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산 넘어 산이라고 했나.
이블을 마주친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놈들이 꼬인 것일까.
어느 것 하나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푸른색 복면을 쓴 사내의 품속에서 예리한 날붙이가 번들거렸다.
사내의 눈동자가 나를 훑었다.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의 눈동자였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상대의 반응을 보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
“…….”
사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상당히 신중한 타입으로 보였다.
적으로 만났을 때 가장 위험한 부류였다.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고 있다는 사실이.
주변 일대의 마나가 거칠게 요동쳤다. 누군가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바깥에서 들리던 시끄러운 잡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며 정적이 찾아왔다.
‘범위계 마법…. 침묵의 장막인가?’
주변 일대의 소음을 차단하는 마법이었다. 단순한 만큼 실용성이 좋아 주로 암살자들이 애용하는 마법이었다.
마법사들까지 대동한 것을 보니 나를 죽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게 확실해졌다.
“…다시 한 번 묻겠다. 그대가 자일 지그하르트인가?”
아리아 발렌타인과 조금이라도 연을 쌓기 위해 말을 건 것이었는데, 의도와는 다르게 더 큰 상황에 말려들게 해버렸다.
생각이 바뀌었다. 자고로 계획이란 변수에 맞게 유동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법.
나는 대답 대신 전신에 마나를 순환시켰다.
“전신복합강화(全身複合强化).”
팔을 휘감은 자색 마나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마기를 토대로 한 흑마술은 번거롭게 영창을 외울 필요가 없다.
뇌의 자리 잡은 서클을 토대로 이미지를 구상하고 영창을 통해 마나를 불어 넣는 마법과는 달리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직관적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이해만 한다면 간단한 술식의 마법들은 간소화시키는 것을 넘어 무영창이라는 기적 또한 행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영창을 단축시키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심장이 펌프질을 한다. 팔과 다리에 혈액이 몰리며, 팽창된 근육이 괴성을 지른다.
전신에 깃든 자색 마나가 힘이 샘솟고 있음을 증명했다.
선공필승(先攻必勝).
속으로 오래된 격언을 되새기며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쿵!
공기를 찢으며 나아간 주먹이 복면의 사내가 꺼내든 단검과 격돌했다.
뼈를 부숴버릴 각오로 내지른 일격이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이 가루가 된 것을 확인한 사내가 거리를 벌리며 나를 바라봤다.
“…이제 갓 입학한 신입생이라고 들었건만 지그하르트 가문의 전설이 마냥 허황된 얘기는 아닌 것 같군. 허나 그 뿐.”
꽤나 당황한 듯 했다.
그는 양쪽 소매에서 단검을 뽑아든 뒤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이 이상 확인할 필요는 없을 거 같군.”
사내의 양손에 들린 두 개의 검이 빛을 발했다. 점차 강해진 빛은 이윽고, 검 전체를 뒤덮어 하나의 형태가 되었다.
“목격자도 남기지 마라.”
단순히 마나를 두른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 형태가 흐릿하기는 했으나 풍기는 기운만큼은 확실했다.
오러(Aura).
최소 7서클 이상의 기사들만이 다룰 수 있는 절정의 활용법.
마나 운용의 정수이자 꽃이라 불리는 경지였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살수들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중에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괴물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 좀 웃기는 말이지만 혹시 대화로 해결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
슬쩍 뒤쪽을 살펴보니 아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황을 관망 중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다 죽이지는 못 하더라도 자기 몸 하나는 충분히 챙겨 내뺄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겠지.
당연하게도 도와줄 생각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어 보였다.
“과묵하신 분이네. 제가 어째서 당신들같이 무서운 살수들에게 노려지는 건지 이유라도 좀 알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전할 말이 있다면 들어주겠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자비다.”
확신에 가득 찬 말투.
방금 나와 손을 섞어 보았기에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곳에서 살아나갈 방법은 없다는 것을.
그래.
맞는 얘기다.
맨드레이크를 복용한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의 몸 상태로는 공격을 받아내기는커녕 스치는 것만으로도 몸이 두부처럼 썰려나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제 아무리 강화를 했다 해도 오러 블레이드를 견뎌낼 수는 없으니까.
“역시 대화는 불가능 할 것 같군요.”
“시간을 끌 속셈이라면 포기해라.”
허나 저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
나는 기사나 무투가 따위가 아니다.
“푸른달.”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흑마술사다.
복면의 사내는 지금껏 보여준 것 중에서 가장 놀란 기색이었다.
그거 가지고 놀라면 쓰나.
시작은 지금부터인데.
“―일리야(Ilya)."
고맙게도 주변 일대의 소리를 차단해준 덕분에 거리 낄 것이 없었다.
지금부터 이곳은 나의 전장이다.
주변의 안개가 피어올랐다.
크르릉!
다그닥. 다그닥.
유령마의 발굽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며 귀곡성이 울린다.
“대, 대체 이게 무슨!”
“마, 마물이다! 마물이 나타났다!”
사방에서 공포에 질린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복면의 사내가 크게 소리쳤다.
“동요하지마라. 우선 안개부터 치워! 마법사는 디스펠 사용해라!”
허나 이미 늦었다. 듀라한의 곡소리에는 저주가 깃들어있다.
저주의 면역이 있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인간들은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
서걱!
왼손에는 머리, 오른손에는 검을 쥔 일리야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시체가 나뒹굴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나를 향해 번뜩이는 눈빛. 시야가 가려진 상황에서도 복면의 사내는 나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네놈 흑마술사였냐.”
그래, 내 본질은 흑마술사다.
마신을 숭배하고, 마기를 원천으로 이능을 다루는 존재들. 지금껏 이 힘을 숨긴다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딱!
검지와 엄지가 부딪치자 지면에서 솟아난 사슬이 사내를 속박했다.
부패의 사슬.
상대를 속박하여 서서히 생명령을 갉아먹는 흑마술이었다.
“제국의 밤을 지배한다는 푸른달의 정보망에도 이 정보는 없었나 봐요?”
뚜둑. 뚜두둑.
사내를 속박하고 있던 사슬이 하나, 둘씩 끊어지기 시작했다.
오로지 완력만으로 저주를 풀어낸 것이다. 과연 오러를 다루는 기사라 할만 했다.
“와, 무력만으로 사슬을 끊어낼 줄이야 7서클 기사가 대단하긴 하군요.”
하지만 나는 아스모데우스의 계약자이다.
마기만큼은 무한하다고 자부하는.
내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수십 개의 사슬이 쏟아져 나왔다.
사내는 안간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끝없이 쏟아지는 사슬들을 베고, 베고, 또 베며 나를 향해 한 걸음씩 전진 했다.
“…네놈이 흑마술사건, 영웅이건, 푸른달은 주어진 목표를 완수한다.”
앞으로 두 걸음.
사내와 나 사이의 거리.
기어코 내 앞까지 당도한 사내의 의지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이 정도 서비스 정신은 돼야 의뢰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죽어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내가 나를 향해 검을 뻗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짠 혼신의 일격. 눈으로는 보았음에도 반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예리한 검이었다.
“!”
그러나 사내의 검은 정확히 내 목 앞에서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일 센티만 더 뻗었다면 지금쯤 내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닿을 수 없었다.
이제는 시체가 되어버린 사내의 동료들이 그의 팔과 다리를 감쌌기 때문에.
임시로 만들어 내구성은 그저 그랬지만 나름 써먹을 만 했다.
“동료들한테 인사하셔야죠?”
마물이 된 시체들이 이빨을 딱딱거리며 사내의 살점을 뜯어댔다. 꽤나 고통스러울 법 하건만 사내는 내색하지 않은 채 말했다.
“빌어먹을 이교도놈. 이 정도의 흑마술을 구사하다니 정녕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판 것이냐…. 대체 뭐가 영웅의 후예라는 것이냐.”
뭐, 비슷하긴 하지. 악마가 아니라 마신이지만.
“누구의 명령으로 저를 죽이려고 한 것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말해준다면 고통 없이 보내드릴게요.”
“…죽여라.”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드려야지.
펑!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사내의 살점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시체폭발.
가장 기초적인 흑마술 중 하나로 지니고 있는 마기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인 기술이었다.
후두둑.
나는 얼굴에 묻은 사내의 살점을 닦아내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
아마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당장 죽여야 할 것인지, 혹은 나를 이용해야 할 것인지.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는 무엇인지.
무엇이 본인에게 가장 이득이 될 것인지 열심히 저울질을 하고 있겠지.
그녀의 앞에 멈춰선 나는 밝게 미소를 지었다.
“아, 다 봐버렸네요…. 우선은 사과부터 하는 게 먼저겠죠? 말려들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 상황에 사과를 할 줄은 몰랐네요. 저를 죽이지는 않을 건가요?”
“네? 제가 아리아 씨를요? 어째서죠?”
“제가 이 광경을 봤으니까요.”
“조금 잔혹하게 싸웠을지는 모르지만, 저 함부로 사람 죽이고 그러는 인간 아닙니다.”
앞머리에 가려진 아리아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석양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마치 내 속마음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려하듯이.
“…당신 대체 정체가 뭐죠? 흑마술사인가요?”
“음…. 이미 다 보셨으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사실… 마족과 인간 사이의 혼혈입니다.”
순간,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혼혈…?”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태생이 태생인지라 평생을 숨어 살았습니다. 마족인 아버지는 얼굴 한 번 본적이 없지만, 그 피를 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죠. 웃기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마족이라면 치를 떱니다. 그들과 똑같이 사랑을 하고, 가정을 만들고, 삶을 살아가는데….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증오하고 박해합니다.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인 걸까요?”
마족인 아리아는 인간을 극도로 혐오한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해서 미안합니다. 아리아 씨도 인간이실 텐데 마족의 피가 섞인 저 같은 존재는 분명 혐오스러우실 테죠. 처음에는 제가 마족의 혼혈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 말하려 했지만…. 생각해보니 염치가 없군요.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위험에…….”
“비밀로 해드릴게요.”
그렇기에 마족에게는 호의적이다.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네?”
“비밀로 해드리겠다고요.”
“어째서….”
“그냥 그러고 싶어졌어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뒤를 돌아 걸어갔다. 골목을 빠져나가기 직전 멈춰 선 그녀가 말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죄인 존재는 없어요. 그것이 마족이든, 인간이든. 만약 이 세상이 그걸 죄라고 인정한다면 처음부터 이 세상이 잘못된 거겠죠.”
말을 마친 그녀는 골목을 빠져나가 인파 사이로 몸을 숨겼다.
‘갔나?’
아리아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바닥에 흩뿌려진 시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대충 이쯤이었던 같은데…. 찾았다!”
본래의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체.
오러를 사용하던 살수의 시체였다. 엄지를 깨문 뒤, 흘러나온 피 한 방울을 시체에 떨어트렸다.
뚝.
“깨어나라.”
바닥에 피로 물든 육망성이 그려지며, 주위에 있던 살점이 시체에게 엉겨 붙기 시작했다.
잠시 후.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사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여기는?”
처음 시도해보는 것이었기에 걱정했지만 문제없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사자소생(死者蘇生).
생명력을 소모하여 죽은 인간을 언데드로 되살리는 흑마술이다.
“…그대가 사술(邪術)을 부려 나를 되살린 것인가? 이제야 기나긴 고통 속에 해방되어 안식에 들었다고 생각했더니 이게 무슨 짓이지? 어서 나를 다시….”
이 새끼 봐라?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지?
“엎드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내가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목숨까지 써가며 되살려놨는데 누구 좋으라고 돌려보내?’
“일어서. 엎드려. 일어서. 엎드려.”
대충 100번 정도를 굴리고 난 뒤에 다시금 물었다.
“어떻게 더 할래?”
사내가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앞으로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