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자일 지그하르트.」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책상 위에 흩뿌려진 서류를 보며 연신 인상을 찡그렸다.
선이 고운 얼굴이었으나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와 다부진 몸매에 가려져 이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 시험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 개가 아니란 말이지….’
여인이 한숨을 푹 쉬며 서류들을 한 곳에 몰아넣은 뒤 책상 위에 다리를 뻗었다.
그리고는 연초 한 개비를 입에 문 채 마나를 일으켰다.
손가락 끝에서 생성된 자그마한 불꽃이 천천히 연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지그하르트 가문의 후계자라…. 1차 시험에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장은 대체 왜 레이첼을 그놈들의 감독관으로 붙여 놓은 거지? 만회할 기회를 주려고? 그럴 리가. 이사장은 그 정도로 인정이 많은 인간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그 괴물 같은 여자가 인간이 맞긴 한 건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 봐도 대체 어떠한 의도로 그런 명령을 내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래도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답답할 뿐이었다.
‘초월자라는 작자들은 원래 다 그 모양인가.’
치이익.
담뱃잎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폐를 타고 스며든 담배연기가 집무실 안을 가득 매웠다.
“하아. 이제 좀 살겠군.”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말끔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본 뒤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담배연기가 자욱하군요. 여기가 흡연실인지 집무실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잔소리는 네 딸년한테나 해라, 막심. 무슨 일이지?”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금 꼭 들어야 하는가?”
“명색이 총 감독관이시지 않습니까. 그거 직무태만입니다.”
방금까지 도넛 모양의 연기를 뱉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던 여인의 눈빛이 돌변했다.
“직속상사한테 못하는 말이 없군. 하극상을 벌이고 싶은 거라면 언제든 상대해주마.”
사내는 으드득, 으드득 소리를 내며 몸을 풀고 있는 여인을 향해 딱 잘라 말했다.
“자살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저는 가늘고 길게 오래 살고 싶습니다.”
여인이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여전히 따분한 놈이군. 보고나 해라.”
“지금 막 시험에 참가했던 대부분의 조가 복귀했다고 합니다.”
“그래. 무사히 잘 끝났나보군. 잠깐…. 대부분?”
“예, 아직 한 조가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이 시작한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조가 있다고? 몇 조지?”
“10조입니다.”
“10조면 시험 첫날에 들어갔던 인원들이잖아…. 설마, 그 조에 자일 지그하르트가 포함되어 있나?”
막심은 평상시와 같이 기계적인 어조로 대답했으나 속은 내심 놀란 상태였다.
꽤 오랜 기간 그녀와 함께 시험을 주관했으나 단 한 번도 수험생들에 이름을 직접 부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수험번호 444번 자일 지그하르트, 수험번호 66번 이든, 수험번호 400번 샬럿 메이지, 수험번호 10번 프레이 칼리고가 이 조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벌떡 일어난 여인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뱉었다.
휘날리는 머리칼이 흡사 사자갈기를 떠올리게 했다.
여인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무시한 채 조심스레 물었다.
“10조의 담당 감독관이 혹시 레이첼 수석교관인가?”
“그렇습니다.”
“레이첼은 지…금 어디 있지?”
“사라졌습니다.”
―쿵!
사내의 대답과 동시에 책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여인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물었다.
“뭐? 사라져? 그게 뭔 개ㅈ같은 소리야? 부교관은? 부교관은 어디 있는데?”
벨라 트레이.
붉은 사자라는 이명답게 그녀의 머리칼이 마치 살아 숨쉬기라도 하는 것처럼 펄럭였다.
격렬한 감정에 반응하여 마나가 날뛰고 있는 것이다.
“부교관… 도 보이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여인의 이마에 핏줄이 곤두섰다.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공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막심도 숨쉬기가 괴로운지 안색이 창백해졌다.
단순히 마나를 내뿜는 것을 넘어서 그녀의 살기가 공간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뭐? 지금 이딴 걸 보고라고 해? 이 개x끼들은 지금까지 일 처리를 어떻게 한 거야!”
막심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우선…. 이 살기부터 좀 어떻게 해주시죠. 이러다 저 진짜 죽습니다.”
탁.
그녀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방안을 짓누르고 있던 공기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아…. 강박증 환자인 네놈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을 테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뭔데, 말해봐.”
잠시 옷매무새를 정리한 막심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이 사실을 지금 알았습니다. 다른 시험관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학장님께서 레이첼 수석교관에게 독점권한을 주었다고 하더군요. 10조 한정으로 이번 시험이 끝날 때까지 보고는 물론, 평가까지 모두 그녀가 일임하는 걸로.”
그 말을 들은 벨라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학장…? 이 썩을 영감탱이가…. 감히 총감독관인 나를 무시하고, 그따위 월권행사를 해? 레이첼이 있던 방으로 안내해. 내가 직접 간다.”
“예.”
쾅!
집무실 문을 박차고 나간 벨라 트레이.
그녀가 이 상태가 되면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막심은 잠자코 길을 안내했다.
성큼성큼.
흡사 불도저와 같은 기세로 복도를 걷던 벨라 트레이가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여기야?”
“네.”
대답이 떨어지는 동시에 그녀가 주먹을 내질렀다.
문짝 채로 떨어져 나간 방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벨라를 보고 막심이 생각했다.
‘붉은 사자가 아니라, 붉은 고릴라가 어울리겠군.’
방 내부는 무척 깔끔했으나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 위화감의 정체를 느낀 벨라 트레이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막심. 수정구는 어디 있지?”
“안 보이는 걸 보니 레이첼 수석 교관 혹은 부교관이 가지고 있는 거 같군요.”
벨라 트레이는 평생을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 본능은 언제나 그녀에게 있어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절대 독이 된 적은 없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본능을 무한히 신뢰했다.
“막심. 너 천리안 쓸 수 있었지?”
“대장…. 설마….”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니, 막심은 저도 모르게 용병 시절의 말투가 튀어나왔다.
“지금 사용해. 너 정도라면 어떻게든 비집고 볼 수 있잖아? 어차피 받은 권한도 있을 테고.”
“대장, 아니 총 감독관님. 총 감독관님도 알다시피 시험 도중, 내부 관계자가 마법을 통해 개입하는 것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금기입니다! 정말 이례적인 상황이 아니고서는….”
“지금이 그 이례적인 상황이니까 닥치고 하라는 대로 해. 책임은 내가 진다.”
“하아…. 전 진짜 모르는 일입니다.”
“언제는 안 그랬고?”
한숨을 내 쉰 막심이 눈을 감은 채 시동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지혜를 구하는 자, 답을 원하는 자, 종속된 모든 흐름에게 부탁하노니 세상 그 어디에서도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소서.”
막심이 눈을 떴다.
“―천리안(千里眼).”
붉게 충혈된 두 눈이 반짝거리고 있는 것은 마법이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 여파가 상당한 탓에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광경을 본 벨라 트레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급히 말했다.
“어서 공유해.”
“잠…시만…요.”
잠시 후.
벨라 트레이의 머릿속에서도 막심이 보고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대장.”
“그래. 보고 있다….”
온통 새빨갛게 물든 눈동자, 피와 살점으로 인해 엉겨 붙은 머리칼, 기괴하게 뒤틀린 전신.
그것은 레이첼.
―아니, 레이첼이었던 무엇인가였다.
막심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종일관 표정의 변화가 없던 그가 겁에 질려있었다.
“…저, 저건.”
“그래. 이블(evil)이다.”
그 순간, 막심이 눈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큭!”
그의 눈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막심. 현 시간부로 시험은 중지다.”
“네?”
“나는 지금부터 시험장으로 향할 것이니 너는 청십자회(靑十字會)에 연락해라.”
말을 마친 벨라 트레이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방을 빠져 나갔다.
허나 당당한 발걸음과는 별개로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블(evil).
그것은 재앙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 * *
마창 악시온을 본 순간, 레이첼은 괴성을 지르며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끼이이이이이이익!!”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감히 쫒아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저 정도 속도를 냈다면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잡혔을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숨 돌릴 시간을 벌었다. 이든과 프레이가 긴장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물었다.
“조장. 저게 정녕 레이첼 교관이 맞습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일…. 저것에게서 엄청난 마기(魔氣)가 느껴집니다. 샬럿이 저것을 보고 이블(evil)이라고 부르던데…. 혹시 공자께서는 이블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보통 사람이 ‘이블(evil)’에 대해서 알 리가 없다.
설정을 짠 장본인인 나조차 기억에서 잊고 있었을 정도로 생소한 정보니까.
흑마술사들 사이에서는 마치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
흉신(凶神), 마귀(魔鬼), 재앙(災殃)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지만 흑마술사들은 경외와 공포를 담아 고대어로 악마를 뜻하는 ‘이블(evil)’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마력과 마기는 궤를 달리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마력은 수련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더욱 정순해지고 소유자의 정신을 맑게 하지만, 마기는 커지면 커질수록 숙주의 정신 그 자체를 갉아먹는다.
마기의 오염된 마법사들이나 대부분의 흑마술사들이 단명하게 되는 것이 그 예다.
허나 그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는 사망에 이르는 대신 일종의 ‘각성’을 하게 된다.
정신이 감당하지 못할 극도의 스트레스, 마나의 오염, 마기 폭주 등 다양한 가설이 제시됐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었다.
그저 각성을 하게 되면 과거에 고명한 현자였든, 제국을 수호하는 소드마스터였든 상관없이 살인본능(殺人本能)만 존재하는 악귀(惡鬼)로 변모한다는 것.
마족처럼 이성이 있는 것도, 마물처럼 종속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맹목적인 살육(殺戮)만을 추구하는 그야말로 재앙인 것이다.
과거, 고명한 기사가 이블(evil)이 되어 도시 하나를 괴멸시킨 사건만 봐도 얼마나 규격 외에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이블이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상황이 개 같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다행히 아직 날개와 뿔이 없는 걸로 보아 2단계 정도. 완전히 각성을 끝내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될 거야. 어떻게든 그 전에 끝장을 내야만 한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저 지금 이 상황이 단순한 시험이 아닌…”
그 순간, 몸에 힘이 빠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어…? 갑자기 힘이….’
깜짝 놀란 프레이와 이든이 달려와 나를 부축해주었다.
“자일! 괜찮으십니까?”
“조장! 괜찮으세요?”
속이 매스껍다. 탈력감이 밀려오며, 몸이 축 늘어진다.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손에 쥐고 있던 악시온이 사라졌다.
‘설마, 마나 탈진인가…. 하필 이 타이밍에…. 염병, 진짜 되는 게 하나도 없군.’
이 빌어먹을 마나통이 또 발목을 잡았다. 지금껏 과도하게 마나를 사용한 탓에 마나 탈진이 온 것이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흑마술을 사용하는 게 낫다.’
일단은 악룡의 저주를 운운하며 어떻게든 얼버무릴 생각이지만, 만약 정체를 들키게 된다면 모두를 죽…
“보아하니 마음을 정하신 모양이군요.”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이든.
평소에 살가운 얼굴을 하던 그와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무미건조한 표정. 감정 없는 눈동자가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프레이 또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와 이든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든은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내게 시선을 집중한 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조금 과격한 수단을 사용하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든이 손을 들어 프레이의 뒷목을 강타했다.
갑작스런 일격에 프레이는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일격. 아무리 급습이라지만 무재(武才)의 재능을 타고난 프레이가 반응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당장이라도 목을 꺾어버릴 기세로 그의 목덜미를 힘껏 쥐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지만, 이든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은 채 빤히 나를 바라볼 뿐 이었다.
‘역시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군.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도 결국 이 놈인가…?’
“…….”
“당장 대답해라. 그렇지 않으면….”
정적.
이든을 바라보던 내 눈이 점점 더 커졌다.
“……너.”
방금까지 이든의 얼굴을 하고 있던 사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설마.”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이든이 아닌, 백금발의 적안을 지닌 미남이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정욕과 격노의 사도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