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천재입니다.”
아…. 천재구나…. 이게 끝?
“더 없습니까…?”
프레이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자일은 감정이 금방 드러나는 편이군요. 제가 괜히 요한 크루이프 교수님을 천재라고 얘기한 게 아닙니다.”
언제나 진중한 태도를 유지하는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내가 그녀에게 신뢰를 주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허나 한 편으로는 내가 흑마술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녀가 어떻게 반응을 할지를 고민한다.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까.’
평생을 제국민으로서 살아온 그녀는 흑마술사를 증오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입장에서 흑마술사는 마신을 숭배하는 이교도 집단이었으니까.
주신 라파엘을 필두로 12신을 섬기는 그들에게 종교란 목숨과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뭔가 특별한 점이 있는 건가요?”
“독보적인 천재. 온갖 천재들이 모인 이 아카데미 안에서도 돋보일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요한 교수님이 저희 학교 학생이셨습니까?”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졸업생이십니다. 샬럿의 언니분인 린 메이지 님과 동기였다고 들었어요.”
“린 메이지? 그 용사 파티의 린 메이지 말입니까?”
린 메이지의 이름을 듣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깜짝 놀란 프레이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예. 맞습니다…. 무슨 문제 있나요?”
“아닙니다. 혹시 그 두 분은 친했다고 하던가요?”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였다. 설마 요한 크루이프가 그 망할 년이랑 동기였다니….
둘이 한 반에서 수업을 들었을 걸 상상하니 끔찍했다.
프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소문난 앙숙이었다고 합니다. 신입생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눈만 마주치면 싸웠다고 하더군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소문에 의하면 언제나 린 메이지 님께서 일방적으로 화를 내셨고, 요한 교수님은 지금 보이시는 그대로 시종일관 무시로 대응했다고 합니다.”
“린 메이지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교수님께 집착한 거죠?”
“이 또한 확실치 않은 애기이기에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 있을 거라 생각하시고 알아서 걸러 들어주시면 됩니다. 린 메이지님은 A 클래스에서 수석으로 졸업하셨고, 교수님은 A 클래스에서 가장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 어째서…. 아…!”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린 메이지 님은 요한 교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신 거 같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막 재밌어지려고 할 때쯤.
조교가 우리를 불렀다.
“자일 군. 프레이 군. 오늘 수업은 끝났으니 전원 기숙사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아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프레이.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에 더 들려주세요.”
“네!”
* * *
우리는 조교의 안내를 받아 기숙사로 향했다.
길을 걷는 도중, 샬럿과 몇 번 눈이 마주쳤지만 평소와 다르게 노골적으로 내 시선을 피하는 듯 했다.
아마 본인은 실프에게 처참히 패배했는데, 평소에 그토록 무시하던 내가 그를 박살 냈으니 자괴감이 밀려오는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을 해보았다.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 샬럿은 특유의 그 오만함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이번 기회에 성장해라. 인마.’
실프와도 몇 번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내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고 하면 기겁을 하며 ‘히익! 오지마! 괴물!’ 이라고 소리쳤다.
다시는 인간을 무시하지마라. 뾰족귀.
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의 멘탈을 위해 간신히 참아냈다.
“이곳입니다.”
기숙사는 강의를 듣던 건물에서 얼마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열악한 환경이었다. 강의실 건물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목재로 이루어진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곳곳에서 핀 정체불명의 식물들과 당장 바스라질 것 같은 낡은 현판이 더불어 을씨년스러움을 자아냈다.
건물의 뒤편은 울창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거대한 숲으로 보였다. 입구에는 ‘출입금지’라는 푯말과 목책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솔직히 말해 아카데미의 오기 전 머물던 여관이 몇 배는 더 나아보였다.
‘이 정도면 흉가 아니야? 귀신 나올 거 같은데….’
뭐, 설령 귀신이 나와도 사역마로 삼으면 그만이긴 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눈치를 보며 우리들의 반응을 살피던 조교가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프레이와 샬럿은 말 할 것도 없고, 과묵한 아리아 마저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이든과 실프였다. 이든이야 그렇다 쳐도 실프의 반응은 꽤나 의외라고 생각했으나.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멋진 곳이로군.”
그가 엘프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웬일로 눈치를 살피던 이든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그럼 이제 들어가 볼까요?”
문고리를 잡는 순간.
힘없이 떨어지는 문고리.
삼.
이.
일.
“으아아아악!!! 싫어어어어!! 싫다고오오!!! 메이지 가문의 차녀인 내가 왜 이딴 쓰레기 같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 건데!! 냄새나고, 축축하고, 낡고, 먼지 많고 전부 싫어! 싫다고!!”
역시나 예상을 깨지 않고 샬럿이 지랄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이해는 간다.
한 평생을 공작가의 차녀로서 살아온 그녀에게 이러한 환경은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허나 어쩌겠는가. 그게 그녀의 운명인 것을.
사람이 고생도 해보고 그래야 하는 건다. 원래.
“샤, 샬럿. 그 마음은 저도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사장님이 보수해준다고 하였으니 그때까지만 참고 버텨보죠.”
“마, 맞습니다! 샬럿님. 거기다가 저희가 성적만 증명해내면 아낌없이 지원해준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참에 이곳에 으리으리한 궁전을 짓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힐끔 내 눈치를 보던 실프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급히 말을 멈췄다.
“흥! 시끄럽게 떽떽 되기는 이래서 인간들이…. 헙!”
샬럿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녀의 감정에 동화된 마나가 날뛰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 지긋지긋해.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되는 건데! 왜! 아카데미에 입학만 하면 전부 잘 풀릴 거라며! 근데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오오!!!”
“히이익! 샤, 샬럿님 진정하십시오! 여기 근처 전부 숲입니다!”
“하아…. 샬럿! 제발 그만하십시오!”
“…….”
건물이 좋고 나발이고 앞선 대련의 여파로 빨리 쓰러져 쉬고 싶었다.
허나 이대로라면 샬럿이 또 사고를 칠 게 분명했다.
그녀의 마법적 재능은 분명 뛰어나지만, 경험치와 정신력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조금 과격하게 비유하자면 7살배기 어린아이가 총을 쥔 것과 다름없었다.
샬럿에게 다가간 나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가 고개를 휙 돌리며 눈을 부라리다 이내 나를 발견하고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누가! 허락도 없이 내 몸에 손…….”
“샬럿. 진정해라. 이대로 폭주해서 이곳에 불이라도 붙었다가는 A클래스는 고사하고 퇴학당할 거다.”
“……놔.”
잠시 후.
그녀의 머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아프니까 이거 놓으라고….”
나는 말없이 손을 놓았다.
그러자 샬럿은 바닥에 주저앉으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어서 간헐적으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애새끼가 따로 없군.’
한숨이 나왔다.
앞으로 펼쳐질 학교생활을 떠올리니 골이 아팠다. 그야 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그때, 기숙사 건물의 문이 덜컥 열렸다.
“안 들어오고 뭐하냐?”
문을 열고 나온 인물은 다름 아닌 입학시험의 총 감독관이었던 벨라 트레이였다.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걸까.
“총 감독관님…?”
“헛짓거리 하지 말고 들어와라.”
말을 마친 그녀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가장 먼저 들어간 것은 아리아였다.
뒤이어 나와 실프가 들어갔고, 이든과 프레이가 샬럿을 챙겨 따라왔다.
끼익, 끼익 소리가 나는 낡은 복도를 지나니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외관에 비해 상당히 큰 공간이었다. 식탁에는 연초를 꼬나문 벨라 트레이가 앉아있었다.
담배연기를 뿜어낸 그녀가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앉아라.”
우리는 말없이 식탁에 앉았다.
그녀가 마지막 한 모금을 음미한 뒤 유리로 된 재떨이에 담배를 비비자 치익, 소리와 함께 담뱃불이 사그라들었다.
“내가 누군지는 다들 알고 있겠지만 한 번 더 소개를 하겠다. 나는 오늘부터 이 기숙사의 사감을 맡게 된 벨라 트레이다. 지금부터 기숙사 규칙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첫 번째, 시끄럽게 하지 마라. 나는 시끄러운 게 딱 질색이다. 두 번째, 음란 행위를 할 거면 들키지 마라. 들키는 순간 성별의 관계없이 지옥을 맛보게 될 거다. 세 번째,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서는 아침은 모두 다 같이 먹는다. 음식은 내가 한다. 맛 가지고 불평하지마라. 네 번째, 분란이 생기면 대련으로 해결한다. 마지막으로 허락 없이 사감 방에 들어오면 죽는다. 이상, 질문.”
정적이 흘렀다.
“…….”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뭐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총 감독관이나 되던 이가 어쩌다 기숙사 사감을 맡게 된 것일까.
가장 먼저 손을 든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질문하겠습니다.”
“이름.”
“아리아 발렌타인입니다.”
“말해라.”
“아침을 꼭 같이 먹어야만 하는 건가요…?”
“그렇다. 기숙사생 전원 예외 없이 참석해야 한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시 전날 내게 보고하도록.”
아리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네.”
벨라 트레이는 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문 뒤, 손가락으로 불을 붙였다.
담뱃잎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짙은 담배 연기가 그녀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시선이 샬럿에게로 향했다.
“거기 너 질질 짜지 마라. 미리 말하지만 나는 우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네가 공작가의 딸이든, 황제의 딸이든, 신의 딸이든 여기서는 전부 똑같은 학생이다. 그러니 불만이 있으면 네 실력을 증명하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곳을 나가라.”
샬럿이 퉁퉁 부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분하지만 딱히 할 말은 없을 것이다.
“…….”
“대답.”
“……네.”
“다음 질문.”
이번에 손을 든 것은 프레이였다.
“혹시 남는 시간에 사감님께 배움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한 일이 없다면 봐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프레이다운 질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손을 들었다.
“자일 지그하르트입니다.”
“말해라.”
“총 감독관직을 맡으셨던 분이 어째서 기숙사 사감직을 맡게 된 겁니까?”
“관리 소홀로 인한 징계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녀가 어째서 이곳에 온 것인지 깨달았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우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다. 미안하다. 시험을 관리하는 책임자로서 그러한 불미스러운 사건은 미연에 방지했어야 했다. 전적으로 내 실책이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진상 규명은 반드시 해낼 것이니 그때 다시 한 번 사과를 하도록 하겠다.”
모두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긴 방금 전까지 샬럿에게 질질 짜지 말라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니 놀랄 수밖에.
거기에 지금은 일개 기숙사 사감일지 몰라도, 그녀는 이 아카데미의 교수였다.
이미 징계도 받고 있는 마당에 교수쯤이나 되는 사람이 체면을 버리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 괜찮습니다. 다행히 모두 무사하니까요.”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 또 질문 있는 학생은 없나?”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방 배정을 시작하겠다. 안타깝게도 이 기숙사에는 방이 여섯 개 밖에 없다. 하나는 내가 사용하는 방이지. 그렇기에 두 명은 같은 방을 써야 한다. 그 두 명에게는 남아있는 방중에 가장 큰 방을 줄 거다.”
그러니까, 기숙사에서 사용할 방을 제비뽑기로 정한다고?
“방식은 공평하게 제비뽑기로 하겠다. 자, 이 상자 안에 쪽지가 있다. 이 중에서 동그라미가 그려진 쪽지를 뽑는 두 명이 같은 방을 쓰게 될 것이다. 물론, 여자와 남자가 걸린다면 제비뽑기는 다시 진행한다.”
이든 녀석과 같은 방을 쓰게 될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그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다들 따질 힘도 없는 건지, 아니면 아예 포기한 건지 딱히 불만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아마 어떤 말을 해도 바뀌는 건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겠지.
벨라 트레이가 상자를 건넸다.
프레이를 시작으로 한 명씩 차례대로 쪽지를 뽑았다. 가장 마지막에 뽑은 것은 나였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냐.’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쪽지를 열었다.
O.
“아.”
“아.”
누군가 나와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아마 그 또한 동그라미가 적힌 쪽지를 뽑은 사람일 것이다.
설마…….
“동그라미가 적힌 쪽지를 뽑은 놈 손들어라.”
나는 손을 들었다.
“자일 지그하르트.”
당황한 얼굴의 프레이가 천천히 손을 들기 시작했다.
“프레이 칼리고. 딱 됐군. 둘 다 사내놈이니 제비뽑기는 다시 하지 않아도 된다. 다들 많이 피곤할 테니 오늘은 이만 방에 가서 쉬어라.”
벨라 트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샬럿이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간절함 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 안 돼!!! 그것만큼은 절대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