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로만 남매와 헤어진 나는 저번에 머물렀던 거처로 향했다.
안 본 사이에 외형도 좀 바뀐 거 같고, 이것저것 늘어난 걸 보니 그래도 나름 교주랍시고 꽤 신경을 써준 티가 났다.
본래는 이쪽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곧장 아카데미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프레이가 있는 기숙사실에서 영약을 제조하고, 복용까지 하는 것은 무리일 듯 했다.
누굴 탓하랴.
뽑기 운이 없는 나 자신을 탓해야지.
사감인 벨라트레이에게 아무런 보고도 없이 아침을 빼먹었다는 이유로 꽤 굴려질 테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부터 축제기간이었기에 다음 날 있을 수업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하긴 당장 내 몸이 아프다는데 이것저것 따질 데가 아니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너덜너덜해진 정신과 몸뚱이를 최대한 빠르게 돌려놓는 것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나저나 기레스 하르만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군.’
흐릿하게 보이는 신기루 너머로 손을 뻗어 봐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절망.
그 고통은 오로지 겪어본 자만이 알 것이다.
“끔찍하지. 정말.”
차라리 확신이 없더라면, 희망조차 주지 않았더라면 하고 생각한 게 몇 번이었던가.
애매한 재능, 애매한 결과, 애매한 가능성, 그럼에도 흐릿하게 보이는 희망.
그로 인해 포기하지도, 절망하지도 못한 채 서서히 말라간다.
언젠간.
이뤄지겠지.
언젠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되뇌이며 끊임없이, 자신을 갉아먹는다.
희망 고문.
가장 절망스러운 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최후의 최후까지 버텼을 때 처음부터 희망 따위는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이것은 결국 나 자신에게 하는 말과 같다.
이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작은 희망을 품고서 하루를 살아간다.
…그 끝이 무엇이든 결국에는 직접 부딪쳐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니까.
어느 정도 일들이 정리되면 데이지의 향후 거취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했다.
로만이 내게 부탁한 것은 복수.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마신 교단의 장로로서 살아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복수보다도 이쪽이 가장 어려운 부탁이었다.
“평범한 삶……. 뭐가 좋으려나.”
평범. 행복.
이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문득 책상 위에 놓인 화병이 눈에 들어왔다.
“꽃이라…….”
화병을 보고 있자니 데이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꽃집을 하며 살아가는 것도 제법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녀 본인이 원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 됐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그녀를 지원할 생각이었다.
알량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로만과 내가 한 정당한 거래였으니 난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 뿐 이다.
선(善)과 악(惡).
자격과 행복을 논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하기에 내 정신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판단한 대로 언제나와 같이 묵묵히 행할 뿐이다.
앞으로 벌어질 숱한 고난 속에도 그 기준이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잡념을 떨쳐낸 뒤 책상 위에 영약들을 꺼냈다.
“엘릭서. 만년설삼. 화룡의 심장을 짜낸 핏물.”
재생. 극음. 극양. 제각기 다른 성질을 지닌 희대의 보물들.
막상 이것들을 하나로 합칠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됐다. 당연한 얘기였다. 애초에 저 영약들은 하나로 합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으니까.
명확한 제조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시도를 한 사람이 있다는 문헌을 본 적도 없다.
정보라고 할 만 한 게 아예 없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오로지 내 뇌피셜만으로 이러한 도전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극양의 성질을 지니고 있으니, 극음의 성질로 중화시키면 될 것이고, 그에 따른 부담은 엘릭서가 해결해주겠지 라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한 게 맞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출처가 어디냐고?
내가 지금까지 읽은 무협지다.
무협 소설 속에서 흔히 등장하는 구음절맥(九陰絶脈)), 구양절맥(九陽絶脈) 등 극양과 극음의 신체를 지닌 이들을 각각 상반되는 영약들로 치료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가. 그 덕에 엄청난 내공을 얻게 되고.
거기서 영감을 얻었다.
물론,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한기(寒氣) 혹은 양기(陽氣)로 인해 몸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설 속 주인공처럼 다이나믹한 효과는 얻지 못하더라도, 어떻게 잘 융화시킬 수만 있다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성장할 거라 확신했다.
‘운이 좋으면 원소 계열 속성의 눈을 뜰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정말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니까.
문제는 이걸 어떻게 합치냐는 것이다.
엘릭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만년설삼’과 ‘화룡의 심장을 짜낸 핏물’은 각각 특수한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에 보관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보관함은 영약이 지니고 있는 강대한 기운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딸랑 강화 속성 하나 밖에 지니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저것들을 합치는데 있어 상당히 애를 먹을 거라는 얘기였다. 강화 마법을 겹겹이 두른다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장시간 제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전에 화상과 동상을 견디지 못하고 내가 먼저 골로 갈 확률이 높았다.
애초에 그걸 버텨줄 플라스크조차 없었고.
생각해보니 영약만 들고 있을 뿐. 제조를 위한 준비물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차라리 그냥 마셔…?”
문득 맨드레이크를 복용했을 때가 떠올랐다.
“…….”
절레절레.
그래.
우선은 엘릭서를 먼저 한 모금 먹기로 했다.
황금빛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의 마개를 열었다.
뽕!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황금빛 액체가 출렁였다. ‘신의 눈물’이라는 거창한 이명답게 외관은 상당히 아름다웠으나 별로 먹고 싶은 형태는 아니었다.
“가볍게 한 모금만….”
꿀꺽.
향긋한 냄새가 코끝에 퍼지며 식도를 타고, 엘릭서가 스며들었다.
고작 한 모금만 마셨을 뿐인데, 몸을 짓누르고 있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거기에 더해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근육과 뼈의 통증들마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활력이 샘솟는다.
탁한 정신이 서서히 맑아짐을 느낀다.
앞선 전투로 인해 몸의 생겼던 상처들이 순식간에 아물어간다.
실로 놀라운 효과였다!
“과연 이게 엘릭서인가…? 이거라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직접 한 모금을 마셔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이 정도 회복력이라면 ‘만년설삼’의 냉기(冷氣)와 ‘화룡의 심장을 짜낸 핏물’의 화기(火氣)를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강화마법을 겹겹이 걸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만년설삼에 보관함을 열었다.
솨아아아!
이가 달달 떨릴 정도로 강렬한 한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장난 없군.”
말을 할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속전속결(速戰速決).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하나 없었다. 만년설삼을 맨손으로 쥔 나는 그대로 입안에 집어넣었다.
아그작. 아그작.
설삼을 씹을 때마다 새어나오는 차가운 즙.
마치 드라이아이스를 입안에 넣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얼마 씹지도 않았는데 점차 입안이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턱이 움직이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불안감이 급속도로 커지자 급하게 화룡의 심장을 짜낸 핏물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치이이익!
이번에는 열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니, 진짜 녹아내렸을지도 모른다. 어마어마한 열기가 입안을 가득 채운 설삼의 냉기를 중화시켰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로 말할 수 없는 격통이 찾아왔다.
고통으로 인해 설삼을 도저히 씹어 삼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대로 뱉어버리면 영약을 바닥에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까워서라도 반드시 흡수해야만 한다.
입안이 얼어붙고, 녹고를 반복했다. 자연스레 중화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상반된 두 성질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두 가지 종류의 통증을 동시에 겪는 것은 지금껏 겪어왔던 고통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급한 대로 남아있는 엘릭서를 전부 입에 들이부었다.
꿀꺽. 꿀꺽.
어떻게든 입안에 있는 내용물들을 전부 삼켜냈다.
사실상 통째로 삼킨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쯤 되면 내 위를 플라스크 삼아 영약들을 합성한 셈이었다.
신기하다.
속에서 이 영약들의 성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식도가 녹아내리는 것 같다가, 이내 얼어붙는 것 같다가,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은 감각을 반복하고 이제는 위, 그 다음부터는 배 쪽에서 느껴졌다.
이 느낌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강렬한 두 기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거세게 날 뛰고 있었으나 이걸 엘릭서가 간신히 틀어막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한 마디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뱃속에 쳐 박아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하며, 몸 내부에 마나를 순환시키는 것 뿐.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전신에 마나를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심장 부근으로 이동시켰다.
깊게 호흡을 내쉬며 뱃속에서 요동치는 강렬한 기운을 통제하기 위해 집중했다.
10분….
20분….
“후우…. 하아….”
시간이 지날수록 통제하기는커녕, 걷잡을 수 없이 날뛰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좀 합쳐져라!’
간절히 기도를 해보았지만 두 기운은 마치 나를 농락이라도 하듯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이대로 지속된다면 뱃속이 터져 죽어버릴 것 같았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고, 호흡을 통해 상반된 두 기운을 조금씩 뱉어냈다.
살기 위한 본능 때문인지 기운을 방출하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그 속도가 주체가 되지 않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 기운들이 주변으로 퍼져갔다.
나는 조금이라도 기운들을 묶어두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제발 좀 합쳐지라고! 이 개 같은 거!’
이제부터는 정신력의 싸움이었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속안이 천불이 치밀어 오르는 것처럼 뜨겁고, 세계가 얼어붙은 한파가 찾아온 것처럼 차갑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진 시야가 점차 흔들린다.
‘아…. 안 되는데….’
힘이 빠진다.
눈꺼풀이 마치 바위처럼 무겁다.
점점… 눈이 감긴다.
…깜빡.
…깜…빡.
…….
“―!”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난 거지?
5분? 10분?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창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분명 밤이었는데 동이 트는 것을 보니 예상보다 훨씬 더 시간이 많이 지난 듯 하다.
당황도 잠시.
나는 눈에 띄게 변해버린 집 내부를 보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미친.”
나를 기준으로 정확히 절반.
좌측은 얼음축제라도 온 것 마냥 벽까지 통째로 얼어붙어 있었고, 우측은 온통 검게 그을려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 했다.
이건 내가 알고 있던 방의 풍경이 아니다.
잠깐 정신을 잃은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잠깐.
“저게 뭐야…?”
혹시나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눈을 비볐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내 앞에 둥둥 떠다녔다.
주먹만 한 크기의 불꽃.
손과 발로 보이는 조그마한 무언가.
조그마한 다리를 힘껏 움직여 내 손등 위로 다가온 그것이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몸을 비볐다.
이번에는 옆에 있던 눈꽃 모양의 무엇인가가 반대쪽 손으로 다가왔다.
서로를 노려보던 둘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내게 밀착했고, 이내 짜증이 난 것인지 불꽃이 콧김을 뿜었다.
그러자 머리로 추측되는 불꽃이 거세게 피어올랐고, 난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응?
뭔가 이상했다.
당연하게도 손등에서 느껴져야 할 작열통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다…?’
나는 손등 위에서 점점 더 불꽃을 키우고 있는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설마… 정령이니?”
조그마한 불꽃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