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기억… 말씀이십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교주님의 뜻이라면.”
“아니. 내 뜻이 아니라 네 의견을 묻는 거야. 기억을 찾고 싶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어?”
“…딱히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온 걸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기억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마치 본능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숨겨진 가족이 있을 수도 있잖아. 기억을 되찾게 되면 가족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것처럼 ‘가족’이라는 두 글자를 천천히 곱씹었다.
“가족…….”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제게도 가족이 있었을까요.”
나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걸 이제 알아보자는 거지.”
“알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별거 없어. 잠시 눈을 감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도 괜찮아.”
그녀가 눈을 감았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지금부터 내 마기가 네 몸 안으로 들어갈 거야. 처음에는 조금 통증이 있을지 모르지만, 곧 가라앉을 거야.”
“네.”
천천히 마기를 끓어 올리자, 내 손을 타고 그녀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지금부터 그녀의 정신세계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로만과 함께.
“로만. 이쪽으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로만이 내 옆에 섰다.
정신조작 계열 흑마술인 ‘망각의 늪.’
원래는 상대의 정신세계에 침투해 기억을 조작하고, 서서히 붕괴시키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지만 응용하기에 따라 다양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원리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지만, 당연하게도 흑마술을 운용하는데 있어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잠시 후.
의식이 흐려짐과 함께 우리는 그녀의 정신세계로 들어갔다.
* * *
사방에 짙은 안개가 깔려 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를 둘러봐도 안개 뿐 이었기에 방향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별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일과 로만은 우선 걷기로 했다.
저벅. 저벅.
바닥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곳이 그녀의 정신세계입니까?”
자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누군가의 정신세계에 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무어라 확답을 해줄 수 없었다. 그저 흑마술을 시전한 당사자였기에 본능적으로 확신했을 뿐.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시간의 흐름조차 인색한 이곳에서 그들은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지에 의문을 품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걷고. 걷고. 또 걷고.
하염없이 발을 내딛었다.
저 멀리서 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거 같군.”
거대한 쇠사슬이 문을 칭칭 옭아매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자일의 손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열쇠 모양으로 바뀌었다.
그가 자물쇠에 열쇠를 넣자, 철컥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한 겹씩 사라졌다.
“들어가지.”
둘은 문을 열고 안 쪽으로 들어갔다.
환한 빛이 그들을 감싸며 시점이 바뀌었다. 꿈에서 느낀 감각과 동일했다.
자신이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1인칭으로 진행되는 꿈이 있는가 하면, 전지적 시점으로 세상을 관찰하듯 바라보는 꿈이 있다. 그들이 느낀 것은 후자였다.
마치 영화를 배속해서 틀어놓은 것처럼 주변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그렇게 수 십 번 풍경이 바뀌고,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호화스러운 인테리어로 치장된 큰 방이었다. 로만은 그 방이 어디인지 알고 있는 듯 했다.
“설마…!”
“왜 그러지, 로만?”
“…이곳은 기레스 하르만의 집무실입니다.”
화려한 의자에 앉아있는 붉은 머리칼의 남성. 그 옆에는 차가운 인상의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던 남성이 벌떡 일어나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그러나 여인은 별다른 내색 없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데이지. 데이지. 데이지. 데이지! 데이지!! 데이지!!! 아무리 감정을 거세당했다지만 매번 그렇게 재미없게 굴 거야? 뭐라도 반응을 좀 해보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찰싹!
여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찌나 세게 때린 것인지 뺨이 붉게 부어올라있었다.
“데이지.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거야…? 내가 사랑한다고 했잖아! 어? 사랑한다고 했어, 안 했어? 근데 왜 매번 그런 반응이냐고! 이 년아! 네 이름은 사랑이잖아. 그럼 네 이름처럼 제대로 사랑을 해보라고오오!!!”
“죄송합니다.”
남성은 성난 얼굴로 그녀의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구타.
이빨이 부서져라 짓씹던 로만이 결국 참지 못하고 단검을 빼내 들었다.
후웅!
허나 그의 검은 그대로 남성의 몸을 통과했다.
이곳은 기억의 잔상이었기에 관찰자인 그들로서는 그 어떤 물리적 가해도 할 수 없었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데이지!! 너도 어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너도 나 사랑하잖아? 하르만 백작의 차기 가주인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어? 이거 완전 영광이잖아? 너도 기쁘잖아? 그치? 그러니까 어서 행복한 얼굴로 내게 달려들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무차별적으로 이어지는 구타 속에서 여인은 그저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으드득.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자일이 로만을 돌아봤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 된 눈동자. 얼마나 세게 짓이긴 건지 그의 손바닥에서는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몇 마디 나눠본 게 전부인 자일조차 치가 떨렸는데, 혈육인 로만의 분노는 어떠할까. 그것은 겪어보지 않은 자가 감히 재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30여분 정도 구타가 반복되고 나서야 붉은 머리칼의 사내는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집무실을 나갔다.
텅 빈 방에는 힘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여인이 홀로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
장면이 전환됐다.
배경은 여지없이 집무실이었지만, 인물들의 얼굴을 보아하니 시간이 꽤나 흐른 듯 했다.
붉은 머리칼의 남성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여인이 있었다.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배가 전보다 불러있었다는 것이다. 붉은 머리의 사내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이 사고를 치는군.”
“죄송합니다.”
그는 여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누군가를 불렀다.
“로즈.”
집무실 안쪽에 드리운 그늘 속에서 단정한 복장을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이 년 폐기해.”
여인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지만, 빠르게 대답이 들려왔다.
“존명(尊命).”
로만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분노와 어우러져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의 뺨을 타고 붉게 물든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지금까지 쭉 살펴본 결과, 정황상 그녀는 호위라기보다는 노리개에 가까웠다.
이후에 장면은 책장을 넘기듯 빠르게 지나갔다.
여인에게 끌려간 데이지. 바닥에 눌어붙은 핏자국이 가득한 방에서 정체불명의 약을 삼켰다.
뒤이어 들어온 마법사가 그녀에게 마법을 걸었다.
며칠 간 그러한 일들이 반복됐다.
일주일 정도가 흐른 뒤에 여인은 의식을 잃은 데이지를 어딘가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폐기된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여인이 시체를 뒤졌다.
불에 탄 것인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그을린 시체.
여인은 데이지의 손목에 있던 팔찌를 끊은 뒤, 시체의 손목에 팔찌를 채웠다.
그러고는 데이지를 등에 맨 채 저택을 빠져나가 하수구에 그녀의 몸을 뉘어주었다.
“……미안하다.”
그 말을 끝으로 여인은 자리를 떠났다.
시간이 흘러 정신을 차린 데이지는 하수구를 빠져나갔다. 그녀는 텅 빈 인형처럼 한 가지 말을 쉴 새 없이 되뇌었다.
“살아…야 돼. 나는 살아야… 돼.”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살았었던 빈민가로 향했다.
빈민가의 구석에서 바닥에 떨어진 빵을 주워 먹으며 삶을 연명했다. 때로는 그 작은 빵 조각을 옆에 있던 아이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하루하루, 그저 숨만 쉬고 살아갈 뿐이었다. 허나 겨울이 다가올 때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새하얀 눈이 무릎까지 쌓인 어느 날. 짙은 화장을 한 여인이 독한 향수냄새를 뿌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너 제법 반반하게 생겼네. 보아하니 갈 데도 없는 거 같은데 나랑 같이 일 안할래?”
데이지가 물었다.
“살 수 있나요?”
뜬금없는 그녀의 질문에 여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너 하기 나름이지.”
데이지는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에게 말을 건넨 여인은 인근 사창가의 마담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감정을 거세당한 그녀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인형에 가까웠다.
달콤한 말과 웃음을 파는 창부로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처음 그녀의 외모를 보고 혹한 손님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었다.
하염없이 애정을 갈구하는 이들, 집안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폭력으로 분출하는 이들, 그저 욕정을 해소하기 위한 이들 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그녀를 거쳐 갔지만 그녀의 태도는 언제나 한결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자매님. 이 분이십니까?”
“네. 얼마 주실 건가요?”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호호. 감사합니다.”
마담이 그녀의 손을 이끌고 빈민가에 가장 구석진 곳으로 향할 때조차 그녀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푼돈에 팔려 이교도의 소굴에 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가 내뱉은 것이라고는….
“그분을 믿으면 살 수 있나요?”
“그럼요. 안드로말리우스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 하십니다. 저희와 함께 하시죠. 당신을 구원해드리겠습니다.”
이 말이 전부였다.
그렇게 그녀는 노인과 함께 교단으로 향했다. 노인은 교단에서도 큰 영향력을 펼치는 인물이었다.
자일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의 손으로 직접 숨통을 끊은, 1장로 라칸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런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안개가 차올랐다.
그들의 눈앞에 문이 나타났다.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 *
눈을 떴을 때 이미 로만은 사라진 뒤였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지금 당장은 그녀를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참혹한 과거를 보고나니 섣불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흔하디흔한 광신도라고 생각했건만…….
세상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내 눈앞에 있는 그녀는 어디서 보아도 비극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차분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
그 순간.
뚝.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 줄기 물방울.
“……어?”
나는 말없이 바닥을 바라봤다.
투두둑.
서서히 젖어가는 바닥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기도했다.
조용한 방안을 가득 매운 것은 텅 빈 물방울 소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