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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56화 (56/180)

56화

상황 파악을 끝낸 기레스 하르만이 도망치려 하자,

나는 옆에 있던 악시온을 들어 그에게 던졌다.

자칫 잘못해서 죽어버리면 곤란했기에 일부러 다리를 노렸다. 로만과 데이지를 위해서라도 그는 어떻게든 살려놔야 했다.

푸슉!

섬뜩한 예기를 머금고 있는 악시온의 창날이 그의 오른쪽 발목을 깔끔하게 도려냈다.

중심을 잃은 기레스 하르만이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끄으으아아악!!! 감히!! 감히!! 내 다리를!!!”

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사라진 뢴달이 그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과정에서 반항하던 기레스의 왼쪽 손목이 잘려 나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한쪽 발목이 잘린 채로 반항을 한다고 한들 뢴달의 상대가 될 리가 만무했다.

둘의 무위 자체는 비슷했으나 경험은 푸른달의 수장으로 활동한 뢴달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뢴달! 그 손 챙겨와.”

고개를 끄덕인 그가 손목을 챙겼다. 혹시 모를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발목도 챙겨야 할 거 같았다.

“아, 미안한데 발목도.”

뢴달이 다시 발목을 챙기려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좌측에서 비수가 날아왔다.

뢴달은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비수를 쳐냈고, 도리어 자신을 공격한 살수의 목을 그었다.

깔끔하게 그어진 선 위로 붉은색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림자인가.”

검은 복면을 뒤집어 쓴 살수들이 어느새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 광경을 본 기레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흐흐. 그럼 그렇지. 뢴달 이 버러지 같은 놈아. 네가 감히 나를 배신해? 왜? 흑마술사의 손이라도 잡으면 네놈 따위가 가주라도 될 수 있을 것 같더냐? 천한 놈. 망상은 끝이다. 로즈! 이 새끼들 다 죽여!”

로즈라고 불린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의 기억에서 본 적 있던 여자다.

“…….”

그림자들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뢴달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무리하게 공격하기보다는 틈을 노려 하나 씩 제거하는 것이 나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영감님. 그동안 쉬셨으니까 이제 실력 발휘 좀 하시죠?”

말은 그렇게 해도 라다무스는 이미 몸을 풀고 있었다.

“허허. 늙은이를 너무 부려먹으려는 것 아니오?”

“영감님도 몸이 근질근질 하시잖아요?”

“이래서 눈치 빠른 놈들은…. 쯧.”

“하하! 부탁 좀 하겠습니다. 저는 몸이 이래서…….”

“알겠네. 원래 잡졸은 우리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맡는 법이지.”

한때 투귀(鬪鬼)라고 불리던 사내가 그런 말을 하니 새삼 기분이 묘했다. 전신에 마나를 두른 라다무스가 맹렬한 기세로 돌진했다.

그림자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뢴달과 라다무스 정도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컨디션일 때의 얘기.

뢴달은 나와의 전투로 인해 체력을 많이 소모한 상태였고, 라다무스는 오랜 시간 감옥에 갇힌 턱에 기력이 많이 쇠한 상태였다.

‘하아……. 마기는 더 이상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군.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푸른달의 살수들까지 불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나는 어떻게든 마기를 쥐어짜내 겨우 로만을 소환했다.

울컥. 목구멍에서부터 검붉은 덩어리 같은 것이 올라왔다.

거기에 마기 침식에 영향인지 환청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바닥에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이내 로만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인. 결국 승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그래. 다행이지. 하마터면 또 사지가 절단 날 뻔 했으니… 근데 보다시피 지금 내가 당장 쓰러지기 직전이거든?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쟤들 좀 도와줘. 대충 보니까 가주 직속 호위대 같아.”

로만의 시선이 격렬한 전투 중인 뢴달 일행 쪽으로 향했다.

“……그림자들이군요. 알겠습니다.”

로만이 사라지는 것을 본 나는 곧장 드러누웠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몸을 가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알아서 하겠지…….’

바닥에 머리를 댔음에도 자꾸 환청이 들려왔다.

-이번엔 운이 좋았다는 거 알고 있지?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어차피 넌 죽어! 왜냐고? 넌 패배자니까. 현실에서도 그렇고, 이곳에서도 그렇고.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잖아? 안 그래?

-#$^$&$%&$%&*^@@$#@#[email protected]#%#@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살려주세요.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살려주세요. 죽여주세요. 죽여주세요. 죽여주세요? 죽어주세요. 죽어주세요. 죽으세요. 죽으세요. 죽어. 죽어. 죽어.

시끄럽다. 지긋지긋한 목소리들을 듣고 있자니 어쩌면 이것은 가슴 속 깊숙이 숨겨두었던 죄악감과 열등감이 속삭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현병에 걸리면 이런 느낌이려나…. 이딴 소리를 매일 들으니 사람이 미치지.’

조현병은 말 그대로 병이기 때문에 약물치료라도 가능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이건 병 따위가 아니었다.

몸 안에 마기가 만들어낸, 어쩌면 나의 본심.

가장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두었던 어둠.

‘시온 지그하르트……. 당신은 이걸 대체 어떻게 견뎌낸 거지……?’

아마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몸 안의 마나를 천천히 순환시켰다.

혈액에 스며든 마나가 혈관을 타고 움직이자 마음이 차분해지며, 환청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본래 마나와 마기는 상반된 성질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오히려 마나가 마기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충 5분 정도가 지났을까.

병장기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상반신을 일으켜 앞을 바라보자, 전신에 피칠갑을 한 뢴달과 로만이 기레스 하르만과 로즈라고 불리던 여인을 붙잡고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로즈는 일부러 살려뒀나 보군.’

뢴달이 하나 남은 기레스의 팔목을 뒤로 꺾은 채 그를 바닥에 짓눌렀다.

기레스는 이를 바득 갈며 고래를 들었다.

“뢴달! 이 개새끼가! 이거 안 놔? 네가 진짜 미친 것이냐?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호위가 모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인지…. 그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어. 무사할 거 같은데?”

힘겹게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뺨따구를 후려갈겼다.

짝!

그의 고개가 격하게 돌아갔다.

“내가 감히 누군지 알고 이딴 짓을 벌이….”

찰싹!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번엔 반대쪽 뺨.

찰싹!

“순순히 이걸 놓으면 목숨만은….”

찰싹! 찰싹! 찰싹!

그의 고개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힘없이 휘날렸다. 붉게 부풀어 오른 그의 뺨을 보며 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이 개새…….”

정신을 못 차렸구만.

어떻게 해야 좋을까.

턱을 부술까? 아니면 혀를 뽑아 버릴까? 아니지. 혀를 뽑으면 말을 할 수가 없잖아?

잠시 고민하던 손을 뻗어 그의 쇄골을 짓눌렀다. 힘을 주자,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으드득.

“끄으으으아아악!!”

꽤나 고통스러운지 침까지 질질 흘리며 악에 받힌 비명을 질러댔다.

웃기는 군.

그가 지금까지 벌어온 일들에 비하면 이까짓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말로오오온!! 말로오오온!! 당장 이 새끼들을 죽여!! 나를 구하란 말이야!!!”

동료가 있던 것인지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공허한 메아리만이 방안에 나지막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저택 전체를 뒤덮고 있던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저놈이 부른 동료는 저택을 봉쇄시킨 마법사인 듯 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품에 있던 쪽지를 보여주며 물었다.

“네놈들에게 이 의뢰를 맡긴 자가 누구지?”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쯤 되면 정신을 차릴 법도 했건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독기가 서려있었다.

“…흐흐. 내가 그걸 말해줄 거 같은가?”

나는 그의 손가락 하나를 꺾었다.

“네 번 남았다.”

“끄으으아아악!!!”

다시 한 번 물었다.

“의뢰를 맡긴 자가 누구냐.”

“모, 몰라. 나는 그냥 외뢰만 받은 게 전….”

빠득!

“이 개새끼야아아아!!!!!”

기레스가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뢴달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기에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것 외엔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3번. 이 안에 대답하지 않으면 남은 손목도 잘라주지.”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그의 눈에서 피가 섞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모른다고! 진짜야. 그저 아는 귀족을 통해서 소개 받았을 뿐이야. 자신들이 누군지, 왜 그걸 찾는 건지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았어!”

내가 손을 들자 그가 움찔했다.

“너희 하르만 가문은 신분이 보장된 귀족 외에는 절대 의뢰를 받지 않을 텐데?”

“…마, 맞아. 그치만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었어. 그만한 돈을 준다는 데 어떻게 거절 할 수가 있겠어!”

“거대한 대검을 사용하는 외팔의 검사에 대해서 알고 있나?”

“……의뢰주가 붙여준 놈이야. 그 외팔 자식이 뭐하는 놈인지는 나도 정확히 몰라. 그들이 의뢰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생길 때를 대비해 파견 왔다고 전해들은 게 전부야. 그 이상은 진짜 몰라!”

“의뢰내용은?”

“……아, 아카데미 내에 숨겨져 있는 아티팩트를 찾아달라고 했어.”

72교단에게 부탁했던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귀족의 소개. 막대한 양의 돈. 마기를 다루는 반인반마 검사. 아카데미. 아티팩트.

이 키워드들을 합치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흑마술사들의 연합. 게티아(goetia).'

대륙 전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더니… 어느새 그들은 제국 내부에도 가지처럼 뻗어져 있었다.

“그래서 의뢰는 어떻게 됐지?”

기레스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정보를 넘겨주면 나를 살려줄 것인가?”

“물론이지.”

“……저, 정말로?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믿지 않을 거면 네놈이 무얼 할 수 있지?”

기레스가 입을 다물었다.

“…….”

그를 바라보던 내가 손에 미약한 마기를 피워냈다.

“그래. 네놈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정보를 털어놓겠지. 나는 마신을 숭배하는 흑마술사다. 내가 모시는 마신 아스모데우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네가 올바른 정보를 털어놓는 다 약속하면 내 손으로 너를 죽이지 않겠다. 흑마술사에게 마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겠지?”

기레스가 희망이 깃든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신의 이름을 걸었으니 진짜겠지. 믿도록 하겠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로만의 몸이 움찔했다. 아마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 같았다.

맹세는 진짜였다.

나는 진심으로 기레스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물론.

―내 손으로는 말이지.

로만이나 데이지, 혹은 그 외에 인물이 기레스를 죽이는 것은 내 관할이 아니니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이렇게 쉽게 그를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지금까지 저질러 온 만행들에 대한 대가도 치루지 않고서 죽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호사(好事)였다.

그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고.

“……아카데미 내부에 거대한 마력으로 가로막힌 장소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런 곳이 한두 개는 아니겠지만 우선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위치는?”

“과거 아카데미 재학생들이 사용하던 낡은 건물 근처에 숲이 있다고 들었다. 그 안에서 강대한 마력이 느껴진다고 하더군.”

낡은 건물….

숲…….

문득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팻말.

[출입금지.]

이 모든 게 가리키는 곳은.

'설마, 기숙사 옆에 있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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