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벨라 트레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안 된다는 것이지?”
샬럿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둘을 같은 방에 배치하면 안 됩니다!”
그녀의 눈동자에 궁금증이 어렸다.
“왜지? 이유를 말해봐라.”
샬럿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질질 끌었다.
“그, 그러니까 프레이는…….”
“프레이는?”
“여, 여….”
그 순간, 프레이가 다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 모습을 본 벨라 트레이가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지, 프레이?”
프레이가 샬럿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며 말했다.
“여의치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제가 원래 남들과 방을 쓰는 것을 잘하지 못해 샬럿이 대신 전해주려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샬럿?”
프레이의 간절한 눈빛에 샬럿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프레이는 어린 시절부터 독특한 잠버릇을 지니고 있어서 남들과 방을 쓰는 걸 힘들어했어요.”
벨라 트레이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정해진 이상 되돌릴 수 없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당분간 참길 바란다. 자일 지그하르트!”
“네!”
“방금 얘기 들었지? 괜히 소란 일으키지 말고 네가 잘 챙겨줘라.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벨라 트레이가 각자 지정된 방을 가르쳐주었다. 나와 프레이의 방은 가장 위쪽인 3층이었다.
“자, 해산!”
모두가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샬럿은 끝까지 남아 눈치를 봤지만 벨라 트레이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본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나와 프레이는 서로 눈치만 보다가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끼익.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낡은 나무 판때기가 소리를 질렀다.
“…….”
“…….”
숨 막힐 듯한 어색함.
3층에 도착하니, 커다란 방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들어갈까요?”
“…그, 그러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쾌적했다. 그래도 청소는 마친 모양이었다.
귀족 출신인 프레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껏 여관에서만 지내던 내게는 이 정도면 자는 데 지장은 없었다.
‘군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천국이지.’
혹한기 때 텐트를 깔고 이를 달달달 떨면서 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찌나 추운지 핫팩 10개를 터트렸는데도 바닥은 얼음장 같았다.
살기 위해 잠을 청하고, 겨우겨우 잠이 들었을 때쯤 근무 나가야 한다고 나를 깨우던 선임에 턱주가리를 날려 버리고 싶었던 그 추억.
꽝꽝 언 전투화를 신을 때 그 감각이 얼마나…….
‘…X같네.’
괜히 기분만 잡쳤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귀신의 집 같은 외관에 비해 내부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지금 중요한 건 시설이 아니었다.
앞으로 이 방에서 프레이와 같이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
프레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는 벨라 트레이의 입장에서는 아마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근데 왜 하필 당첨 제비를 뽑은 것이 프레이냐는 말이다. 샬럿도 있고, 아리아도 있고, 실프도 있…….
잠깐.
그럼 만약에 당첨 제비를 뽑은 것이 프레이가 아니라 실프였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성이니까 아무 상관없는 건가? 아니 애초에 학교 측은 실프가 중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온갖 잡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정신을 갉아먹을 때쯤. 프레이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저…. 자일…. 침대는 어떻게 할까요?”
침대.
그렇지, 침대를 정해야지.
그녀와 같은 방에 있었지만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녀랑… 그러니까 동거를 해야 한다는 말 아닌가.
“프레이. 정말 괜찮습니까? 정 힘드시다면 제가 사감님께 따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굳이 방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원체 잠을 잘 자는 성격이라 거실에서 생활해도 괜찮습니다.”
“저 때문에 자일이 피해를 볼 필요는 없죠. 차라리 제가 거실에서 자겠다고 사감님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아, 진짜 괜찮아요! 제가.”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서로 약 5분 여 정도를 자기가 거실에서 자겠다고 외치던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쉬며 의미 없는 논쟁을 멈췄다.
“……저희끼리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어차피 사감님 성격상 그런 부탁은 들어주시지 않을 텐데.”
“하긴…. 그렇겠죠.”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라도 않는 이상,
벨라 트레이는 절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샬럿 또한 그걸 알고 있었기에 그토록 간절하게 소리친 것이겠지.
애초에 혼인도 하지 않은 귀족 여식이 다 큰 사내놈과 같은 방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샬럿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을 것이다.
“프레이.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남자와 여자가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불편한 점이 많을 텐데요….”
“어쩔 수 없죠.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자일과 같은 방을 쓰는 것이라면… 저는 괜찮습니다….”
살짝 당황한 내가 물었다.
“말씀은 기쁘지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저도 혈기왕성한 사내놈입니다만….”
프레이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희는 친구잖아요? 친구는 서로를 믿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사실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면 전부 해결되는 일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건 그녀의 가문과 얽힌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게는 그녀의 선택을 강제할 권한도, 능력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선택한 것을 존중해주는 것만이 내가 할 도리였다.
“…맞는 말이네요. 이미 엎질러 진 물. 이렇게 된 이상 방을 옮기기 전까지 잘 지내보죠. 프레이.”
“잘 부탁드립니다. 자일.”
“아……. 근데 샬럿은 괜찮을까요? 아마 제일 걱정하고 있을 거 같은데….”
“내일 제가 한 번 잘 말해보겠습니다.”
걱정이 앞섰다. 입학시험부터 지금까지 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샬럿을 봐오며 한 가지 느낀 게 있다. 그녀가 누구보다 프레이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던가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한 명의 친구로서 진심으로 아끼고 있는 게 느껴졌다.
샬럿이 프레이를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성깔 더러운 년이 프레이에게만 욕지거리 한 번 하지 않고 고분고분 하지 않은가.
그렇게나 아끼는 친구가 전설 속 가문의 후예인지 뭔지 하는 수상한 남정네랑 같이 살게 되었으니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그럼 저희가 같은 방에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규칙을 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만큼 동거 생활에 필요한 규칙이 있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홍조를 띤 프레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동거생활…….”
“프레이…?”
“예, 예?”
“제 말 들으셨습니까?”
“아, 네네! 앞으로의 동거에 필요한 규칙을 정하자고…….”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든 프레이의 얼굴을 바라보니 나 또한 ‘동거’라는 단어가 괜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정신을 다잡기 위해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크흠. 그럼 우선은….”
뭐가 가장 불편할까 라는 고민을 하던 나는 급하게 방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그녀가 물었다.
“자일…?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다행입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그녀.
“방 안에 화장실이 있는지 확인해보았습니다.”
“화장실이요…?”
“네. 화장실이 없다면 씻는 것도 문제니까요. 만약 남녀 공용 목욕탕을 이용하게 되면 누구보다 프레이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감탄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프레이.
“그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다니…. 자일과 만난 건 정말 행운입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앞으로의 생활에 필요한 규칙들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서로 씻는 시간을 정한다.
두 번째. 방에 들어올 때는 언제나 노크를 한다.
세 번째. 상대방의 침대, 소지품 등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네 번째. 생활하는 데 있어 불편한 점이 생기면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얘기한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대충 이 정도네요. 더 필요한 게 있을까요?”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생활하면서 떠오르는 게 있다면 그때 다시….”
꼬르륵.
당황한 프레이가 얼굴을 붉히며 양손으로 배를 가렸다.
“드, 듣지 마세요.”
그 나이 때 소녀다운 귀여운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풉.”
“왜, 왜 웃으십니까!”
“아, 미안합니다. 저도 모르게.”
프레이가 씩씩 거리며 소리쳤다.
“자,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입니다! 웃지 마십쇼!”
“하하, 알겠습니다.”
이럴 때는 영락없는 소녀였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던 우리는 마지막으로 각자 사용할 침대를 정하기로 했다.
한 쪽은 창가, 다른 하나는 화장실 쪽이었다. 나는 어느 쪽을 써도 상관없으니 편한 곳을 고르라고 말했지만, 프레이가 공정하지 못하다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게임인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하기로 했다.
승자는 나였다.
이왕 이긴 거 전망 좋은 창가 쪽 침대로 결정했다.
고된 하루였다. 침대 앞에 선,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슬슬 졸음이 쏟아졌다. 그때 뒤쪽에서 프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일 절대 이쪽 보시면 안 됩니다.”
잠시 후.
툭.
옷가지가 바닥에 떨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대 돌아보시면 안 됩니다.”
“…네.”
괜히 뒤를 돌아봤다가 지금껏 쌓아왔던 신뢰를 무너트릴 생각은 없었기에 빠르게 환복을 마친 후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제 봐도 괜찮습니다.”
맞은편을 바라보니 침대에 걸터앉은 프레이가 길게 늘어트린 머리칼을 묶으며 나를 바라봤다.
수수한 잠옷차림이었지만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인상 때문인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 모습도 잘 어울리네요.”
“…그, 그런 가요.”
작게 대답한 프레이가 이불 안으로 숨은 채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한 쪽 구석에는 그녀가 항시 차고 다니는 목걸이와 붕대가 잘 정리된 채 놓아져 있었다.
아마 남장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압박용 붕대인 듯 했다. 인식저해 아티팩트가 있음에도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해 쓰는 것일 테지.
매일 저런 걸 두르고 생활할 걸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자일, 오늘 하루 고생했어요.”
“프레이도요.”
“입학시험부터 지금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돌이켜보면 그 경험들 덕분에 저는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프레이가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걸까요…. 저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프레이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정말 두렵다는……. 마음이 드……”
“…….”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자 그녀를 열심히 불러보았지만.
“……프레이? 자요?”
들려오는 건 규칙적인 숨소리 뿐 이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곤히 잠든 그녀가 보였다.
어린 아이처럼 새근새근 자는 것을 보니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은 듯 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짐을 느끼며, 점차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 *
[■일 지■하르트. 나■ 네가 누■지 알고 ■다. 내가 ■군지 ■고 ■다면 연무장■로 ■라.]
벌떡 일어난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주위를 살폈다. 맞은편에는 프레이가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하아…. 하아…. 꿈인가…?”
창틈 사이로 달빛이 내리쬐는 걸 보아 아직 새벽인 듯 했다.
잠깐 자는 사이에 식은땀을 얼마나 흘린 것인지 등이 흥건히 젖어있었다.
분명 꿈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뭉개진 발음 때문에 정확히 무어라 말한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연무장’이라는 단어 하나 만큼은 생생했다. 그저 꿈이라고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상당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침대맡에 두었던 옷을 걸쳐 입고 창문을 열었다. 창문 밖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음을 차단하는 마법을 사용했다.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한 나는 주변을 둘러본 뒤, 로만을 소환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
“지금부터 주변을 경계해라. 기척은 내지 말고. 무언가 이상이 있으면 바로 내게 보고해,”
“알겠습니다.”
로만의 신형이 사라졌다. 살수로서 길러진 그에게 기척을 숨기는 것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연무장을 향해 내달렸다. 빠르게 주변 풍경이 바뀌며 순식간에 연무장에 도착했다.
“…….”
연무장은 텅 비어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허나 사람은커녕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사람과 가장 비슷한 형태를 한 것은 연무장 구석에 있는 작은 인형이었다.
‘웬 인형?’
어린아이가 바느질을 한 것처럼 조잡한 디자인이었지만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2등신이네. 날개도 있고. 뭘 만든 거지, 천사? 악마?’
천사라고 하기에는 날개가 검은색이었다.
금방 관심이 식어버린 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계속 주변을 경계했다.
어림잡아 10분 정도가 흘렀다. 그동안 계속 기척을 숨긴 채 연무장 주위를 지켜보았지만, 그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로만에게도 아무런 보고가 없는 걸 보면 내가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았다.
‘개꿈인가 보군.’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머리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듯이 허리를 돌리며 손날을 뻗었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을 본 순간.
“어머, 이참에 나도 죽이려고? 위대하신 영웅의 후예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 씨…?”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