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바로 옆에 단서를 두고도 헤매고 있었다.
“그 정보 확실한 건가?”
기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 수하들이 직접 확인한 것이다. 거대한 마력에 가로 막혀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 했지만 그만한 마력이 깃든 곳이니 무엇이든 있을 테지.”
그게 꼭 레메게톤이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아무런 단서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확인해 봐야 했다.
“그 외에는?”
“아카데미 내부를 수색하는 것이 어디 집나간 똥개를 찾는 건 줄 아느냐? 이 정도의 수확을 얻은 것도 결국 나의 부하들이 유능한 것이지. 아무나 할 수….”
이 새끼. 말본새 봐라?
빠득!
나는 다시 그의 손가락을 꺾었다.
“끄으아아아악!!! 이 개자식아!!! 정보는 다 털어놓았지 않느냐. 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죽이지 않는댔지. 손가락을 꺾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았잖아?”
마지막 남은 두 개의 손가락마저 모조리 꺾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로만에게 말했다.
“기절시켜.”
발광을 하는 기레스에게 다가간 로만이 그의 뒷목을 내려쳤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목뼈가 부러지는 게 아닐까 하고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축 늘어진 기레스를 로만이 어깨에 멨다.
“교단으로 가지.”
“알겠습니다.”
뢴달과 라다무스는 내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아보였지만 굳이 그들의 질문을 받아줄 마음은 없었다.
“영감님.”
“왜 부르는가?”
“말하지 않으셔도 아시겠지만 오늘 이곳에서 있던 일은 전부 잊는 겁니다?”
라다무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힘들게 얻은 목숨. 또 다시 져버리고 싶지 않다네. 그럴 만한 용기도 없고. 거기다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시게나. 두 번 구해주었으니, 나 또한 그대의 부탁을 두 번 들어주겠네.”
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뢴달.”
“……네!”
갑자기 존댓말을 쓰는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까 보여주었던 그 기세는 다 어디 갔지? 우리는 협력관계 아닌가. 내게 말을 높일 필요는 없다. 본래 하던대로 해라. 그 편이 나도 편하고.”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대답하는 뢴달 하르만.
“…아, 알겠다.”
“약속했던 대로 가주는 되살려 놓겠다. 취임식을 하게 되면 나를 불러라.”
“…그, 그러지.”
“이 놈은 우리가 가져가도 되겠지? 볼 일이 있어서.”
“상관없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한 마디를 내뱉은 뒤, 외팔검사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뢴달 하르만 백작.”
이등분이 된 시체.
마치 자를 대고 자른 것처럼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근육의 단면과 뼈로 인해 당사자인 나조차 얼굴을 찌푸렸다.
그걸 보니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었던 때의 감각이 떠올렸다.
괜히 배 주변을 어루만지던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 당장 그를 되살려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나중을 위해서 영기(靈氣)를 보존하기로 했다.
그를 통해 캐내야 할 정보도 많았고, 또 생명력을 지불하더라도 저만한 인재를 얻을 수 있다면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아무리 용을 써 봐도 영기가 뭉쳐지지가 않았다. 모았다 싶었으면 흩어지고, 모았다 싶으면 또 다시 흩어졌다.
“주인…!”
이제야 좀 뭉쳐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다른 형태로 변모하는 게 아닌가.
딱히 위협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잠자코 지켜보자 영기는 어느새 외팔 검사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이런 경우도 있나?”
나는 그를 빤히 보았다. 영혼은 내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은 채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다만 어떤 억지력이 적용된 것인지 힘을 줘 봐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나는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자.
[ארמנד גיטי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언어를 내뱉으며 영혼이 소멸했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소멸…했어?”
마치 내 힘에 거역하기라도 하는 듯 본인의 의지로 소멸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뒤늦게 아쉬움이 밀려왔다.
연합에 관련된 정보와 전력을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영문도 모를 이유로 두 마리 토끼를 놓치게 된 것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나. 이미 기회는 떠나버린 것을.
추측 상 정보가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연합이라는 놈들이 수작을 부린 것 같았다.
한창 아쉬워하고 있는 내게로 라다무스가 다가왔다.
“은인이여. 이쯤에서 나는 먼저 가보겠네. 지금쯤 제자 녀석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터라 한시가 급하거든.”
“아, 예.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고맙네. 내게 부탁할 일이 있거든 서쪽 숲으로 찾아와 내 이름을 부르면 된다네. 그럼. 무운을 빌지.”
라다무스가 방안을 빠져나갔다.
볼일이 끝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자리를 뜨기 위해 한 걸음 발을 내딛던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잠깐.
“뢴달.”
“왜 그러지?”
“우리 협력관계 맞지?”
뢴달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냐는 듯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 그렇지.”
“이번에 내가 개고생을 하면서 네 목숨 구해준 것도 알고 있지?”
“…그, 그렇다. 고맙다.”
사실 애초에 그를 위기에 몰아넣은 장본인이 나였지만…. 그건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나 회복약 들이랑 영약 좀 챙겨주라.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지 몸이 너무 허해. 설마 없다고 하는 건 아니지? 그래도 암살명가라고 불리던 하르만 백작가인데 고작 영약이 없겠어? 그치?”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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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백작 가문답게 저택의 창고에는 수많은 영약들과 값비싼 회복약들이 존재했다.
대부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귀한 것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내 시선을 끄는 것은 신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엘릭서’와 ‘만년설삼’, 그리고 ‘화룡의 심장을 짜낸 핏물’이었다.
감히 돈으로는 환산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영약들.
오랜 시간 수많은 귀족들에게 다양한 암살 의뢰를 받았을 테니 저런 것들이 쌓여있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나는 그것들을 모조리 챙긴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단으로 향했다.
내 등을 바라보던 뢴달의 표정이 어땠는지 구태여 말하지는 않겠다.
* * *
72교단 본산에 위치한 교인들의 거주지.
가장 구석에 위치한 낡은 집.
데이지라는 이름의 여인이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전부인 세상. 유일한 빛이라고는 구름에 가려 미약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달빛 뿐 이었다.
매일 이 시간,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계처럼.
똑같은 시간에.
매일 같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에 가려져 형제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꽃들을.
“…….”
이유?
그런 건 없었다. 그저 시선이 향했기에 바라봤을 뿐. 비어있는 눈동자는 시리도록 공허했다.
아니.
공허했었다.
“가족.”
최근 그녀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단어가 떠오른다.
살아야 한다.
그리고 가족.
때때로 알 수 없는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이것이 나의 기억일까?
내게도 가족이 있었을까?
가족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를 것만 같았으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다.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으나, 그 단어를 곱씹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저릿저릿하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무엇이 이토록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일까.
‘알고 싶다.’
처음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호기심이 생겼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교주님?”
“늦은 시간에 미안해. 데이지.”
“괜찮습니다. 허나 이 시간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입을 다문 자일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하다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뜬금없는 말이지만 가족을 만나고 싶지 않아?”
가족.
최근 그녀가 가장 골머리 앓고 있던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나고 싶습니다.”
기계처럼 딱딱한 어조.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는 작은 불씨가 깃들어져 있었다. 비록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아주 위태롭고, 조그마했으나 그 빛은 충분히 사랑스러웠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데이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는 교주님이 제 방으로 들어오셔야 하는 겁니까?”
날카로운 질문에 자일을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온갖 대답들을 생각해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선택한 것은 무작정 밀어붙이기.
“……응. 지금은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일단 내 말에 따라줘.”
그녀가 문을 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들어오시죠. 저 혼자 사는 곳이라 많이 누추합니다. 이해해주시길.”
자일이 방을 둘러보았다. 식탁에 있는 식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뭐하고 있었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창밖? 왜?”
“그냥…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그렇구나.”
……정적이 흘렀다.
남매 상봉에 당사자도 아닌 주제에 정작 본인이 가장 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만은 자신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해도, 사역마로서 어쩔 수 없이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 해도 전혀 중요치 않았다.
자일이 가장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으니 자일 또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려주어야 했다.
그것이 둘의 계약이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자일은 이미 데이지의 기억까지 전부 본 상태였다.
모든 사정을 알고 있기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데이지.”
“네.”
“지금부터 너의 가족을 만나게 해줄 거야.”
“알겠습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이내 로만을 불러냈다. 어둠 속에서 로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또한 많이 긴장한 것인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로만을 한 번 바라본 데이지가 나에게 물었다.
“……이분이 제 가족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녀의 말에 당황한 내가 다급히 소리쳤다.
“데이지. 기억해봐. 저 사람이 네 친오빠야. 모르겠어?”
데이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데이지……. 다시 한 번….”
로만이 내 말을 끊으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던 미소였다.
“괜찮습니다. 주인. 그래도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게 전부 주인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데이지가 무표정한 얼굴로 로만을 응시했다.
“…….”
천천히 손을 올린 로만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많이 컸구나. 데이지. 약속을 잘 지켜주었어.”
“저희가 약속을 했었나요?”
“그래. 네가 말도 하지 못하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한 가지 약속을 했었단다.”
“어떤 약속을 했었죠?”
로만이 추억에 잠긴 듯 씁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기로 그렇게 약속을 했었지. 너는 이렇게… 그 약속을 잘 지켜주었고.”
“…….”
“…데이지?”
그 말을 들은 데이지가 고장 난 인형처럼 중얼거렸다.
“살‥아‥야‥한‥다…?”
-살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데이지.
-데이지……. 오늘부터 이게 너의 이름이야.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흐릿한 형상.
매일 밤 잠들기 전 자신에게 속삭이던 남자.
차갑기만 한 이 세상에서 내게 온기를 알려주었던 존재.
…나의 가족.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나의 오빠.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흐릿했던 형상이 눈앞에 사내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데이지는 자신이 본 이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천천히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비비고.
또 비비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오빠?”
언제나와 같이 걱정과 다정함이 공존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기억 속 사내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