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충격적인 광경에 힘이 빠진 나는 그의 목을 놓아주었다.
‘변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얼굴이 변했다. 그것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계열 마법?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시동어를 내뱉지도 않았다. 무영창도 아니다.
마나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마기(魔氣)….’
일순간 느껴진 것은 다름 아닌 마기였다. 그리고 그는 내 정체를 알고 있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너 72교단이냐?”
그가 미소를 지었다. 피로 물든 보석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상당히 거슬렸다.
“그렇습니다. 저 또한 신의 선택을 받은 교인이지요.”
“그게 본래 모습인가?”
“궁금하십니까?”
다시 내가 알던 이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조장.”
그제야 그의 눈동자의 깃든 뱀 문양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흔(聖痕)!’
그 또한 안드로말리우스의 선택을 받은 사도인 것이다.
나와 같은 권능으로 지금껏 본 모습을 숨긴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이미 패가 까발려진 이상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나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 채 이든을 바라봤다.
“왜 이제야 정체를 밝힌 거지? 정체를 밝히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힘을 합쳤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상황을 만들 수 있었을 테고.”
교단의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증폭된 상태였다. 흑마법사인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흑마술사라는 족속들은 애초에 믿을 만한 놈들이 아니다.
광신도(狂信徒).
자신들이 모시는 신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정신 나간 일들도 손쉽게 벌이는 개망나니들이라는 얘기다.
거기에 저놈은 도통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십시오. 저에게도 여러 사정이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교단의 안전과 부흥입니다. 당신이 정욕과 격노의 마신의 사도이며, 제가 모시는 신에게도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제 개인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정체를 밝히기에는 보는 눈이 사라진 지금이 가장 적기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 검증의 결과는 어떻지?”
“뭐, 장기적으로 봤을 때 실보다는 득이 많을 것 같더군요. 대의(大義)를 이루는 데 있어 사용할 수 있는 패들은 전부 써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설령 악마와 손을 잡는 것이라 하여도요.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조장께서 저를 의심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안드로말리우스님의 축복을 받았다고는 하나, 조장은 어디까지나 정욕과 격노의 마신의 사도이시지 않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저도 이 자리에서 그 오해를 전부 풀어드리고 싶지만 한가하게 대화를 나누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군요.”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있었지만, 그가 말한 대로 한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납득했다. 남은 이야기는 일단 이곳을 벗어난 뒤에 하는 걸로 하지. 지금은 그래… 임시동맹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너를 신용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허튼 짓거리를 한다면 네놈부터 죽여주지.”
이든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예, 조장.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 미소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너도 흑마술사라면 이블(evil)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을 테지.”
“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요. 재앙(災殃)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오싹오싹하더군요.”
나는 일부러 몇가지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필 왜 이 타이밍에 이블(evil)이 등장한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연출한 것처럼.”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그저 특유의 웃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걸까요?”
“…그건 곧 밝혀지겠지.”
“그렇겠지요. 명색이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 아닙니까? 하하하! 그보다 저희도 슬슬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아직은 각성 초기 단계로 보이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말을 하던 이든의 표정이 서서히 굳기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을지 모른다고 얘기하려 했으나 이미 늦어버린 것 같군요.”
지금껏 처음 보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나 또한 그의 시선이 멈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풀숲 사이를 헤치고 걸어오는 불길한 인영(人影).
두근. 두근. 두근.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까 전과 비교했을 때 더욱 인간에 가까워진 형태였으나 그 존재감은 가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회색빛으로 물든 머리칼, 기괴하게 찢어진 입꼬리, 그리고 등 뒤에 펼쳐진 한 쌍의 날개.
검은 깃털로 이루어진 날개는 마치 까마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그극, 소리를 내며 꺾인 고개. 동공마저 붉게 물든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증오로 점철된 농도 짙은 살의(殺意). 그 누구보다 흑마술사를 증오하고, 배척하던 인물이 현재는 마기에 오염되어 이성조차 잃어버린 괴물이 되었다.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이교―도?”
손톱으로 유리창을 박박 긁는 듯한 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솜털이 곤두섰다.
‘…날개가 생겼다. 설마 그 짧은 사이 3단계에 도달한 건가?’
이제는 욕지거리를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애초에 신입생들 입학시험에서 이블을 마주친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갓 게임을 시작한 초보자에게 아주 극악의 확률로 등장하는 히든 보스를 잡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내가 개입하여 아벨 크로이의 운명을, 소천마 천악천의 운명을 바꾼 그 순간부터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 또한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작금 당면한 문제는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냐는 것이다.
아스모데우스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사도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은 한계가 분명하다.
그나마 운이 좋아 일반적인 흑마술사들에 비해 뛰어난 마기 감응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침식이 아예 진행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신과 직접 계약을 한 것이다.
제 아무리 날고 긴다한들 신의 힘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신체와 정신에 엄청난 무리가 간다.
아직은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힘을 남용하다가는 레메게톤을 찾기도 전에 죽거나 혹은 나 또한 [이블]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선은 살고 봐야겠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일단은 이든 덕분에 흑마술을 사용하는데 있어 당장의 제약은 없어졌다.
허나 상대는 마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인 이블.
당연하게도 성마술(聖魔術)에는 취약하지만, 흑마술에는 상당한 내성을 지니고 있었다.
저주 계열은 완전 면역. 그 외에는 면역에 가까운 내성.
그리고 나와 이든은 둘 다 흑마술사다.
자신이 추앙하는 신을 통해 얻은 마기{魔氣)를 원천으로 흑마술을 사용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그야 말로 최악의 상대인 셈.
‘심지어 그녀는 아카데미의 수석교관이다. 그 말은 최소 6서클 이상의 기사라는 뜻….’
이블의 잠재력은 생전에 강함과 비례한다.
즉 흑마술에 있어 압도적인 내성을 지니고 있고, 최소 6서클 기사의 신체능력과 경험을 지녔으며, 3단계 각성을 통해 몇 배 혹은 몇 십 배 이상의 힘을 지니게 된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성마술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만 있었어도….’
그 순간, 이든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조장! 옵니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희뿌연 검. 자세히 보니 그것은 검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뼈.
“말?―살―”
그것도 그녀의 옆구리를 지탱하고 있던 갈빗대 중 하나였다. 허나 발산하는 예기만큼은 이름난 명검들에도 결코 지지 않을 것 같았다.
‘미친!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무슨!’
눈으로 쫒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빠른 참격.
가까스로 방어용 흑마술인 ‘망자의 방패’를 사용했다.
그녀가 휘두른 검과 내 손에 들린 방패가 부딪쳤다.
지잉!
전신에 뼈가 울리는 듯한 격통과 함께 방패가 으스러졌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그대로 날아가 나무에 쳐 박혔다.
“쿨럭-!”
몸을 일으켜 기침을 하자 선홍색 핏물이 흘러나왔다.
‘전신 강화를 했는데도 이 정도라고…?’
직접 겪어보니 상상했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함이었다.
허나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통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후각과 미각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고통만큼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결국 아스모데우스의 권능을 사용해야 하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은 가장 최후의 수단이다.
애초에 지금의 몸 상태로 권능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도박과 다름없다.
아직 이든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 권능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주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 명목상 같은 마신의 사도로 활동하고 있다지만 수틀리면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모르는 놈이다.
그런 녀석에게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패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
막말로 권능을 사용하여 겨우 저 괴물을 잡아냈다고 한들, 그 여파로 녹초가 된 나를 어떻게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최대한 저 녀석을 이용해야 한다.’
지금까지 힘을 숨긴 걸로 보아 최소한 자기 몸 하나 지킬 정도는 될 것이다.
그때 또 다시 나를 향해 돌진하는 레이첼.
“조장!”
그녀를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이든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던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왔다.
‘저 녀석 마검사였나…!’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술과 마법을 적재적소에 사용하여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모습이었다.
마검사의 전투를 교본으로 찍어낸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했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상처가 늘어나고 있긴 했으나 지금까지 이 괴물을 묶어둔 것만으로도 그가 엄청난 실력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이든! 딱 5분만, 5분만 시간을 벌어줘!”
방금 옆구리를 베인 이든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큭! 5분이라 했습니까? 5분은 무슨, 지금 당장 죽게 생겼습니다!”
“내게 저 녀석을 쓰러트릴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을 쓰려면 시간이 필요해.”
“방법? 확실합니까? 그 말 정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날 믿어라. 이든! 딱 5분이다, 5분! 죽기 살기로 어떻게든 5분만 버텨주면 돼! 어차피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제길. 여기서 죽게 되면 리치가 되어서라도 복수할 겁니다.”
리치…? 리치가 되면 나야 좋지.
죽어서도 사역마로 부려 먹어주마.
“고맙다.”
사실 자신 있게 큰소리친 것처럼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내지른 말일 뿐. 겸사겸사 이든, 저 놈의 체력도 떨어질 것이니 일석이조였다. 설마 그 사이 뭐 죽기라도 하겠는가?
“조장! 대체 얼마나 더 버텨야 합니까!”
음….
죽을 지도 모르겠다.
얼핏 봐도 전신이 피범벅인 것이 쓰러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디 하나 잘려나간 곳은 없다는 점.
그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혹시…?’
갑자기 떠오른 가설에 불과했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나는 눈을 감은 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불규칙한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했다. 전신을 뒤덮은 마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술은 본디 불합리를 합리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힘. 그 원동력은 세뇌에 가까운 광적인 믿음이다.
강렬한 의지(意志)를 담아 천천히 소리 내어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내 부름에 응답해라….”
이마에서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스모데우스가 새긴 성흔이 격렬히 반응했다.
흑마술이 제대로 발동되고 있음을 뜻했으나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가까워졌다는 게 느껴졌다.
“듀라한(Dullahan).”
바닥에 그려진 붉은 육망성이 빛을 냈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사방에 퍼진 안개.
뒤이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다그닥. 다그닥.
그에 화답하듯 서글피 울려 퍼지는 여인의 곡소리.
흑. 흑. 흑. 흑.
흩뿌연 안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센 콧김을 뿜어내는 칠흑의 말과 목이 없는 기수였다.
기사가 들고 있던 여인의 입에서 미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천사가 속삭이는 것처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Ar ghlaoigh tú, a Mháist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