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벨라 트레이는 굉장히 오래간만에 투쟁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과거, 용병 시절에는 매일 매일이 투쟁의 연속이었다. 매일 같이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끝에서 생사를 오가는 전투의 향연은 그녀의 피를 들끓게 했다.
그녀는 야수였다.
태생이 맹수며, 짐승이었고 누구보다 전투를 사랑했다.
그리고 동료들을 사랑했다.
죽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직업이지만, 용병들의 대부분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심을 느꼈다.
허나 그녀는 이들과는 달리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스스로의 손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았다면, 본인 또한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내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모여들었고, 그녀의 이름은 널리널리 퍼졌다.
그렇게 용병대가 탄생했다.
붉은 사자는 용병대를 이끌며 수많은 전장을 전전했다. 그녀가 나타난 전장은 모든 것이 그녀의 뜻대로 흘러갔다.
마치 전쟁의 신에 가호라도 받은 것처럼.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적들은 우수수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진 것은 적들만이 아니었다.
용병대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욱 커다란 전장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죽어나가는 것은 용병대의 말단.
즉 이제 갓 들어온 신입들이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동료들이, 그녀의 이름일 널리 퍼지면 퍼질수록 더 많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전투를 사랑했지만, 더 이상 붉은 사자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용병대가 커지면 모두가 즐거워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수록 묘비에 새겨지는 이름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더 크게 와 닿았다.
그렇게 용병대는 해제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따르던 많은 동료들에게 용병대의 수익을 전부 나누어 주었다.
모두가 그녀의 곁을 떠났다.
오로지 부관이었던 막심만이 그녀의 곁에 남아 그녀를 보필했다.
가장 오랜 세월 자신을 따르던 멍청이였다. 얼굴만 반지르르하고, 검은 제대로 휘두를 줄도 모르는 샌님 같은 놈.
그러나 가장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이이기도 했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았다.
말이 평범이지, 사실상 한량에 가까웠다. 매일 같이 술을 퍼마시고, 가끔 주변의 마물들을 처리하거나 사냥에 나섰다.
더 이상 심장이 뛰지 않았다. 재미가 없다.
무료하고, 지루하다.
매일 같이 그런 감각을 느끼며 무기력하게 살아갔다.
막심은 그런 그녀의 무기력함을 채워줄 수 없는 자신에게 환멸감을 느꼈다.
그러던 도중, 한 사내가 마을에 들렀다.
그의 이름은 맥도웰.
과거, 검귀(劍鬼)라고 불리던 사내였다.
벨라 트레이는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고, 매일 같이 그를 도발했지만, 그는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허나 끈질기게 덤벼드는 벨라 트레이에게 결국 백기를 든 그는 자신에게 패해하게 된다면 아카데미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
그녀는 당연히 그것을 수락했고, 벨라 트레이는 검귀에게 패배했다.
30합도 채 나누지 못하고.
심지어 그조차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막심과 함께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맥도웰의 추천과 과거 자신의 이명 덕분에 교수로서 생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예전만큼 심장이 뛰지를 않았다.
맥도웰.
그 자와 싸울 때 느꼈던 그 심장소리를 다시 한 번 듣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수로서 열심히 활동했다. 그에게 인정을 받고 다시 한 번 그와 대련하기 위해. 나아가 그를 뛰어넘기 위해.
예상했던 것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녀에게 잘 맞는 것도 있었다.
의외로 선생으로서의 자질이 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웬 햇병아리에게 그 심장소리를 듣고 있었다.
맥도웰과 싸울 때 들었던 그 고동소리가 자신의 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피가 끓었다. 심장이 뛰었다.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턱에 생긴 작은 상처. 전장에서 활동할 때에 비하면 상처 축에도 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지금 그녀가 놀라워하는 부분은 자신이 고작 한낱 신입생에게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었다.
‘저게 이번에 갓 들어온 신입생이라고…?’
벨라 트레이는 흡사 맹수처럼 입맛을 다시며 자일 지그하르트를 노려봤다.
“흐흐. 정말 네놈이 이블을 막아낸 것이었구나.”
자일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눈빛.
저게 이제 갓 들어온 신입생이, 햇병아리가, 낼 수 있는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그럴 수가 없다.
저것은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전투를 겪어온 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영웅의 일족…. 그 전설들이 정말 부풀려진 게 하나도 없단 말이지?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거군.’
자일 지그하르트가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어떠십니까?”
“충분하긴 뭐가 충분하다는 것이냐. 아직 제대로 확인도 못 했는데.”
“하아…. 알겠습니다.”
자꾸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제 갓 입학한 신입생이 나를 상대로 한숨을 쉬며 저리도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나를…?
감히 붉은 사자라고 불렸던 나를 눈앞에 두고 말이다.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저 태도는 허세 따위가 아니다.
자신감.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이다.
벨라 트레이는 생각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힘의 10분의 1정도만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보여준 무력은 단순히 신입생들 중에서도 뛰어나다고 부를 수준이 아니었다.
절반.
정확히 절반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잘 피해야 할 거다. 부러지는 걸로 안 끝날지도 모르거든.”
벨라 트레이의 신형이 사라졌다. 아니,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잔상을 남기고 이동한 것이다.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자일 지그하르트의 뒤편이었다.
그녀가 주먹을 내질렀다.
아까 사용했던 것처럼 준비 동작도 없이 곧장 뻗어나가는 일격.
그녀가 용병시절 무투술을 다듬으며 직접 고안해낸 고유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
이번에는 확실하게 들어갔다고 생각했으나 자일 지그하르트는 말도 안 되는 반응속도로 그녀의 주먹을 쳐냈다.
아니.
거기에 끝나지 않고, 심지어는 반격까지 했다. 물론, 유효타가 되지는 못 했지만, 그 짧은 찰나에 거기까지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나이 때의 자신은 이 정도 수준의 무위를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자면 당연하게도 아니다 였다.
‘…이것 봐라?’
오러가 깃든 주먹. 웬만한 마법 중에서도 화력이 가장 높은 마법의 버금가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뛰어난 파괴력만큼이나 그 속도 또한 평범한 인간은 눈으로 쫓을 수도 없을 정도다.
그런데 그것을 쳐냈다.
아무리 절반 밖에 사용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무려 오러를 쳐낸 것이다.
흥미로운 미소를 지은 벨라 트레이는 주변에 굴러다니던 나뭇가지 하나를 쥐었다.
비록 나뭇가지였으나 그녀의 오러가 깃들면 바위도 두부처럼 썰어낼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기본적으로 검사였다. 무투술은 용병으로서 살아오며 짧게 익힌 것 뿐.
검을 사용할 때 비로소 본연의 능력이 발휘됐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지금까지 교수 생활을 하면서 신입생이 내 몸에 상처를 입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아무리 힘 조절을 하고 있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네? 영웅의 일족이란 놈들은 원래 전부 그런 것이냐?”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 좋았다고? 겸손한 건지… 오만한 건지…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너도 무기 들어라.”
자일 지그하르트가 그녀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이 무기입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근처에 있던 바위를 향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후웅!
바위의 표면에 사선으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쿵.
주변에 있던 드렌트들이 그 광경을 보고 경악한 얼굴로 저마다 떠들기 시작했다.
“सा रक्तकेशिका कन्या राक्षसी अस्ति।!”
“स्पष्टतया न मानवः। शाखायाः शिलाच्छेदनं सार्थकं भवति?”
벨라 트레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일을 바라봤다.
“내가 쥐면 그게 무엇이든 검이 되지.”
“…대단하시군요. 나뭇가지로 바위를 가르다니.”
자일 지그하르트의 손아귀에서 마나로 이루어진 보랏빛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요한이 자일과의 대련에서 보여주었던 마나의 창을 흉내 낸 것이었다.
“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그것을 본 벨라 트레이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마나 창이라. 요한, 그 재수 없는 놈한테 배운 것이냐?”
“따로 배운 건 아니고 그저 흉내를 내 본 것 뿐 입니다.”
그녀는 과거 요한과 대련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하늘을 수놓았던 수 십 개의 마력의 창.
원거리에서는 온갖 종류의 마법들을 난사하고 근접전에서는 기사와 동등한 실력을 뽐냈다.
마투사(魔鬪士).
괜히 그런 명칭으로 불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법 뿐 만아니라 무기술과 무투술도 자유자재로 다뤘다.
마법사는 근접전에 약하다는 편견을 완전히 깨버린 것이다.
그는 그녀가 지금껏 상대했던 마법사들과는 수준 자체가 달랐다. 아니, 다른 차원의 존재였다.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종류의 무기들을 제 수족처럼 다루던 그의 몸놀림은 아직도 그녀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마저도 전력이 아니었다.’
으득.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다시 화가 치밀었다.
“그래. 하는 짓도 그렇고. 그놈의 제자답구나. 특히 그 오만한 표정. 아주 그 놈을 똑 닮았어.”
자일은 대답 대신 창을 바로 잡으며 자세를 취했다.
벨라 트레이 또한 투기를 끓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마나를 주입하자 쥐고 있던 나뭇가지의 끝부분이 붉게 물들며, 점점 더 길어졌다.
이내 그것은 검날이라 부를 수 있는 형태가 되었다.
“간만에 심장이 뛰는 구나. 나를 더 즐겁게 해줄 거라 믿는다. 자일 지그하르트.”
둘 사이의 거리는 어림잡아 열 걸음 정도.
누군가에게는 꽤 먼 거리라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평범한 인간의 육체를 초월한 기사에게는 단숨에 도약할 수 있는 거리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동시에 격돌했다.
쩌엉!
흡사 천둥 벼락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주변 일대의 충격파가 뿌려졌다.
찰나에 힘겨루기.
‘힘은 근소한 차이로 내가 위인가. 역시 그 녀석의 제자답군.’
더 이상 힘 싸움을 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한 자일이 뒤로 한 걸음 후퇴하며 창을 틀었다
자색빛 마력을 띄고 있는 창날이 공중에서 궤도를 바꾸며 벨라 트레이의 오른쪽 어깨를 노렸다.
벨라 트레이는 회피 대신 반격을 택했다.
준비 동작도 없이 곧장 뻗어져 나간 나뭇가지가 창날을 베었다.
서걱!
마나로 이루어진 창이 힘없이 소멸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벨라 트레이가 쥐고 있던 나뭇가지가 자일 지그하르트의 목덜미를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