 있던 수아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준이가 챙겨갔다고? 뭘 챙겨갔는데?”
“음. 홍삼이랑, 양주랑 한우랑 과일이랑. 그리고 또…….”
해맑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접어가며 말을 하는 수아의 모습에 혜선과 현성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하준아. 어떻게 그런 걸 챙겨갈 생각을 다 했어?”
“어. 그러니까 그게…….”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낸 거라고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하나.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고민하던 하준은 결국.
“지, 지훈이가 알려줬습니다.”
가장 쉽고 만만한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그래. 뭐라도 챙겨갔다니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다음에는 아빠나 엄마한테 미리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런 과정들을 거쳐야 너를 결혼시킨다는 게 실감이 날 것 같거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하준의 입가가 조금 풀어졌다.
‘이제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구나.’
현성은 문득 20년 전 하준을 입양하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가진 거라곤 그저 절망뿐이던 10살 어린아이가 얼마나 안쓰러웠던지.
현성은 그때 결심했었다.
상처 많은 이 아이가 더 이상의 아픔은 겪지 않도록 자신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되어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그런데 그는 오늘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들이 만들어갈 행복한 가정을 위해 자신의 울타리를 좀 더 넓고 튼튼하게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자 결혼식 준비는 기다렸다는 듯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하준의 집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하준 씨. 우리 청첩장 나온 것 같아요.”
받자마자 내용물을 확인했는지 현관 쪽에서 수아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하준은 고개를 들어 총총거리며 뛰어오고 있는 수아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나왔어요.”
수아는 하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상자 속에서 청첩장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신랑 민하준 / 신부 이수아]
“이제야 우리가 결혼을 한다는 게 실감이 나는 것 같아요.”
눈을 반짝이며 청첩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하준은 어쩐지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설마 지금 후회하는 겁니까?”
하준의 장난기 가득한 물음에.
“어? 어떻게 알았어요?”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키우며 답했다.
“……뭐라고요?”
“물어보니까 말하는 건데.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건 아닐까. 좀 더 기다리다 보면 하준 씨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들긴 했었거든요.”
제 예상과는 다른 수아의 대답에 하준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왜 말이 안 돼요?”
“저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호오. 이 남자 보게. 수아의 입술이 미세하게 들썩거렸다.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이곳저곳 열심히 찾다 보면 하준 씨처럼 ‘짠’ 하고 나타날지도 모르죠.”
“저 같은 사람이 그렇게 흔한 줄 압니까? 돈 잘 벌지. 똑똑하지. 잘생겼지. 결정적으로 수아 씨밖에 모르잖습니까.”
잘 봐. 나라고 나. 20년 동안 당신 하나만 사랑해온 나.
하준은 그녀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피식. 수아는 입술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로 두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감쌌다.
“하긴. 이렇게 완벽한 남자가 흔하지는 않지.”
쪽.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어떡하지? 멋있고, 귀엽고, 사랑스러워. 이러니까 내가 뽀뽀를 참을 수가 없지.”
수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이라도 꿀이 떨어질 듯 달달한 눈빛으로 하준을 바라보았다.
하. 이 여자 좀 보게.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네.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이성의 끈을 자신이 싹둑 잘라버렸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는 있을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게 웃고 있던 수아를 향한 하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번에는 수아 씨가 먼저 시작한 겁니다.”
결재판을 덮는 하준의 입꼬리가 음흉한 그의 미소와 함께 천천히 위로 말려 올라갔다.
*
팀원들에게 청첩장을 돌리기로 한 날.
조수석에 앉아 있던 수아는 가방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초조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뭘 그렇게 긴장합니까? 그냥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데.”
“보통 사람이면 이렇게 긴장하지도 않죠. 결혼 상대가 부회장님이니까 그런 거지.”
“저요? 제가 왜요?”
“아. 몰라요. 어쨌든 청첩장에 적힌 남자가 부회장님이라는 건 제가 상황 봐서 천천히 얘기할 테니까, 그전까지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티 내지도 말아요.”
당부를 하고서도 불안했는지 수아는 아랫입술을 잘근댔다.
“그런데 그걸 꼭 술을 마시면서 얘기해야 하는 겁니까?”
청첩장을 전달하기 위해 팀원들과 술자리를 갖기로 했다는 수아의 말이 떠올라 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요. 원래 그런 거예요. 와달라고 부탁하는 거니까요.”
“약속 장소가 어딥니까?”
“약속 장소는 왜요? 그건 왜 물어보는데요?”
느닷없이 높아진 그녀의 목소리에 하준이 흠칫 놀랐다.
“설마 거기 오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아니지? 아닌 거지? 수아의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왜요? 제가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안 되죠. 오늘은 그냥 청첩장만 줄 생각이라고요.”
내가 결혼할 사람이 당신이라고 밝힐 용기가 아직은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절대로 올 생각 같은 건 하지 말아요. 알겠죠?”
“장소를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갑니까?”
그녀가 얼굴을 들이밀며 대답을 재촉하자 하준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아무튼 절대로 오지 말라고요.”
말을 마친 수아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또다시 손에 들린 가방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
회사 근처 소고깃집.
“수아 씨. 뭐 축하받을 일 있어? 갑자기 왜 저녁을 쏜대?”
눈치 빠른 희수가 소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물었다.
“네. 사실은 그게…….”
“혹시 결혼해?”
“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시선을 떨군 채로 웅얼거리던 수아의 시선이 번쩍 들렸다.
“입사한 지 일 년도 안 된 수아 씨가 우리한테 축하받을 일이 뭐가 있겠어.”
이야. 진짜 눈치 하나는 타고났구나.
언젠가 홍보팀 대리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희수가 과장 직급을 빨리 달 수 있었던 이유는 업무능력도 능력이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눈치가 빠른 게 큰 몫을 했을 거라던 그의 말.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진짜야? 진짜로 결혼하는 거야?”
건너편에 앉아 있던 민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네. 어쩌다 보니 제가 결혼을 하게 되었네요. 하하.”
아오. 결혼한다는 말이 왜 이렇게 어색하냐.
힘껏 끌어올린 입꼬리 끝에서 파르르 경련이 일어났다.
“어머. 웬일이니. 전혀 몰랐어. 어쩜 그렇게 연애하는 티를 하나도 안 낼 수가 있어?”
“그러게. 역시 희수 씨 눈썰미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직원들은 희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서? 예비 남편분은 무슨 일 하시는데?”
희수의 질문에 순간 흠칫 놀랐다.
절대로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그녀가 물으니 뭔가를 알고 묻는 것처럼 심장이 따끔거렸다.
“그, 그냥 회사 다녀요.”
그냥 회사 아니고 우리 회사인 게 문제지만.
“청첩장은요? 청첩장은 아직 안 나왔어요?”
“나왔어요. 그래서 오늘 드리려고 가지고 오긴 했는데.”
“가지고 왔으면 빨리 꺼내놨어야지. 빨리 줘봐. 빨리.”
다들 뭐가 그리 신나는지 발을 동동 구르고, 내민 손바닥을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그들의 재촉에 수아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 속 청첩장을 꺼내 한 명 한 명에게 전했다.
[신랑 민하준 / 신부 이수아]
수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팀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청첩장 속 이름을 확인하던 팀원들의 표정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는 불판이 무색하게도 테이블 위에는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어머. 예비 신랑분 이름이 민하준이네요. 우리 부회장님 이름이랑 똑같다.”
고맙게도 한 여직원이 정적을 깨주었지만, 그녀의 말은 수아에게 있어서 정적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하하. 하하. 수아는 대답 대신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수아. 너 어쩌려고 이러냐. 어차피 결혼식장에서 다 알게 될 텐데. 그냥 지금 말해버려.
마음속 외침이 귓가를 시끄럽게 울려댔지만 수아는 애써 외면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자기가 부회장님이랑 결혼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의미심장한 희수의 발언에,
“어머. 과장님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팀원들이 손까지 내저으며 웃어대는 바람에 수아는 더더욱 사실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죠?”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더니 낮게 가라앉은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