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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58화 (58/180)

58화

로만이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데이지…. 내가 기억나니?”

데이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데이지는 무언가를 더 떠올리려고 하는 것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만큼 기억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억지로 떠오르려고 한 탓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자일 지그하르트의 흑마술로 인해 지금껏 봉인해두었던 기억의 자물쇠를 강제로 열기는 했으나 모든 기억을 되찾으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억지로 떠올리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뇌의 영구적인 손상을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로만이 팔을 뻗어 그녀를 감쌌다. 천천히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데이지. 억지로 떠올리려고 할 필요 없어. 천천히 자연스럽게 하나 둘 씩 떠오르게 될 거야. 지금은 이걸로 충분해. 나를 기억해주어서 고맙다….”

비록 이미 죽은 몸이기에 예전처럼 온기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분명 언데드인 그의 몸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황한 로만이 자일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대답 대신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데이지는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오빠의 온기를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따뜻해.”

습하고, 차가운 하수도 아래에서.

천천히, 부드럽게 자신의 등을 어루만져주던 그 손길.

세상에 소외된 자들이 모인 그곳에서,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자신이 가장 사랑 받고 있음을 느꼈다.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자일은 다리에 힘이 빠져 급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번이 진짜, 진짜 마지막이다.’

그렇게 마기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방금 그 다짐을 또 어기게 돼버렸다.

허나 이건 불가항력이다. 이 광경을 보고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힘으로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어떻게든 해주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고작 이 정도로 쓰러지려고 하다니…. 확실히 무리하긴 했나 보군.’

흑마술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양의 마기를 사용한 것만으로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하르만 백작가에서 챙겨온 영약들이 있었으니 이번 일이 끝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쉴 생각이다.

‘그 두 개를 온전히 흡수할 수만 있다면 이까짓 몸 상태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원래는 신체도 신체지만 마기침식의 영향 때문에라도 꽤 오랜 시간 힘을 쓰지 않고 요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만년설삼’과 ‘화룡의 심장을 짜낸 핏물’, 억만금을 줘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보물들인 만큼 그 효과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뛰어난 효과만큼이나 위험성이 큰 영약들이었다.

각자 지닌 기운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다.

만년설삼 같은 경우에는 한기 저항이 없는 일반인이 복용했다가는 혈액부터 심장까지 그대로 얼어버려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만큼 뛰어난 한기를 머금고 있었기에 일부는 영약이 아닌, 독약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화룡의 심장을 짜낸 핏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전신이 불과 다름없는 화룡은 마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심장에서 어마어마한 화기를 뿜어낸다.

심장 자체가 쉴 새 없이 불꽃을 생산해내는 불의 정수인 셈이다.

그의 화기가 깃든 혈액은 용암과도 같다. 그런 심장을 쥐어짜내 만든 핏물은 쇠조차 녹여버릴 정도의 열기를 자랑한다.

평범한 인간이 뭣도 모르고 마셨다가는 입안 째로, 나아가 식도와 위조차도 녹여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복용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저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신의 눈물이라고 부르는 ‘엘릭서’, 과장을 좀 보태 죽은 사람도 되살린다는 엘릭서의 회복력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한 도전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그런 괴물 같은 놈들을 앞으로는 몇 번이고 만나게 되겠지.’

이번에야 여러 기연들이 겹치고, 운이 좋아 헤쳐 나갈 수 있었지만, 다음에 또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게임 속 캐릭터처럼 회차마다 세이브를 통해, 죽으면 다시 불러내서 도전하고 죽고를 반복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허나 내 정신은 그렇지 않다.

직접 경험해보니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었다.

소설 속 회귀자들이나, 게임 속 캐릭터들처럼 죽음을 반복하고 다 회차를 버텨낼 만큼 내 정신력은 강하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두렵다.

그만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굴레 속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강해져야만 한다.

또 다시 그런 끔찍한 죽음을 겪지 않기 위해서.

조금 강해졌다고 안주하면 안 된다.

매번 이렇게 다짐을 해도, 또 금세 마음이 해이해지는 자신이었지만 그걸 알기에 이렇게라도 스스로 끊임없이 되뇌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을 때 로만과 데이지가 자일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90도로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주인.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당황한 자일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이럴 거까지야. 괜찮아. 나는 괜찮으니까 고개 들어.”

고개를 든 데이지가 자일을 빤히 바라봤다. 어쩐지 그녀의 눈동자는 전보다 더욱 생기가 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억은 전부 돌아온 거야?”

데이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 대신 로만이 대답을 해주었다.

“저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 대부분 떠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일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쩌면 그게 좋을 지도 모르겠네.”

데이지가 뜬금없이 질문을 해왔다.

“교주님. 오빠는 이미 죽은 건가요?”

“…….”

이번에 당황한 것은 자일 뿐 만이 아니었다. 로만 또한 난처한 얼굴로 급하게 수습하려 했으나 자일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데이지.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내가 푸른달로 활동하던 시절 우연히….”

“맞아.”

“주인…….”

데이지가 자일을 빤히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동정도, 악의도, 적의도 없이 그저 투명할 뿐이었다.

“교주님이 죽이신 건가요?”

“그래. 내가 그를 죽였고, 이렇게 사역마의 형태로 만들었어.”

“……그렇군요.”

뻔한 질문이지만 자일은 이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데이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미소 짓는 것을 본 것은.

“원망……. 두 분 사이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저보다 오빠가 교주님에게 더욱 감사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교주님을 원망할 이유가 없지요. 제가 아는 오라버니는 자신을 죽이고, 마물로 만든 이에게 감사를 표할 만큼 물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의 미소가 어쩐지 낮이 익다 했는데 그 정체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확실히 남매가 맞긴 한가 보군.”

감동적인 남매상봉은 끝이었다. 지금부터는 길고 긴 복수의 매듭을 마무리 지을 차례였다.

“로만. 어떻게 할 거지? 바로 갈 건가?”

로만은 대답 대신 데이지를 바라봤다.

자일이 잠시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로만은 간략하게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을 끝마친 상태였다.

그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가겠습니다.”

끄덕.

자리에서 일어난 자일은 남매와 함께 집을 빠져 나와 기레스 하르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자일과 로만이 교단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행한 일은 바로 기레스 하르만을 자그마한 독방에 쳐 넣은 것이었다.

교단으로 돌아오기 전 자일이 교인들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만들어진 곳으로, 오로지 기레스 하르만 한 명만을 위하여 설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장이 낮아 일어설 수도 없었고, 다리를 온전히 필수도 없을 만큼 좁았다.

사방은 벽과 쇠창살로 막혀 있다.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을 수용실에 가둬 두었으니 그에게도 가장 비슷한 환경을 선물해주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의 취향을 듬뿍 고려해서 만든 것이니 이왕이면 마음에 들었으면 했다.

그의 전신에는 구속구를 채워놓았다.

마류석과 같은 귀중한 광물을 고작 저 딴 놈 하나에게 쓰는 것은 사치였으므로, 그 대신 로만이 그의 근맥을 끊어놓았다.

바퀴벌레 같은 재생력이라도 지니고 있지 않는 한 마나를 쓰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좁디좁은 지하통로를 지나쳐, 작은 문을 열자 저 멀리서부터 괴로운 신음소리와 끈적한 살기가 깃든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으으윽……. 뢴달 이 빌어먹을 놈이 감히 형님을 배신해……? 내가 네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하아… 하아… 말론. 네 녀석도 내가 기억하고 잊으마. 이래서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신뢰를 주면 안 돼. 그리고 그 흑마술사…….”

절그럭. 절그럭.

“……이 개새끼.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내가 여기서 나가면 너네 다 죽여 버릴 거야.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돼지우리에 던져줄 테다. 절대… 가만 안둬. 절대 가만 안 둬어어!!!”

시끄러 죽겠군.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린 자일 지그하르트가 그가 갇혀있는 독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기레스 하르만. 어때, 새로운 집은 좀 아늑한가? 네 취향을 고려해서 신경 좀 썼으니 최대한 만족했으면 좋겠군.”

그를 발견한 기레스가 허리도 다 피지 못한 채 쇠창살 사이로 얼굴을 구겨 넣으며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흑마술사인 네놈이 스스로 맹약을 거부할 셈이냐?”

자일이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맹약? 어떤 맹약? 아…… 내 손으로 너를 죽이지 않겠다고 했던 거? 어우 고맙다, 야. 깜빡 잊고 있었는데 너 덕분에 생각이 났어.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 그치?”

“그래! 이 등신아! 내가 이대로 죽기라도 하면은 결국 네놈도 죽는 거다! 그니까 괜한 짓거리 하지 말고 나를 당장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해방시키란 말이다!”

“근데 이걸 어쩌나. 내가 모시는 마신님께서는 아~주 마음이 넓으셔서 말이지. 내가 내뱉은 말만 똑바로 지키면 아무 상관을 안 하시거든? 그러니까 내 손으로 직접 너를 죽이지만 않으면 아무런 탈이 없다. 이 말씀이지. 네가 거기서 굶어죽든, 혀를 깨물어 죽든, 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알아듣겠어?”

그 말을 듣던 기레스 하르만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거, 거짓말 하지마라. 무슨 그런 제멋대로인 신이 존재한…….”

그제야 기레스 하르만은 그가 모시는 신이 일반적인 신들이 아닌, ‘마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무효다, 무효!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나!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으니 어서 나를 꺼내줘! 돈이든, 여자든, 네가 원하는 모든 건 다 들어줄게! 그러니까 어서 나를…….”

“아니지.”

“뭐가 말이냐……?”

“사과의 대상이 잘못됐잖아. 사과는 내가 아니라…….”

뒤쪽에 있던 로만과 데이지가 쇠창살 앞으로 다가왔다. 데이지의 얼굴을 본 기레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쪽한테 해야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 돌아왔으니 정말 귀신을 봤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데, 데, 데이지?”

“오래간만입니다. 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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