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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45화 (45/180)

45화

데이지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방을 떠났다. 아마 자물쇠를 푼 영향 때문에 본래의 기억과 감정이 미약하지만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듯 했다.

멀지 않아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전부 떠올리게 될 것이다.

“……가혹하네.”

결과적으로 그녀는 로만의 여동생이 맞았다.

기억 속에서 보았듯이 로만이 보았다고 주장한 시체는 아마 폐기장에 있던 시체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여인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를 도우려 했던 것 같다.

“이제 나와. 로만.”

그늘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로만.

응집된 감정이 그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내 것이 아님에도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내 몸에서 실시간으로 마기가 빠져 나가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흡사 악귀와 같은 형상을 한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이제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생겼나.”

그가 무릎을 꿇으며, 눈을 빛냈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살기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당신의 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충실한 종으로 살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드리겠습니다.”

“…….”

“복수를 바랍니다. 기레스 하르만의 몸뚱이를 잘게 썰어 잘근잘근 씹어 먹게 해주십시오. 아니, 그가 평생을 지옥보다 더 고통스러운 지옥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분노를 넘어 처절하기까지 한 외침에 온몸의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 아이가 평범하게,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온갖 감정이 뒤섞인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약속하마.”

그가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 없다. 이건 정당한 거래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를 역소환하였다. 평소라면 개의치 않았을 테지만 현재 그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를 혼자 두었다가는 자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기를 많이 사용한 탓인지 이마에서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침대에 몸을 던졌다. 피로가 몰려오며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기레스 하르만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기며 잠에 들었다.

* * *

아침이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기지개를 폈다.

최근 들어서 가장 상쾌하게 일어난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가자 교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산 정상이라 그런지 숨을 쉴 때마다 시원한 공기가 폐에 스며들었다.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교단을 거닐었다.

“교주님. 좋은 아침입니다.”

“교주님.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교주님. 식사를 대령해올까요.”

마주치는 교인들마다 내게 깍듯이 인사를 해왔다. 새삼 다시 교주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조금 더 걸어가자, 저 멀리서 이든이 교인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나를 발견한 이든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 교주님! 간밤에는 잘 주무셨습니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 별거는 아니고. 아카데미에 잠입해 있는 교인 중 한 명이 이런 걸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가 쪽지를 내밀었다.

Գոտի Ա. Ես ոչ մի հուշում չեմ գտե.

쪽지에는 생전 처음 보는 문자가 적혀져 있었다.

‘암호인가?’

마침 옆에 있던 해리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이건 저도 처음 보는 문자네요. 어디 나라에 언어일까요?”

이든이 능글맞게 말했다.

“뭐, 그냥 아카데미 학생들이 장난치다가 흘린 쪽지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시선을 돌렸다.

“이 쪽지를 가져온 자가 누구지.”

어리숙한 얼굴의 소년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 저입니다! 교주님!”

“앞으로 사소한 단서라도 놓치지 말고 전부 다 내게 가져오라고 전해라.”

“아, 알겠습니다!”

이든의 말대로 그저 누군가 장난치기 위해 만든 쪽지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내 감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이런 타이밍에 이런 쪽지가 발견된다고?

허나 아무리 뜯어보아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 외에는 별 다른 게…….

잠깐.

쪽지 윗부분을 만져보니 아주 미세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진다.

나는 확신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이번에는 아랫부분을 만져봤다.

역시나 마나가 느껴진다.

나는 마기를 끓어 올렸다. 오른쪽 손아귀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자 내게 쪽지를 주웠던 교인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죄, 죄, 죄송합니다!!!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흑마술을 발동했다.

“포식귀(捕食鬼).”

마나를 잡아먹는 마물, 포식귀. 마법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흑마술이었다.

검은 연기가 뭉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손가락 크기 정도의 난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코를 킁킁거리던 난쟁이가 쪽지로 향했다. 조그마한 입을 쫙 벌리자, 톱날처럼 뾰족한 이빨들이 튀어나왔다.

꿀꺽.

제 역할을 마친 난쟁이는 흡족한 얼굴로 배를 두드리며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담겨 있던 마나가 사라지자, 쪽지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서 푸른 문양이 나타났다.

나는 쪽지를 반으로 접었다. 그러자 푸른 문양이 합쳐지면서 초승달 형태가 되었다.

‘푸른달!’

옆에 있던 해리가 눈을 빛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오! 쪽지에 마나를 담아 문양을 가리고 있던 것입니까! 마편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입니다. 분명 제가 만졌을 때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역시 교주님이십니다! 이 문양은 분명… 푸른달! 푸른달이 아닙니까! 뒷세계 최고의 살수 집단의 문양이 어째서 이 편지에!”

나는 쪽지를 품에 넣은 뒤, 이든에게 말했다.

“이든. 지금 당장 아카데미로 돌아가겠다.”

“그러십니까. 저는 아직 볼일이 있어서 마무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장 자리를 옮겼다. 뒤쪽에서 해리가 ‘교주님! 조금만 더 보여주십시오!’라고 소리쳤지만 과감하게 무시했다.

안드로말리우스의 석상 앞에 선 나는 공간전이(空間轉移) 마법진을 발동하기 전에 로만을 소환했다.

“로만. 이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겠나?”

쪽지를 본 로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건 푸른달에서 사용하는 암호군요.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교인 중 한 명이 아카데미에서 발견했다고 하더군. 무슨 의미가 담겨있지?”

로만이 쪽지를 읽기 시작했다.

“A-구역 단서 없음. 물건은 D ~ S 구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 원활한 임무 수행을 위해 추가 지원 요청.”

흐릿했던 퍼즐 조각이 점차 맞춰지고 있었다.

흡족한 미소를 지은 나는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 * *

아카데미 구석에 위치한 연무장.

땀에 젖은 소녀가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곳곳에 마법의 흔적이 가득한 것을 보니 수련을 하고 있는 중인 듯 했다.

본래 뛰어난 재능을 지닌 그녀는 수련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수련의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는 인간이었다.

남들이 밤을 세워가며 마법을 연구할 때 그녀는 보란 듯이 마법을 사용했다.

책을 한 번 읽는 것만으로 내용을 암기했고, 수업을 한 번 듣는 것만으로 개념을 이해했다.

그녀의 눈은 현상을 꿰뚫었다. 이해하려 들지 않아도 이해가 됐다.

신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그녀 본인 또한 자신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를 알았다.

비록 린 메이지라는 거목에 가려져 가문 내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샬럿은 그녀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에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허나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언니가 자신보다 돋보이는 것에 만족했다.

어차피 후처의 자식인 본인은 가문을 이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럴 마음조차 없었다.

“아직 멀었어…….”

허나 이곳에 온 이후로 그녀는 바뀌었다.

요한이 보여준 마법은 그녀가 얼마나 작은 세계에 갇혀있었는지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고, 실프와의 대련은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자일 지그하르트는…….

이상했다.

타고난 원천속성은 형편없고, 가진 마력도 현저히 적다.

마법사로서는 뭘 해도 대성할 수 없는 인간이다. 노력으로 되는 영역이 아니라 생각했다. 사용하는 마법도 고작 강화마법 하나가 끝이다.

나머지 마법은 마법이라 부르기에도 처참한 수준.

강화마법을 극한으로 단련한다고 해도, 결국 남의 물건이나 강화해주면서 살아가는 강화술사의 삶이 끝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전설 속 지그하르트 가문? 웃기지도 않는다. 뜬구름 잡기를 좋아하는 천민들이 만들어낸 허풍일 뿐.

그런 허황된 이야기를 믿을 만큼 자신은 낭만적이지가 않다.

그런데.

그는 그런 그녀의 선입견을 모조리 부수기라도 하듯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여김 없이 발휘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는 강했다.

육체도, 정신력도 자신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이블(evil).

어린 시절, 샬럿은 이미 한 번 그 재앙을 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기억이 끊겨 흐릿했지만 딱 한 가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시체로 이루어진 강과 그 위에 서서 미소를 짓는 마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광경만큼은 도저히 잊혀 지지가 않았다.

뇌리에 각인 된 공포.

그러나 자일 지그하르트는 그 마귀를 목전에 두고도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악착같이 싸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런 괴물을 보면 무서운 게 당연하잖아….’

그 모습을 보며 지그하르트 가문이 왜 영웅이라고 불렸는지 깨닫게 되었다.

전설 속 이야기가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정체가 뭐야.”

연무장을 향해 누군가 걸어왔다.

“……샬럿?”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 자수정을 떠올리게 하는 보랏빛 눈동자. 목소리의 주인은 자일 지그하르트였다.

“자일 지그하르트?”

“여기서 뭐해?”

샬럿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보면 몰라? 수련하고 있잖아.”

그녀의 이런 태도는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도 남에게 틱틱 거리는 것이 큰 단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미 버릇이 돼버린 나머지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특히 이 남자한테는 더더욱 그랬다.

아무리 용을 써도 그녀의 입은 제멋대로 말을 내뱉었다.

이때의 그녀는 이것이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에게는 제대로 된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어찌됐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결국 자일 지그하르트 덕분이었으니까.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사실은 똑바로 인지하고 있었다.

자일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당황한 샬럿이 소리쳤다.

“왜 머, 멋대로 옆에 앉는 거야!”

자일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왜? 자리 맡아놨냐?”

샬럿이 고개를 휙 돌렸다.

“…….”

“생각보다 열심히 네. 실프와의 대결에서 진 게 많이 분했나봐?”

“남이사 수련을 하든 말든 신경 끄시지.”

“너무 조급해 하지 마. 네가 지닌 재능은 이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니까. 지금처럼 노력만 한다면 너는 틀림없이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야. 어쩌면 대마도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자일의 칭찬에 살렷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에는 당황, 그 다음에는 기쁨, 마지막은 의심.

“…네가 뭔데 내 재능에 대해서 논해. 그리고 대마도사(大魔道士)? 그게 누구 집 개 이름인줄 알아?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하는 건데?”

“있어. 그런 게. 그러니까 지금처럼 틱틱거리지 말고 주변 사람들한테 잘해. 특히 프레이한테.”

뜨끔한 샬럿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 네가 말 안 해도 잘 할 거거든!”

정적이 흘렀다.

“샬럿.”

“말해.”

“혹시 하르만 백작 가문에 대해서 알고 있어?”

“그 음침한 놈들? 왜?”

하르만 백작 가문이 뒷세계에서 암살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귀족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냥 좀 궁금해서.”

“뭐, 네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엮이지 않는 걸 추천할게. 차남인 륀달 하르만은 그렇다 쳐도, 장남 기레스 하르만은 완전 쓰레기거든. 7서클 기사면 뭐해? 인성이 덜 됐는데. 그런 놈이 차기 가주라니…. 쯧. 현 가주인 게놈 하르만이 쇠약해졌다고 하니 아마 머지않아 가주 교체가 이루어질 거야.”

‘륀달 하르만이라…….’

자일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륀달 하르만이라는 사람은 어떤데?”

“뭐. 그냥 평범해. 검술도 마법도 평범. 외모도 인성도 평범. 장남인 게르스 하르만이 워낙 압도적이라 가주 경쟁에서는 완전히 밀렸지. 정통성을 따져도…….”

갑자기 말을 멈추는 샬럿.

“쨌든 그래. 근데 그건 왜 물어보는데?”

“그냥 궁금했어.”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샬럿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지금까지 네가 질문했으니까 이제는 내 차례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해줄게.”

머뭇거리던 샬럿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입학시험 때 있잖아. 그… 이블을 만났을 때. 무섭지 않았어?”

자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무서웠지. 엄청.”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거야? 죽는 게 두렵지 않은 거야? 아니면 스스로가 지닌 힘을….”

“살아야 되니까.”

“…살아야 된다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냥 죽기 싫어서 발버둥 쳤던 거 뿐 이야. 나도 똑같아. 똑같이 무섭고, 두렵고,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어. 그런데 별 방법이 없잖아? 지금 당장 이게 허상인지 실재인지 구분도 할 수 없고, 막말로 교수들이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별 거 없어. 그게 전부야.”

그녀는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멍한 얼굴로 자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발버둥…….”

이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자일에게는 있지만 그녀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인지.

삶을 대하는 태도.

살고자 하는 의지.

간절함.

샬럿의 눈동자에 비친 그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강렬하게.

그 빛을 갖고 싶다.

나 또한 저렇게 되고 싶다.

그런 열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귓가에 울리는 이 고동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사실은 그날……. 도중에 정신을 차렸어.”

“뭐 그럴 수 있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애초에 시험이 문제였으니까.”

“봤어.”

“네가 가세한다고 해도 딱히 바뀌는….”

“봤다고.”

“…….”

“한 손에 머리를 쥐고 있는 기사, 듀라한. 그거 네가 불러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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