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뇌에 박히는 듯한 음성.
전음(傳音)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네놈이군. 내 석상을 부순 것이.]
“그렇다. 너는 누구지?”
[마족의 땅에서 내가 누군지 묻는 것인가?]
천악천은 내공을 끓어 올려 전신의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숱한 전투를 겪으며 얻은 경험이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긴장 하고 있다? 이 몸이…?’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기운이었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조부(祖父)를 뵈었을 때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현 천마신교의 태상교주(太上敎主). 천악성(天惡星).
중원 역사상 최강의 무력을 지닌 이들 중 한 명이라고 평가 받았던 그를 마주했을 때조차도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신(神)이라는 것이 실로 존재하는 것이었단 말인가?’
천악천은 이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것들이 그저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초대 천마나 소림과 무당의 개파조사(個派調査)처럼 깨달음을 얻어 인간의 육신으로 우화등선(羽化登仙)에 성공한 초월적 존재들이라 추측했다.
신선(神仙)이 된 그들도 결국에는 신이니까.
그런데, 이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감정을 대체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공포? 두려움? 그런 단어 따위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질감(異質感).
이 세계의 것이,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본능적인 깨달음.
그것으로부터 찾아오는 이질감이었다. 개미가 하늘을, 인간이 우주를, 미물이 자신의 이지(理智)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의 대해(大海)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미지(未知)에 대한 경외(敬畏).
천악천이 실소를 터트렸다.
‘이 세계에는 이러한 것들이 존재했단 말인가! 정중지와(井中之蛙)라고 했던가. 이제 서야 이 몸이 고작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구나.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그는 이 순간에도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천외천(天外天).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깨달았음에도 그는 절망하기보다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아해(兒孩)야. 천마(天魔)란 무릇 하늘을 깨부수는 자이니라.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면 그것을 부수고 나아간다.
“파천(破天).”
[지금 웃고 있는 것이냐?]
기묘한 감각과 함께 천악천은 자신이 다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쯤 되면 거친 발버둥이라도 한 번 해볼 텐데 오히려 그는 자신을 이끄는 낯선 힘에 몸을 맡겼다.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인 칠흑(漆黑)의 공간.
“…심상세계(心狀世界)인가.”
오로지 칠흑 같은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는 과연, 자신이 ‘앉았다?’라는 행동을 한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인식. 인지. 관측.
수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떠오르며 존재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과연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인가? 지금 나는 숨을 쉬고 있는가? 나는 사고를 하고 있는가?
숱한 의문들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돼 그를 현혹한다. 허나 그의 심상은 잔잔한 호수 위 물결처럼, 차갑고 고요하다.
느껴진다. 무수히 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
눈을 감고 있음에도 오롯이 보였다.
수 십, 수 백, 아니 수 천 , 수 만 개의 눈동자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주시한다.
형태는 다양하다. 인간의 눈동자. 짐승의 눈동자.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기괴한 눈동자.
그럼에도 천악천은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의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탁한 마기가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는 눈동자들이 그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였다.
천악천이 눈을 떴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올곧은 눈동자가 향한 곳은 거칠게 피어오르는 검은 불꽃이었다.
단전에서 흘러나온 한줌의 내공이 피워낸 흑화(黑火).
스스로 탈마(脫魔)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 중 진정한 깨달음을 얻어야만 만들어낼 수 있는 천마(天魔)의 권능(權能).
천마염(天魔焰).
검은 불꽃이 위태롭게 일렁인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오롯이 그와 수 만 개의 눈동자뿐이었음에도 마치 거센 바람이라도 부는 듯 점차 불씨가 사그라든다.
그는 동요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호흡을 내뱉는다. 작게 일렁이던 불꽃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변을 뒤덮는다. 꽃을 피우듯이 만개한 칠흑의 화염이 널리널리 퍼져나간다.
붉게 물든 천악천의 눈동자가 일렁인다.
“나와라. 마신(魔神)이여.”
그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수 만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눈을 감았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그의 기억 속 석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형의 존재가 걸어 나왔다.
“마족이 아니라 인간이었군.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천마신교의 차기 교주. 소천마 천악천이다.”
말의 머리에 달린 4개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괴기스러운 광경에도 천악천의 얼굴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흐음. 이계(異界)에서 온 영혼인가.”
“그대가 마신이라 불리는 존재인가?”
“이계의 존재여. 대체 무엇을 믿고 혓바닥을 놀리는 것이냐?”
사방에서 수 백 개의 손이 뻗어 나와 그의 몸을 감쌌다.
다만 일반적인 손이라기에는 손가락 개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어떤 것은 10개, 어떤 것은 20개. 제각기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는 손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어느새 천악천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를 믿고.”
화르르륵!
전신에서 솟아오른 검은 불꽃이 그의 몸을 뒤덮고 있는 손들을 불태웠다. 마신 오르바스는 흥미롭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정녕 인간의 영혼이 맞는 것인가? 화신체라고는 하나 고작 인간 따위가 이걸 견뎌낸다고?’
비록 제약으로 인해 화신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힘으로 만들어진 이 끔찍한 공간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인간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대부분이 스스로의 심마(心魔)에 사로잡혀 정신이 붕괴했다.
그런데 눈앞에 인간은, 정신이 붕괴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상념(想念)을 형상화하여 내게 저항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인간이여. 내 사도가…….”
한창 말을 하고 있던 오르바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칠흑 같은 공간 저편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그 사이를 비집고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갓 사춘기에 접어든 듯 앳된 얼굴. 활기차게 웃으며 걸어오는 그녀는 영락없는 10대 소녀였다.
“야, 오르바스! 심심한데 나랑 싸우자-!”
소녀를 발견한 오르바스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바, 바, 바르바토스? 여긴 어쩐 일로…?”
소녀의 시선이 천악천에게로 향했다. 오색 빛깔의 눈동자에 광채가 깃들었다.
“어, 뭐야? 웬 인간이야?”
천악천은 단번에 그녀가 자신을 이곳으로 초대한 마신보다 강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꼈다.
그녀가 이 공간에 들어온 순간, 그의 몸에서 전율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천악천을 유심히 바라봤다.
“…….”
“흐음. 재미있는 인간이네? 거기, 너. 이름이 뭐야?”
“나는 대 천마신교의 차기 교주, 소천마(小天魔) 천악천이다.”
그 말을 들은 소녀가 꺄르르 웃었다.
“뭐? 천마(天魔)? 고작 인간 주제에 자기를 하늘이라고 칭하는 거야? 재밌다, 너.”
“…….”
“확실히 특이하긴 하네. 나를 앞에 두고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잖아? 역시 너도 싸우고 싶지? 그치?”
“…….”
“괜찮아, 괜찮아. 힘 조절 할 거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일방적인 승리 따위가 아니거든. 오로지 순수하게 무력으로만 겨뤄보자고!”
천악천은 대답 대신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기수식(起手式).
무림의 방식으로 화답을 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소녀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네.”
* * *
아카데미에 입학한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우려했던 예상과는 달리 요한의 수업은 상당히 유익했다.
수업에 지각을 하거나, 수업 도중에 잠을 자거나, 말도 없이 펑크를 내거나, 상념에 잠겨 혼잣말을 내뱉거나, 본인만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줄줄이 늘어놓을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가 마법이라는 학문을 얼마나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 열정 덕분에 나 또한 마법이라는 학문에 더욱 관심이 생겼고, 천재가 괜히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그의 이론 수업은 초보자인 나조차 이해하기 쉬울 정도로 일목요연했다.
뭐, 가끔은 너무 간략하게 설명하는 탓에 이해는커녕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집요하게 질문을 해대면 귀찮다는 듯 짜증을 내면서도 나름 눈높이를 맞추어 설명해주었다.
아마 그의 입장에서는 이토록 간단한 것을 왜 이해하지 못하냐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기에 불필요한 설명은 생략하고, 핵심만 전달해주려고 하는 것일 테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부가적인 설명이 없으면 그 간단한 것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샬럿과 실프도 일주일 사이에 실력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 요한을 찾아가 들은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된 듯 했다.
몇 가지 치명적인 단점을 제외하면 그는 꽤 유능한 교수였다.
그 외에 시간에는 반 애들과 수련을 하거나, 홀로 레메게톤에 대한 단서를 찾으러 다녔다.
아스모데우스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보았지만 마땅한 수확은 없었다. 직접 발로 뛰다 보니 느낀 건데, 아카데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넓어도 너무 넓었다.
기숙사, 강의실, 식당, 잡화점, 마법용품점, 무기점, 연무장, 여관, 광장, 인공호수 등 이외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셀 수도 없이 존재했다.
이게 아카데미인지, 도시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연무장 구석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내게 이든이 다가와 물었다.
“형님.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든. 그놈의 형님 소리 좀 이제 집어치우면 안 될까?”
오늘따라 가로로 찢어진 그의 눈이 더욱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든은 아랑곳하지 않고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저희는 이미 한 배를 탄 동지지 않습니까. 저도 제 나름의 생활을 유지해야 하니 좀 도와주십쇼.”
동지는 누가 동지냐.
저놈의 뱃속에 뱀 여러 마리가 꽈리를 틀고 앉아있음을 뻔히 안다.
저, 저 음습한 눈빛 봐라. 입학시험 때야 목숨이 걸려 있으니 일단 급하게 손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이 놈과는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수상한 점이 한 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무슨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를 가까이 둘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그래. 일단은 맞춰줄게. 대신 너무 엉겨 붙지는 마라. 서로에게 좋을 거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든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예 소음차단 마법을 펼쳤다.
“그 얘기 들으셨습니까? 최근 제국 곳곳에서 마신숭배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와 비할 수준이 아니라는군요. 아예 라파엘 교단에서는 대대적으로 이단심문관들을 파견해 마신숭배자들 척살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소문입니다. 또 제가 입수한 정보로는 이 아카데미에도 저희 외에 또 다른 마신숭배자들의 세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건 제법 쓸만한 정보였다. 레메게톤을 수색하며 새삼 나 또한 독자적인 정보세력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있었다.
‘빠른 시일 내에 하르만 백작가를 정리해야겠군.’
“그거 확실한 정보야? 들어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예, 믿을 만한 정보입니다. 그도 그럴 게 저희도 지금 이곳에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뚫어내려고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하긴…. 우리도 들어왔는데 다른 세력이 들어오지 못할 건 없지.”
이든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형님. 72교단의 교주가 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