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우리는 여관을 나와 아카데미로 향했다.
고급스러운 마차들이 눈에 띄는 것을 보니 명망 있는 귀족 집안의 자제들인 듯 했다.
본래라면 프레이도 저 마차 행렬에 끼어 있었을 테지만 칼리고 가문의 재정 상태를 생각하면 프레이 본인이 거부했을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프레이. 잘 지내셨나요?”
“예. 잘 지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처음 뵙는 군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예, 다행히 아주 쌩쌩합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생명력 하나는 질기거든요.”
“미리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정적이 찾아왔다.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의 표정을 살피니 낯빛이 어두웠다.
‘반 배정 때문인가?’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간략하게 그날의 일을 설명했다. 물론,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어물쩍 넘어가거나 거짓을 섞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결국 청십자회(靑十字會)가 왔군요…….”
잠시 뜸을 들이던 프레이가 말을 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무력감과 공포심을 느낀 것은…. 나름 정신력 하나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했건만 정작 진짜 위기가 닥쳤을 때 전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동료들은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고 맞설 때 저는…….”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뛰어 넘는 기사가 되어, 가문의 검술을 증명하겠다고 다짐했지만 과연 저 따위가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훗날 검희(劍姬)라 불리며, 대륙 최고의 소드마스터가 될 그녀다. 그걸 알기에 나는 그 누구보다 확신에 가득 차 말할 수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프레이. 그대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겁니다.”
프레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두려움이 깃든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일. 그대는 두렵지 않으셨습니까?”
미래의 소드마스터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저 기사를 꿈꾸는 학생에 불과하다.
제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한들 아직은 피어나지 못한 꽃이다.
그 재능이 만개(滿開)하기까지, 어린 묘목(苗木)이 거목(巨木)이 되기까지 필요한 것은 강인한 멘탈과 경험이었다.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맞설 수 있었습니까?”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버텼습니다.”
내가 뱉은 말을 천천히 곱씹는 그녀.
“살기 위해서….”
“프레이.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을 믿고 꿋꿋이 버티다 보면 언젠가 본인이 바라는 바를 이루게 될 겁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일은 많은 재주를 지니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람을 안정시키는 재주가 가장 뛰어난 것 같습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자 어쩐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어? 자일 공?”
충동이 아니었나보다. 이미 내 손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당황한 프레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미, 미안합니다. 저도 모르게 손이….”
“아, 아뇨. 괜찮아요….”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내가 미쳤지.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고는 해도 평생을 기사로 자라온 그녀다.
여동생을 대하듯 가벼운 태도는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쩔 거야.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크게 화가 나지는 않은 것 같아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 프레이. 반 배치 명단은 확인했습니까?”
프레이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기껏 화제를 돌렸더니 이쪽이 지뢰였다.
“…예. 자일공자와 같은 S 클래스더군요. 못해도 B 클래스 이상은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듣도 보도 못한 S 클래스라니 이게 뭔 개…. 같은 경우일까요. 혹시 저희 조가 맨드레이크를 회수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그건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대체 있지도 않은 맨드레이크를 어떻게 회수 하냐는 말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자일?”
프레이가 이렇게 격분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예의바른 프레이의 입에서 욕이 나오다니….
“그, 그렇지요.”
“저희가 그런 일을 겪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학교 측의 운영 문제 아닙니까? 그날 저희가 겪었던 불미스러운 사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으면서 새로운 반을 개설했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학교 측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적어도 당사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해주어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닙니까!”
“…저, 저도 동감합니다.”
잠시 숨을 고른 프레이가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제가 너무 흥분한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자일.”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오히려 저는 프레이가 이처럼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어 한편으로는 안심됐습니다.”
프레이가 놀란 듯 되물었다.
“안심이요?”
“예. 주제 넘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프레이는 남들보다 많은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예의가 바르고, 남을 배려할 줄 알며, 따뜻한 심정을 지녔지만 정작 본인의 상처, 괴로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홀로 지닌 채 끙끙 앓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제 경험상, 그렇게 홀로 인내하고 참다가는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더군요. 곪기 전에 제게 말해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도 오늘처럼 솔직하게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고요. 비록 알게 된 시간은 길지 않더라도, 저희는 함께 사선을 넘나든 동료지 않습니까?”
“동료…. 그렇죠. 자일과 저는… 동료. 다른 말로는 친구라도 할 수 있겠네요?”
기분이 풀린 것인지 기쁜 기색이 역력하다. 원래 이렇게 감정기복이 심한 캐릭터였던가?
“네. 친구죠.”
“자일의 친구로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앞으로 더욱 노력을 해야겠군요.”
훗날, 나를 향해 검만 뽑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치? 안 그럴 거지?
프레이. 나야, 나. 네가 아끼던 자일. 우리 친구잖아….
이런 대사를 내뱉게 될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프레이. 저도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예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그 미친…. 아니, 살렷 공녀와는 꽤 오래 된 친구처럼 보이던데 언제부터 알고 지내신 겁니까?”
“친구…. 공녀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저는 공녀님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처음 검을 쥐었을 무렵에 공녀를 뵈었을 겁니다. 공녀의 부친이신 아크 공작님과 저희 아버님 사이에 연이 있다 보니….”
나는 잠시 주위를 살핀 뒤,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샬럿 공녀께서도 프레이가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제 가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공녀님과 자일 두 분 뿐입니다.”
“그렇군요…. 혹시 프레이만 괜찮다면 지니고 계신 아티팩트을 제가 좀 봐도 될까요?”
“제 아티팩트 말입니까…?”
이해한다. 그녀가 숨기고 있는 비밀과 직결되는 일이니 당연히 선뜻 내어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거 같아 뭐라 한 마디를 더 붙이려 할 때, 그녀가 후드를 뒤집어 쓴 뒤 목걸이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어…? 이렇게 선뜻 주셔도 괜찮은 겁니까?”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 그녀.
“믿으니까요. 우리는 친구지 않습니까?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였나요?”
제 나이 때 소녀에 맞게 활짝 웃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용들의 술식을 해석하는 보석안이니 뭐니, 헛소리를 싸질러 났지만 사실 단 한 번도 그녀의 진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 프레이도 충분히 미소년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아티팩트를 해제한 그녀는 솔직히 말해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였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흩날리는 백금발의 머리칼, 옅은 분홍빛이 도는 얇은 입술, 굴곡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몸매.
굳은살이 박혀있는 손까지도. 심히 매력적이었다.
이 정도였나.
“…자일?”
“아, 미안합니다. 프레이가 너무 예뻐서요.”
프레이가 급하게 손을 뒤로 숨기며 말했다.
“…그런 농담하지 마시지요. 살면서 예쁘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험상궂은 손을 가진 여인에게 누가 예쁘단 말을 하겠습니까?”
나는 그녀의 목걸이를 들여다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거야 사람 볼 줄 모르는 놈들이지요.”
“……그러니 점점 욕…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 누…에게도…….”
프레이가 혼자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아티팩트를 살펴보느라 미처 듣지 못했다.
‘최소 전설급 아티팩트 정도는 되겠군. 오래된 듯 보여도 꽤 정교하게 짜인 술식이야.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오래전에 만들어진 물건이라 아티팩트의 위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티팩트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다중 강화(多重 强化). 개(改). 고(固). 성(成).”
자색 마나가 목걸이를 감싸기 시작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나는 프레이에게 목걸이를 돌려주며 말했다.
“조금 손을 봤습니다. 위력을 증폭하는 마법과 오랜 시간 유지가 되는 마법을 걸었으니 당분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프레이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자일, 물건도 강화할 줄 알았습니까?”
“조금 할 줄 압니다.”
그렇게 프레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아카데미 정문에 도착했다.
입학식이라 그런지 그 커다란 아카데미의 정문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우리는 인파 사이를 헤집고 입학식이 시작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A클래스부터 E 클래스까지 수많은 학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자일 지그하라트랑 프레이 칼리고 아니야?”
“쟤네 둘 다 S 클래스에 배정받았다며?”
학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A 클래스의 학생들은 특유의 자신감 가득 찬 눈빛으로 우릴 바라봤고, B 클래스 학생들은 어딘지 모르게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 외에 나머지 반들은 전체적으로 애매했다.
호기심, 경쟁심, 질투, 부러움 등등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있었다.
그저 줄지어 서 있는 것 뿐 이었는데도 각 클래스마다 보이지 않는 경계가 그어져 있는 듯 했다.
‘막상 이렇게 보니 자존심이 좀 상하네.’
S 클래스는 어디에 있는지 계속 두리번거리던 도중 우리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고 있는 이든을 발견했다.
“프레이 님! 조장! 여기에요, 여기!”
S 클래스는 E 클래스 옆 가장 구석에 위치해있었다. 아무리 새로 신설된 반이라지만 이런 취급은 너무 하지 않은가. 자리를 본 프레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허나 이든은 눈치도 없이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프레이님! 여기에요, 여기! 여기가 S 클래스에요!”
저 새끼.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게 확실하다.
나는 작게 속삭였다.
“프레이.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이번에 새롭게 만들어진 반이라 그럴 겁니다.”
“…네.”
A 클래스가 모여 있는 장소를 지나는 도중이었다. 내가 발을 뻗는 타이밍에 맞춰 누군가 발을 뻗었다.
안 봐도 뻔한 수작질이었다. 물론, 곱게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일반적이라면 발에 걸려 엎어지는 게 정상이었지만….
“으악!”
나는 그대로 발을 걷어찼다. 지금의 나는 전신이 강화마법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힘이 넘쳐도 너무 넘쳐서 힘 조절 하는데 애를 먹을 정도로.
내 발에 걷어차인 남성은 공중에서 두 바퀴를 구른 채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앞에 발이 있는지를 몰랐네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 뒤편에 있던 사내가 대신 대답했다.
“괜찮네.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 정도야 할 수 있지. 같은 반이 되지 못해 아쉽군. 자일 지그하르트.”
사딘 룬델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딘 공자님.”
나는 그를 지나쳐 S 클래스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든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래간만입니다. 프레이님! 조장님!”
“이든. 조장도 아닌데 그렇게 부르는 건 이제 그만해주면 안되겠습니까?”
“아, 그렇네요! 하하. 죄송합니다.”
근처에 있던 샬럿이 이든을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프레이! 어디 있던 거야! 너네 집사장한테 물어보니까 아침 일찍 나갔다고 하던데?”
“아…. 미안합니다. 자일 공자와 나눌 얘기가 있어 일찍 채비를 했습니다.”
“자일…? 그 재수탱이랑은 무슨….”
말을 하다 만 샬럿이 나를 힐끔 바라봤다.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것인지 가만히 보고만 있었는데 의외로 별 반응이 없었다.
“뭐…. 보아하니 몸은 괜찮은가 보네. 프레이 이리와! 나랑 같이 서있자!”
웬일이래?
샬럿이 프레이의 손을 잡고 자신이 있던 자리로 끌고 갔다. 나는 맨 뒤쪽에 자리 잡았다.
앞 쪽에 있던 아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인사 대신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이 모습을 본 프레이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와 아리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나 포함 총 6명인가. 무슨 기준으로 선별한 건지 모르겠네.’
샬럿. 아리아. 이든. 프레이. 그리고 생소한 인물 한 명.
뒷모습이라 얼굴은 확인할 수 없지만, 확연히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뾰족한 귀.
‘엘프?’
아직까지는 추측에 불과했지만, 만약 내 예상대로라면 S 클래스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골치 아픈 반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우연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위적인 냄새가 풍겼다. 명백한 의도가 느껴지는…….
“이사장님. 입장하십니다.”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또각. 또각.
모두가 숨을 멈춘 채 그녀를 응시했다. 단상 위에 올라선 이사장 아슈타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살로몬 아카데미의 이사장 아슈타르라고 합니다.”
약 2초 정도 정적이 흐른 뒤, 힘찬 박수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지금부터 입학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슈타르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주변 전체, 아니 공간 전체가 변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공간.
금제의 숲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