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뭐해? 하던 거 마저 하지 않고. 계속 해.”
노골적인 살기(殺氣).
나는 급하게 손을 내리며 말했다.
“이건….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나간 거라…. 근데 이 늦은 시간에 이곳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온 게 아니라 네가 온 거야.”
손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살기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불같은 성격인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카데미 안에서 살인이라도 저지를 셈인가?
뒤늦게 이변을 감지한 로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 괜찮으십니까? 분명… 아무런 기척도 감지하지 못했거늘 대체 어떻게….”
“아, 괜찮아. 괜찮아. 아는 사람이야. 돌아가도 돼.”
로만을 보던 아리아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낯이 익다했더니 저번에 봤던 그 살수네? 설마 그걸 가지고 언데드로 만들 생각을 한 거야? 알면 알수록 재밌다. 너.”
상대가 아리아 발렌타인이라면 로만과 내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한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밤의 총애(寵愛)를 받는 자.
이건 비유적인 표현 따위가 아니다. 그녀는 서열 41위인, 피와 밤의 마신 녹스의 가호를 지니고 있었다.
가호(加護)란, 신이 직접 내려주는 일종의 축복으로서 신과 계약을 맺거나 힘을 빌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가호를 내려주는 신이 있는가 하면 시련을 부여하고 통과한 이들에게만 가호를 내려주는 신도 존재했다.
신들의 성향, 종류에 따라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호도 제각기 달랐다.
그 머저리 같은 라스가 용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가호 덕분이다.
물론, 가호를 내려주는 것 자체가 본인들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개연성(蓋然性)을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에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이쯤 되면 눈치 챘겠지만 마신들 또한 자신이 마음에 든 인간들에게 가호를 부여한다.
당연히 마신을 숭배하는 마족이나 흑마술사들은 그것을 가호라고 부르지만, 주신을 숭배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것을 저주로 여긴다.
사실 저주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는 게 마신들의 가호는 특이하게도 병과 약을 동시에 준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면, 특별한 힘을 쥐어주는 대신 그와 맞먹는 패널티를 부여한다는 얘기다.
왜 그딴 짓을 하는 건지는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지만 아마 점찍어놓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한 악취미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하하. 죄송한데 그 살기 좀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왜? 너 나를 속였잖아. 너 마족 혼혈 아니지?”
어쨌든 그녀가 지니고 있는 ‘밤의 총애를 받는 자’는 이름 그대로 밤에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가호였다.
원래 지니고 있는 힘이 배로 증가하며,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녀를 찾을 수 없다. 어둠 그 자체에 동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뛰어난 살수인 로만조차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수밖에.
“뭐, 뭔가 오해를 하시는 거 같은데 저 마족 혼혈 맞습니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하!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너 지그하르트 가문의 후예라며. 인간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받드는 가문의 후예가 사실은 마족이었다는 거야?”
이렇게 될 걸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이미 그에 대한 답변은 준비한 상태였다.
나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지그하르트 가문의 방계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가 지그하르트 가문의 일원이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고요. 인간들 손에 살해당한 아버지를 보며 평생을 숨어 살았습니다.”
살기가 조금 줄어들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인간과 마족의 혼혈이 결코 흔한 게 아닐 텐데…. 더군다나 영웅 가문의 일족이 왜 마족과 결혼한 거지?”
“저도 자세히 알지는 못 하지만 현재의 지그하르트 가문에게 남은 것은 이름 뿐 입니다. 아직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이들이 있기에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가문의 덕을 볼만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마찬가지였고요. 오히려 일반 평민들보다도 가난하게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네 어머니와 살던 곳이 어디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마족들이 사는 영토와 가장 인접한 곳에 위치한 마을을 말했다.
“워낙 촌이라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국 남부에 위치한 카잔이라는 마을입니다.”
빌어먹을 용사 일행과 여행을 다니며, 마족에 대한 사전 조사를 도맡았던 게 바로 나였다.
“카잔이라….”
그녀의 눈빛이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열변을 토해냈다.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처음 만나게 된 것도 그곳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산에 약초를 채집하러 간 어머니가 산적들에게 둘러 싸여 위기에 쳐했을 때 도와준 분이 바로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그때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아직도 잊혀 지지가 않는다며 매번 말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워낙 치안이 좋지 않은 동네라 산적들에 습격이 빈번했거든요.”
“그래. 일단은 네 말을 믿도록 하지. 근데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평생 인간들을 피해 다녔다면서 어째서 아카데미에 들어온 거지?”
이제 하이라트였다.
“이 나라를 바꾸려고요.”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대로 말해봐.”
“이종족 혼혈의 차별. 마족에 대한 차별. 이 모든 것들을 없애는 게 제 꿈입니다.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를 졸업해 이 나라를 지지하는 기둥이 되어, 제 손으로 하나하나 바꿔갈 겁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애초에 네가 마족의 피가 섞여있다는 사실만 말해도 바로 처형당할 텐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많이 어렵겠죠…. 아니, 불가능에 가깝겠죠. 허나 저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마족과 인간의 피를 둘 다 지니고 있는 저이기에 가능한 일이니까요. 지금 이 시간에도 저처럼 고통 받는 많은 이들이 있으니까요. 마족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지성체입니다. 감정도 느끼고, 사랑도 하며, 가족도 꾸리죠. 그들에게도 나라가 있고, 국민이 있습니다. 저는 인간과 마족이 더 이상 대립하지 않고, 화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분별한 증오의 연쇄를 끊는 것. 그것이야 말로 제가 지향하는 진정한 꿈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동포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고 해도?”
“대(大)를 위해서 소(小)를 희생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이 피를 흘리지 않게끔 하는 것도 제 꿈의 일부분이니까요.”
“헛된 몽상이네.”
“맞습니다. 저는 몽상가(夢想家)죠. 하지만 꿈을 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 않을까요?”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꿈같은 애기지만 나쁘지는 않았어. 어디 한 번 잘해봐. 내가 지켜볼 테니까.”
나 또한 그녀를 마주보며 밝게 웃었다.
“반드시 해낼 겁니다.”
갑자기 그녀의 전신에서 흉흉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당황한 티를 최대한 숨긴 채 당장이라도 싸울 수 있도록 몸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뭐지? 내가 실수라도 한 건가….’
연무장 전체가 어둠으로 뒤덮이며, 그녀의 등에서 박쥐 날개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펄럭.
활짝 날개를 핀 그녀가 허공 위로 날아올랐다. 마성(魔性)이 깃든 붉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내 진짜 이름은 아리아 데아몬. 마왕국의 제1 왕녀이다.”
나는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와, 왕녀님을 뵙습니다!”
“어둠이 찾아오면 어디서든 너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네가 내게 말한 꿈. 절대 잊지 말아라.”
“아, 알겠습니다!”
“명심해라. 밤은 영원하다는 것을.”
잠시 후.
어둠이 걷혔다. 그녀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이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이유건 간에 밤에 그녀와 싸우는 것만큼은 절대 사절이었다.
“여전히 재미있는 짓을 벌이고 다니는구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바짝 경계를 하고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누구냐!”
“이쪽이다. 이쪽.”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니 아까 보았던 이등신 인형이 짧은 발을 힘겹게 옮기며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었다.
“너…. 설마 아스모데우스야?”
“오랜만이구나, 계약자여.”
나는 반가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힘껏 뛰어가 그녀를 들어올렸다.
“이게 얼마만이야! 그동안 왜 말이 없었어! 그 몰골은 또 뭐고!”
인형이 조그마한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전쟁을 하러 갔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놈 덕분에 일이 복잡해졌느니라.”
“나?”
그제야 내가 안드로말리우스에게 했던 거래가 생각이 났다.
“아……. 맞다. 미안, 그때는 내가 진짜 급했거든.”
그녀의 뭉툭한 손가락이 움직였다.
“됐다. 너를 탓하려고 꺼낸 얘기가 아니니까. 우선은 저쪽으로 가서 얘기하도록 하지.”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연무장 뒤편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품에 있던 그녀가 폴짝 뛰어내려 내 옆에 앉았다.
“좋구나.”
“그 몸은 뭐야?”
“작은 인간 아이가 이 인형을 만들어 매일 같이 내게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선물을 주었지.”
어린 아이가 어떻게 아스모데우스의 이름을 알고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너 설마… 그 아이 영혼도…”
“어린 아이의 영혼은 좋아하지 않는다.”
“다행이네. 그래서 그간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별거 없다. 내게 군단을 달라고 요구하던 안드로말리우스의 팔다리를 잘라다가 친히 입에 넣어주었지.”
할 말을 잃은 나는 빤히 그녀를 바라봤다.
“걱정할 거 없다. 원만한 합의를 끝마쳤으니. 이외에도 할파스와 라움의 머리통을 전시해두었다. 전쟁을 틈타 겁도 없이 내 영역을 침범하더군. 새 대가리라 그런지 장식용으로 딱이니라.”
각각 서열 38위, 40위의 마신이었다. 그런 초월적 존재를 무슨 길가다 개미를 밟아 죽인 것 마냥 담담하게 얘기를 하고 있으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전쟁은 누가 일으킨 건데?”
“파이몬과 시트리였다. 바알이 동면에 들어갔으니 영역을 넓히겠다고 벌인 게지. 뭐 애초에 그 둘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둘 다 최강자의 반열에 드는 마신들이었다. 그들의 본체 일부분만 이 세상에 현현하더라도 아마 대륙의 3분의1 정도는 흔적도 없이 소멸할 정도의 범차원적 존재들.
최초의 초월자 살몬이 걸어둔 맹약과 차원 사이를 틀어막고 있는 개연성의 벽이 없었다면 지금쯤 대륙은 없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과는?”
“휴전이다. 게헤나에서는 무척 이례적인 일이지. 영겁의 시간을 버텨온 그들도 결국 소멸을 각오할 자신은 없던 것이다.”
“…….”
“그건 그렇고 못 본 새 성장을 좀 한 거 같구나. 레메게톤에 대한 단서는 찾았느냐?”
“아직. 이제 아카데미에 들어왔으니 본격적으로 찾아야지.”
“명심해라. 우리가 정식으로 계약하는 건 네가 레메게톤을 찾은 이후다.”
“알고 있어. 걱정마. 내가 반드시 찾아내서 너의 꿈을 이뤄줄 테니까.”
인형의 못생긴 입술이 삐죽 올라갔다.
“…그래봤자 한낱 필멸자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아, 그러고 보니 게헤나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재미있는 얘기? 뭔데?”
“바르바토스가 인간이랑 겨루었다더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순간 두 귀를 의심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인간? 내가 아는 그 인간?”
“그렇다.”
서열 8위, 투쟁(鬪爭)의 마신(魔神) 바르바토스. 무(武)를 숭배하고, 사랑하며, 미쳐있는 허나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독보적인 마신으로서 싸움에 미친 전투광(戰鬪狂)그 자체였다.
인고의 시간을 살아온 이유 자체가 오로지 싸우기 위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나는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아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대체 어떻게…. 당연히 화신체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인간이랑….”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원체 별난 놈이니 가능한 일이지. 허나 더 별난 건 그 인간 놈이더구나. 한낱 인간 주제에 자신을 하늘이라 칭하는 웃긴 놈이었지. 이름이…….”
그때,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단 한 명의 이름.
“…소천마(小天魔) 천악천(天惡天).”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구나. 이 인간을 아느냐?”
“…알지.”
“그래? 그러고 보니 인간 치고는 꽤 낯이 익는 구나. 내가 이 이름을 어디서….”
때마침 붉게 물든 만월을 보며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아주 잘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