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충격적인 광경에 입을 벌린 채 연신 눈을 비볐다.
다시 바라보니 라스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데미안과 시선이 맞닿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였다.
'방금 봤던 것들이 전부 환상이라고…? 분명 내공은 없을 텐데…. 설마, 살기(殺氣)만으로…?'
나는 속으로 경악했다.
아무래도 내가 본 환상은 데미안이 내뿜은 살기(殺氣)의 영향인 것 같았다.
어떠한 깨달음을 얻어 경지에 오른 살의(殺意)는 예리한 검보다도 날카롭다고 했던가.
그는 이 자리에서 정확히 나에게만 살기(殺氣)를 내비친 것이다.
단순히 살기를 발산하는 것만으로도 인지를 무너트릴 정도였다.
새삼 그가 얼마나 상식 이상의 괴물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데미안의 살기는 마치 헛짓거리 하면 용사건 뭐건 이 자리에 있는 전부를 모조리 죽일수 있다 라는 경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아직 내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저 괴물이라면 내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우 지릴뻔했네.
―정적이 흘렀다.
“…….”
나의 충격적인 발언에 이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 당황스럽겠지. 자신의 의견조차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던 말더듬이가 아주 제대로 사고를 쳤으니.
아벨 크로이가 지금껏 어떤 취급을 당해왔는지 알기에 매우 통쾌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토해낸 라스가 이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방금 전 데미안, 아니 소천마의 살기를 맛봐서 일까.
명색이 용사인 그가 내뿜는 살기는 애들 장난처럼 느껴졌다.
“야, 괴물. 너 미쳤냐…?”
굼벵이, 괴물, 말더듬이.
이 모든 게 전부 나를 부르는 명칭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아벨 크로이가 파티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상 짐꾼인 데미안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처지라 봐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중 아벨은 자신은 다르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데미안을 괴롭혔다.
결국, 용사 일행이나 아벨이나 데미안의 입장에서는 별반 다를 바 없는 쓰레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살생부에 올라와 있는 거겠지.’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오히려 그 시선을 즐기듯이 당당히 말했다.
“그래, 미쳤다. 이 새끼야. 그러니까 파티 때려 치겠다고. 어차피 니들도 내가 나갔으면 했잖아? 안 그래?”
허탈한 듯 웃음을 터트린 라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 이 쓸모도 없는 괴물 새끼가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까부는지 모르겠네? 요새 좀 오냐오냐 해줬더니 네가 뭐라도 되는 거 같아? 착각하지 마. 넌 그냥 쓰다 버리는 도구일 뿐이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바뀌는 건 없다고. 이 쓰레기 새끼야.”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이 금발 뾰족 머리 양아치 새끼는 더럽게 잘난 외모와 용사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봐줄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다 이런 폐기물을 생성해낸 건지, 내가 설정했지만 참으로 엿 같았다.
잔뜩 화가 난 라스가 소리를 치며 내 어깨를 밀쳤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툭.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던 가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라스가 과장된 몸짓과 함께 구역질 하는 시늉을 했다.
“우웩! 저 면상 좀 봐.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진짜 볼 때마다 역겨워 죽겠네. 야! 일단 그 가면부터 써봐!”
방금까지 나를 보고 있던 일행들은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유일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짐꾼인 데미안 뿐 이었다.
“…….”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주웠다.
아벨의 몸에 빙의된 탓인지 지금껏 그가 당해왔던 수모와 감정들이 아주 생생하게 느껴졌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살의가 끓어올랐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참자. 조금만 참자.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때, 기사단장인 테레사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시오. 라스 경.”
특유의 싸늘한 어조로 말하는 테레사를 향해 라스가 눈을 부라렸다.
“뭐?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여기서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기 보다는 우선은 아벨의 말을 들어보고 결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러니까 네가 뭔데 나한테….”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성녀 리아가 라스에게 바짝 붙어 팔짱을 낀 채 아양을 떨었다.
“용사님. 우선은 테레사 님 말대로 하는 게 어떨까요?”
부드러운 가슴이 팔에 닿자, 라스는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크흠. 그래. 내가 좀 흥분한 거 같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연신 리아의 허벅지를 더듬어댔고, 얼굴을 붉힌 리아는 옅은 숨을 내쉬며 조용히 속삭였다.
“하아…. 용사님은 파티의 리더로서 정당한 반응을 보이신 것 뿐 이에요~ 그리고 어차피 저 머저리가 파티에서 나가게 되면 공적은 다 저희 몫이잖아요?”
아까 전 신체를 강화한 탓에 속삭이는 것조차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그렇지. 역시 날 이해해주는 건 리아 밖에 없군.”
아주 좋댄다. 병신.
정체가 뭔지도 모르고. 멀지 않은 미래에 저 년의 정체를 알게 되어 경악할 라스의 얼굴이 머리에 그려졌다.
“그래. 아벨. 우리 파티에서 나가고 싶다고? 좋아. 대신 네가 자발적으로 나간다고 했으니 아무런 보상도 공적도 줄 수 없다.”
애초에 그딴 건 바라지도 않았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라스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뭐지?”
“네 말대로 나는 자발적으로 나가는 거니까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돼. 대신 내 몫의 일부분을 데미안에게 주었으면 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데미안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천악천(天惡天)의 성격상 지금은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내게 흥미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별 뜻은 없어. 위선처럼 보일지 몰라도 우리 파티에서 남모르게 가장 고생한 그가 조금이라도 더 보상을 받았으면 했어.”
이번에는 린이 물어왔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 가장 고생? 대체 저 인간이 뭘 했다고 가장 고생이라는 말을 하는 거지? 나가는 마당에 이제 와서 착한 척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매번 그 많은 짐을 들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린이 끼어들었다.
“짐꾼이 짐을 드는 게 고생이라고? 짐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닌가? 아니, 오히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용사파티에 들어와 짐꾼 역할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는 게 정상적인 사고방식 아니야? 하여간, 천한 것들끼리 서로 감싸고돌지. 주제도, 은혜도 모르고 말이야. 정말 역겨워 죽겠다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게 아닐 텐데. 그동안 우리가 데미안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네가 제일 잘 알거 아니야. 린.”
린의 전신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한번만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면 잿더미로 만들 줄 알아.”
상황을 지켜보던 데미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아벨님! 린님!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괜히 저로 인해….”
“닥쳐. 짐꾼 주제에 감히 어딜 끼어들어!”
“…죄, 죄송합니다.”
린이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괜히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당장 꺼져버려. 그 역겨운 면상 꼴도 보기 싫으니까.”
테레사의 싸늘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아벨,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았다. 허나 그대는 마치 우리가 데미안을 괴롭혔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군. 내가 똑바로 이해한 게 맞는가?”
“다 알면서 뭘 물어? 테레사. 당신은 가담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거야 말로 위선이지. 다른 놈들이 데미안을 가축만도 못한 취급을 할 때 당신은 그저 보고만 있었잖아. 알면서도 못 본 척 방관만 한 당신이나 나나 전부 다 똑같아.”
테레사가 수치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 그건…!”
리아가 조소를 띤 채 말했다.
“테레사 님. 쓸데없는 말에 괜히 휘둘릴 필요 없답니다. 어차피 파티도 나가는 마당에 자기 분에 못 이겨 일행들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저급한 행동을 하는 것 뿐 이에요. 저런 인간은 애초부터 파티에 받아들이면 안 됐어요. 음침하고, 이기적이며,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인간과 어떻게 목숨을 맡긴 채 전장을 헤쳐나갈 수 있겠어요?”
나는 입 꼬리를 올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뭐래, 용사에 환장한 년이.”
“뭐, 뭐라고요? 화, 환장? 지금 제게 그런 말을….”
아, 들렸니? 들렸으면 미안.
충격 때문에 말더듬이가 된 그녀를 무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
“할 말은 이게 끝이야. 이 시간부로 나는 이 거지 같은 파티에서 나갈 거니까 마지막 부탁 잘 지켜주길 바래. 만약 그마저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품안에서 투명한 수정구를 꺼냈다.
“이걸 공개하도록 할 거야.”
“…메모리 크리스탈?”
“이 수정구에는 지금까지의 여행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 물론, 우리가 데미안에게 했던 짓들까지도.”
말이 끝남과 동시에 라스의 손이 검집으로 향했다.
“감히 네 녀석 따위가….”
노골적인 살의(殺意).
명색이 용사라는 새끼가 살인멸구(殺人滅口) 할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허나 그의 검이 뽑히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여라도 허튼 짓할 생각 하지 마.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런 얘기를 꺼냈을 거 같아?”
그렇다.
사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런 얘기를 꺼낸 게 맞다.
“이미 기록 장치에 전송은 끝난 상태다.”
그렇다.
물론, 거짓말이다.
이 수정구에 담겨져 있는 것이라고는 린과 테레사가 씻고 있거나 옷을 갈아입고 있는 영상이 전부였다. 그저 아벨 크로이의 추악한 욕망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면 나는 어떤 의미로든 죽게 되겠군.’
“내 부탁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이 영상이 절대 공개될 리 없다고 약속하지.”
라스가 죽일 듯이 노려보며 검 손잡이를 놓았다.
“너. 오늘 일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너도.”
진심이다.
두고, 두고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아벨에게 했던 짓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기대해라.’
나는 격렬하게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한 채 여관 밖으로 나갔다.
긴장이 풀리자 몸에 힘이 빠졌다.
“…진짜 먹힐 줄은 몰랐네.”
잠시 주변을 살핀 뒤 빠르게 마을을 벗어났다.
한시라도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다음 목적지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우선 데미안이 용사파티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막았다. 아마 약간이지만 시간은 벌 수 있겠지.’
원래의 흐름대로라면 추방당하는 것은 내가 아닌 데미안이다.
용사 파티에서 추방당한 데미안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대신 테레사의 배려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다.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지.’
아카데미에 입학한 데미안은 본격적으로 본래의 힘을 회복하며,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나 자신의 힘과 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나 또한 필연적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한다.
허나 내 신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이기에 통상적인 루트로는 입학시험을 치룰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것은….
“대충 이쯤인 거 같은데.”
가속 마법을 겹겹이 두른 채로 약 30여 분간 쉴 새 없이 달렸다.
위치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초행길이었기에 몇 번이고 길을 헤맸다.
아마 탐지 마법이 없었다면 더욱 오래 걸렸을 것이다.
울창한 나무 사이를 헤치고, 조금 걸어가자 딱 봐도 음산한 기운을 물씬 풍기는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는 거대한 바위로 막혀 있었는데 의미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찾았다.”
바위에 다가간 나는 손바닥을 대며 중얼거렸다.
“안드로말리우스(Andromalius)."
손끝에서 뻗어져 나간 검은 기운이 바위를 뒤덮었고, 잠시 후 드르륵 소리와 함께 입구가 열렸다.
짙은 암흑이 어서 자신의 품에 안기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저벅. 저벅.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득한 액체가 늘러 붙어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의 발자취를 비추어라. 광명(光明).”
쓰벌.
주문을 외울 때마다 드는 이 수치심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눈앞에 밝은 빛을 뿜어내는 구체가 형성됐다.
“…끔찍하군.”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고깃덩어리.
제멋대로 뒤엉킨 연분홍빛 내장과 핏물이 뚝뚝 흐르는 살점.
구체관절인형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무수히 등분된 팔과 다리.
그리고 백골(白骨).
이것들을 보니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72 교단.”
―그때였다.
“그대는 누구시오.”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올빼미의 가죽을 얼굴에 뒤집어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인간들 수 십 명이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명백한 살의(殺意).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곧장 죽이려 들게 분명했다. 아니, 애초에 이곳에 들어온 이상 나를 살려 보낼 마음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됐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던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오?”
꿀꺽.
목울대가 움직였다.
나는 천천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본래의 흉측한 얼굴이 드러났다.
“…….”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신도의 머리통을 터트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구나."
일순 정적이 흐르더니,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일제히 소리쳤다.
“지고하신 분의 사도 님을 뵙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호랑이를 사칭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